|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마14:28~31)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상황이 불리하게만 느껴지고
절망에 눈이 멀어 있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내게 사는 분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좋다는 사명감으로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삶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면 ......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 폭풍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부르심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은 바다에 폭풍이 몰아치고 물결이 요동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친히 그 파도 위로 걸어오십니다.이때 베드로는 이 사건에서 아주 멋지게 출발하고,
그 다음에는 베드로가 결국에는 필사적으로 부르짖는 비참한 실패자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폭풍이 갑자기 휘몰아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순간에는 바다가 잔잔하다가도 다음 순간에 돌연히 성난 폭풍이 불어닥치곤 합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바다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 폭풍이 베드로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폭풍 새로운 것. 색다른 것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잔잔한 물 위로 걸어 나갔을 때 폭풍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배 근처에 출현하시기 전에 폭풍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곤란에 빠지고 비참해지며 두려워하고 필사적인 상태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의문은 ‘왜 그랬는가?입니다.
그리고 해답은. 주님은 그에 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십니다.
문제는 적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우리가 여기에서 배우는
첫째 사실은, 우리가 때로 자신의 의심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결을 바라봄으로써 의심을 생성시켰습니다.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물결을 바라봄으로써 의심을 생성시킨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의심할수 있지만 , 의심에 지배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 위에만 굳게 서서 스스로를 의심 속에 몰아넣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 합니다.
두 번째 사실은 의심이 믿음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면 결코 의심에 의해 공격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심을 가질 수도 있으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믿음. 연약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의심에 관한 세 번째 원리가 될 것입니다.
만일 다시 의심이 우리를 제어한다면 이것은 믿음이 약하다는 표시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믿음이 약하였기 때문에 의심이 그를 지배하고 압도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흔들었습니다.
바다에서 폭풍이 제자들의 목숨을 위협하자 예수님은 먼저 폭풍을 꾸짖으신 다음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교훈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공포에 떨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의심의 지배를 피할 수 있을까요?
치유제는 ‘큰 믿음’ 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그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큰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큰 믿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신뢰와 확신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권능에 대한 지식 및 그 사실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거룩한 성품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분의 신성[전지]과 영광[뜻]을 이해[경외 함으로] 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진정으로 해롭게 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볼 수 없을 때에도 믿음으로 계속 서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시련을 믿음을 증명할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실패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출발은 좋았습니다.
폭풍이 노호하는 바다 위에서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배 안에 있었습니다.
바다와 바람은 거칠었고 배는 파도에 이리저리 요동하고 있었으며 사태는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홀연히 주님께서 출현하셨습니다. 그를 보고 제자들은 말합니다.
“지금 사람이 물위로 걸어오는 건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틀림없이 유령일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 소리를 지르자 예수께서 곧장 오시며‘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참 신앙의 본질을 멋지게 나타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이 말은 참 신앙의 표시였습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주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저는 압니다.
나에게 명하사, 이 격노하는 바다 위의 배에서 나와, 풍랑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에 관한 증거를 보여주소서.” 베드로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의 권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신분, 주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것들을 단지 이론적으로만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시험해보았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주여 만일 주시어든…’ 베드로의 이 말에는 신앙의 본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신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주께서 나를 물 위로 걷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명하여 물 위로 걷게 하소서.”
그리고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언제나 확고부동하게 붙잡지 않으면 안 될 위대한 원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주님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하고 끝납니다.
기독교 신앙은 주님의 복되신 인격(신분, 정체)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즉 신앙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
그의 신앙은 약하였으며 그 때문에 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구원의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고 비참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인이라야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자신들의 자기 정죄 자체가 회개의 보증이며 궁극적 해방으로 가는 길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비참에 빠진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그런 사람들의 지식은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도 바로 이런 결함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짐승 당근과 채찍으로 길들여 진다.
성경은 미련한 사람은 다룰때도 똑같은 방법으로 가능한다.
시32;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대신 주님은 우리에게
시편32;8]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전자는 어쩔수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지만 ,
후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면 그분의 자애로운에 주목하고 사모한다.
시편32;8-9]을 주해하며 “ 매를 자초하는 사람은 그분의 주목을 무시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우리는 인생의 시련보다 하나님을 인도자로 삼아야 한다.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그 자체에 관한 진리가 자유를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한 화가의 집에 도둑이 들어와 그 화가가 아끼는 아주 귀한 작품 한 점
을 훔쳐갔습니다. 화가의 친구들이 와서 "이 일을 어떻게 하지?"하며 소동을 벌이고 야단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정작 태연했습니다.
"이 사람아, 그 값진 재산을 잃고도 그렇게 태연하다니…."
"친구들, 내 그림을 도둑 맞은 것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써주니 고맙네. 그러나 그것은 내 참 재산이 아니야. 내 진짜 재산은 내 머리에 있어. 그림이야 내 이름으로 발행한 수표 한장에 불과해. 앞으로 더 좋은 그림을 그릴 테니 걱정하지 말게."
화가가 아닌 친구들이 보기에는 그 그림이 더없이 귀한 재산이지만,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는 별것 아니었습니다. 한 장 더 그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고,
남들이 쩔쩔매는 시간에도 든든히 살아가게 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우리 모두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와 넓이을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실력 있는 사람, 길을 아는 사람은 쉽게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올바른 지식과 믿음에서 출발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출발한 후에 두 번째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행히도 베드로는 그것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대로 파도를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왜 그런가요?
베드로는 배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 문제를 이미 해결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배 가까이 오시기 전에 이미 폭풍이 격노하고 있었다는 그 중요한 사항을 저는 앞에서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잔잔한 바다 위로 뛰어내리고 그 다음 순간에 폭풍이 일어났다고 하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만일 그했다면 베드로에게도 변명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베드로 자신이 파도의 문제를 해결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한동안 배 안에서 파도와 투쟁을 벌였었습니다.
그는 배가 가랑잎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님께 한 말은, 바다가 어떠하든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다의 흉용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이미 해결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 밖으로 나가 바다위로 걸어갔던 것입니다. 물결은 전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파도에 어떤 새로운 요인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모종의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던 것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에게 요동하는 파도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파도를 바라보았습니까?
거친 물결을 바라보아야 할 만한 무슨 이유라도 있었던 것인가요?
일단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여러분은 일정한 것들에 대해 문을 닫고 그것들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문제들을 이미 처리했다면 그것들을 다시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결코 파도를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이미 처리하였다!”
믿음의 다음 특징은, 끈질기고 변함없이 견실하게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친히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여 행하실 수 있다.
그 일의 시작은 기적이었다.
주님이 기적적인 일을 개시할 수 있다면 이를 계속하여 견지할 수도 있다.
주님은 이미 시작하신 일을 계속 행하실 수 있다.”
또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한 여러분과 저는 결코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랫동안 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리스도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행할 수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의 상황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다아십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생활을 다 아십니다. 여러분의 발자국도 다 아십니다.
여러분이 지난 월요일에 어디에 갔다왔는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발자국, 우리의 걸음을 다 세신다고
욥기 31장 4절]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그런데 지식 때문에, 실력 때문에, 혹은 권세 때문에 교만하면 그 사람은 패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입니다.
물은 100도가 되면 끓고 0도가 되면 업니다.
사람은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어 일어나게 되고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얼어붙게 하시어 망하게 됩니다.
잠언 16장 18절『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면 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마귀뿐입니다.
지식이 쌓일수록, 실력이 높아질수록, 성공할수록 겸손한 성도가될 수 있기를 바랍 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베드로는 공포와 놀람 가운데 소리를 질렀습니다.“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은 즉시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결코 가라앉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실망시킬 수도 있고, 여러분 자신이 최종적으로 영구히 넘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부르짖으십시오. 거기에서 넘어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놀랐다면 부르짖으십시오. 그리스도가 그 소리를 들으시고 여러분을 붙들어 올릴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 전체의 위대한 교훈은.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면 바다위로 계속 걸어갔을 것이며 결코 그 고통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크신 분이며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스스로가 바다 위를 걸으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바다 위를 걷도록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는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믿음, 강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을 본다.
오직 약속만을 바라본다.’ 그 밖의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강한 믿음은 불가능, 즉 이 사나운 파도를 비웃으며 외칩니다.
‘이루어지리라’그러므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유 24-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