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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숙님
12월 1일
사드철거 김천평화촛불 제 966회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12월의 첫날.
이제 귤과 감이 맛있는 계절이다. 이용기 전 경북지부장이 청도 반시를 선물했다.
박석민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 운영팀 막내이자 자문위원이 마이크를 잡고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발하는 것을 비판했다.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 대해서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법에는 보장돼 있긴 한데 역대로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거부권을 행사 안 하는 영역이 하나 있었어요. 자기 가족 친인척과 관련된 비리나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선 국회에서 올라온 법안을 거부하지 않았던 게 그건 예의였어요.
근데 윤석열은 뭐 계속 거부권, 그들의 입장에서는 '안 좋은 법안이 올라와서 거부권을 행사한다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윤석열이 검사 때 했던 얘기 혹시 기억나세요?
뭐라고 그랬어요?
'특검을 왜 거부합니까? 죄가 없으면 특검을 하면 되죠. 죄지은 사람이, 특검을 거부하는 사람이 범인입니다.' 얘기했었어요.
근데 이번에(지난 7일인가?)기자회견 때 뭐라고 얘기했냐 하면 대통령과 여당이 반대하는 특검법은 이걸 강요하는 건 반헌법적 발상이래요. 그래서 지금 25번째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그래서 찾아봤어요.
아나운서가 '이승만이 거부권을 제일 많이 행사했는데 거의 반을 넘어섰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건 틀린 얘기예요. 왜냐하면 이승만은 12년 집권하면서 45번 했어요.
근데 윤석열은 2년 6개월 만에 25번을 했으니까 이게 단순 비교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마치 이승만이 반 정도 한 것처럼 역시 KBS답게 그렇게 보도합니다.
그래서 역대 거부권 행사한 거 쭉 보니까 이승만 이래로 박정희부터 문재인까지가 대통령이 9명이에요. 9명 전체가 거부권을 행사한 게 21번이에요.
박정희가 다섯번, 노태우가 7번, 노무현이 6번 이때는 다 여소야대였어. 그래서 거부권을 그렇게 행사했고 김영삼, 김대중, 문재인은 거부권 한 번도 행사 안 했고, 이명박이 한 번, 박근혜가 2번 이래갖고 전체가 21번 했는데, 이 모든 대통령 (이승만 빼고) 의 거부권을 지금 뛰어넘어섰어요.
그러니까 역대 최다라고 하는 표현이 맞을 뿐만 아니라 최악으로 달리고 있는 중이죠.
그래서 지지율이 다시 10%대로 떨어져서 최근에 대학도 특히 모교인 서울대까지 시국선언, 퇴진 요구하는 성명, 퇴진 촛불들이 쭉 진행되고 있습니다.
근데 제 예상은 남은 2년 5개월 동안 굳건히 버티다가 마지막에 가실 거라고 생각해요. 하여튼 그거를 좀 당길 수 있는 이런 투쟁이 좀 더 있어야 되지 않을까?
윤석열이 반드시 물러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좀 모으고 그런 힘으로 오늘 김천 966회 집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사회를 맡았단다.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구절이 찬 바람이 되어 와닿는다. 구호를 외치고 바로 발언에 들어갔다.
"27일 날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을 대표로 하는 우크라이나 특사들이 와서 윤석열하고 만났습니다. 그래서 상호 협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예상컨대 '우크라이나에서 무기 지원 요청을 했을 거다. 대통령실은 이걸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무기 지원을 (요청)했을 거다.'
이런 게 최근 언론의 보도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이 높죠.
https://v.daum.net/v/20241127104156562
우크라 특사단 오늘 방한…尹대통령 예방해 무기지원 요청할 듯(종합)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우크라이나 특사단을 접견하고 전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할 것으로 알려졌다. 루스템 우메로우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이 이끄는 특사단은 이날 오전 입국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사단은 이날 폴란드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으며, 이르면 이날 윤 대통령을 예방하고, 김용현 국방부 장관
v.daum.net
이미 작년에 미국을 통해서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바 있고, 작년 7월달에 윤석열이 우크라이나 가서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굳건하게 연대하자.' 했는데, 무슨 우크라이나랑 우리랑 혈맹 관계야? 우크라이나하고 우리하고 어떤 이해관계가 있어요? 게다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키이우까지 가서 젤렌스키 만나가지고 얘기하는 걸 보면서, 사실은 모종의 미국의 압력이나 무기 지원과 관련된 요청, 이런 것들이 다 있구나 (생각했어요).
최근에 북은 우크라이나 파병 러시아 쪽으로 했다고 하고, 트럼프 2기 때 시작할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새로 선임됐는데, 한국의 무기 지원과 관련해선 경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고, 러시아는 한국이 무기 지원하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한국을 제재할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북은 북대로 파병하고 남에서는 어떻든 국민 82 프로가 반대하는데 우크라이나에 포탄 살상무기를 지원하는 이런 방식으로, 한반도에서의 남북 대결도 모자라서 다른 나라에 가서 남북이 대결하는 양상으로 되는, 이런 대통령의 좌충우돌 은 결국 한반도의 위기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즉각 중단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의 역사는?
12월 1일 오늘이 세계 에이즈의 날이에요. 1981년에 에이즈가 제일 먼저 발병한 나라는 미국인데, 에이즈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는 남아프리카 쪽이에요.
아프리카 쪽이 위생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생활 환경이 어려우니까. 그래서 WHO에서 1988년에 런던 선언이라고 하는 걸 채택해서 '에이즈를 퇴치해야 된다. 이겨내야 된다.' 해서 세계 에이즈의 날을 오늘로 결정을 했습니다.
https://note0448.tistory.com/78
차별을 넘어, 함께 만드는 에이즈 제로
차별을 넘어, 함께 만드는 에이즈 제로 - 2024년 세계 에이즈의 날을 맞아 기념식 및 예방 캠페인 개최- 기념식에서 에이즈 예방·관리 공헌 유공자 포상(기관(4개), 개인(30명))(11.28.)- 국민과 함께하는 다채로운 참여형 캠페인(‘예방으로 감염제로’) 진행(11.28.~12.1.) 질병관리청(청장 지영미)은 세계 에이즈의 날*(12.1.)을 맞아 서울 켄싱턴호텔 여의도에서 기념식(11.28.)을 개최하고, 에이즈 예방과 인식개선을 위한 대국민 캠페인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 「세계 에이즈의 날」 : 1988년 148개 국가가 참여한 세계 보건장관회의에서 에이즈 예방을 위한 정보 교환, 교육 홍보, 인권 존중 등을 강조한 ‘런던선언’ 채택 후 국제연합이 제정 올해 세계 에이즈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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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리가 워낙 엉망진창으로 지구를 만들어 놔서 수많은 질병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고, 가장 큰 혼란으로 오게 될 게 기후위기기 때문에 '빙하가 녹으면 그 안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과 이런 것들이 창궐하게 되면 인류가 어려워질 거다.' 이런 기후학자들의 여러 가지 경고도 있습니다.
1905년 12월 1일,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 교주가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날이 오늘이기도 해요. 전에 한번 말씀드렸는데 손병희 3대 교주의 셋째 사위가 가난했던 방정환 선생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지원을 받아서 아동 어린이 인권 보호 운동을 할 수 있었답니다.
1948년 12월 1일날 이미 일본 때 있었던 법이지만 다시 통과시킨 법이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는 희대의 악법을 만든 날입니다.
12월 2일은 세계 노예제 철폐의 날이에요. 그런 날이 있다고 하는 건 뭘 의미해요? 노예가 있다는 거죠.
세계 노동기구 ILO에서는 1억 4천 500만 명 정도의 아동들이 노예제로 팔려나가고 있다고 하는 보고를 발표한 적이 있어요.
축구공 있죠? 이거 다 조그만 손, 아주 여리고 정교한 손으로 해야 돼서 아이들을 동원해서 노동을 시킨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피파 공 다 그렇게 만든다 합니다.
노예제 자체도 문제지만 특히 아이들을 동원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시키고 있는 자본의 이런 탐욕이 더 이상 되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도 한편 해봅니다.
12월 3일날은 박근혜 퇴진 촛불 때 232만 명이 모였던 날이에요. 가장 많이 모였던 날입니다. 그래서 브루스 커밍스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집회다 이렇게 표현을 했었는데 그 기록은 깨졌어요.
2020년 11월 26일 날 인도에서 반농민법 반농정책에 항의해가지고 2억 5천만 명이 상경 투쟁을 한 적이 있어요. 2억 5천만 명, 이 기록은 중국과 인도에서 집회가 없는 한 앞으로 아무도 못 깨게 돼 있어요. 그래서 기네스북에 등재됐거든요.
"오늘은 12월 1일 국가보안법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생각을 좀 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어떤 법이에요? 유명한 말이 있죠.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그 얘기가 맞아요? 아니요. 악법은 그냥 악이에요. 어떻든 악법이지만 지켜야 된다는 걸 함의하는 이야기를 한 거지만 악법은 그냥 악이에요. 법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거죠.
국가보안법은 우리나라가 외세의 강요에 의해서 분단된 나라고 지구상에 유일하게 같은 민족이 둘로 분단돼 있는 나라인데 그 분단을 유지하는 법이죠.
기득권 세력이 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보장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법이에요.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으로 사실은 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법으로 돼 있죠.
국가보안법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악용 사례도 너무 많지만, 인간의 존엄과 인간성을 파괴하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국가보안법은 형도 쎄게 때려요.
헌법에 정치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이런 것들이 보장돼 있잖아요. 인간이 갖고 있는 존엄이 인간의 기본 권리를 정하고 있는 헌법에도 중요한 영역으로 보장돼야 된다고 하는 것 때문에 헌법에 이게 들어가 있는 건데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은 이를 뛰어넘어요.
국가보안법으로 사람들을 조사할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 이걸 후벼파. 괴이쩍고 고약하고 그래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간첩이 되고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이런 일들을 우리 역사는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는 인혁당은 여러 분이라서 그 얘기를 다 하기 그래서 한 두 분 정도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데, 한 분은 진보당 사건으로 1959년인가 이승만이 사법 살인해서 죽임을 당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이에요.
조봉암은 강화도에서 태어나신 분인데 20대 1919년에 3.1만세운동 때 투옥돼요.
1년 감옥 생활을 하는데 그분이 쓴 글에 보면 '감옥에 들어간 이전의 나와 감옥에서 나온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 감옥 생활을 하면서 조국의 현실 식민지 지배를 끝내야 된다고 하는 이런 것들이 훨씬 더 강해지고 크고 넓어진 거겠죠.
이분이 김희옥이라고 하는 분하고 굉장히 서로 좋아했는데 신분 차이 때문에 김희옥 씨 집에서 못하게 한 거야. 그래서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서도 2년 동안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해요. 집안의 반대 때문에.
일본에서 만난 사상이 무정부주의, 아나키스트, 이런 사상들을 쭉 보다가 조국의 해방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될 사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다 하고, 그래서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다 해요.
모스크바에 대표단으로도 가고 모스크바 공산자대학을 졸업하기도 하고 이렇게 활동을 쭉 하죠. 조선공산당을 만드는 데도 혁력한 공을 세워요.
그러다가 조봉암만큼 훌륭한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김조이라고 하는 분하고 만나서 결혼을 해요. 활동하고 그러느라 결혼해서도 따로 사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강화의 김희옥이라고 하는 분이 폐병에 걸려요. 지금이야 이제 다 치료도 되지만, 예전에는 치료약이 없어서 죽기까지 했던 병이어서 죽기 전에 내가 조봉암 만나야 되겠다 이래갖고 집안에 허락을 받고 조봉암하고 다시 만나서 같이 살아요.
조봉암 선생이 딸이 하나 있는데 이 둘 사이에서 나요.
32년에 감옥에 들어가서 칠 년을 살아요. 1933년에 김희옥 씨는 돌아가시고 그 사이에 김조이 원래 부인도 5년 형 받고 감옥에 있다가 해방되고 난 다음에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고 이런 과정에서 박헌영하고 좀 뭐가 안 맞았나 봐요. 그리고 또 조금 현실론을 택한 것 같아요.
48년에 5.10 단독선거를 하잖아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였거든요. 그때 뽑은 국회의원이 200명이었는데 제주는 4.3 항쟁하면서 투표를 못 했잖아요. 그래서 198명을 뽑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요.
어차피 단독 선거나 단독 국가를 세우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다고 하면 여기에 결합해서 정부를 수립하고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게 현실적이겠다고 하는 판단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출마해서 초대 국회의원이 되고 50년에 재선되죠.
조봉암 선생이 국회의원이 되고 난 다음에 헌법기초위원을 해요. 법적인 인권 보호 문제, 예를 들면 구속영장 문제, 적부심 문제 이런 것들을 처음에 논의할 때 이승만 쪽 사람들이 ' 긴급한 상황에 대해서는 먼저 체포할 수 있다.' 이 조항만 있었는데 여기에다가 '긴급하고 내란이나 이런 국가 위기와 관련해서는 사후 영장 제도를 넣자'고 하는 거에다가 더 나아가서 '필요한 경우에는 고문 이런 것들도 보장해야 된다.' 이런 게 들어오는 거를 다 막아요, 조봉암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지 않는 법안을 법으로 만든다고 하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리고 니들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줄 아냐?' 이러고서 그걸 다 막아. 하여튼 이런 역할까지 해서 현재의 사법적인 인권 제도 초안을 만들고 하다가 재선이 되고 난 다음에 농림부 장관도 해요. 이승만으로서 파격적인 인사를 한 거지.
근데 한국전쟁이 터져가지고 국회에서는 '끝까지 싸우자' 결의하고 있는데, 이승만은 '우리가 이기고 있다. 국민들 안심해라.' 이러고 토끼잖아. 27일날 새벽 1시에 이승만을 만나러 신익희 국회의장하고 갔는데 이미 이승만은 튀었어.
그래갖고 조봉암 선생님이 뭐 하냐 하면 국가의 주요 문서들 챙기느라고 부인을 못 챙겨요. 겨우 문서들 빼가지고 나와요. 조선공산당을 만들 때 북한테 미움을 받았을 수 있잖아. 조공 만들고 이러는 거에 반대했던 것 때문에. 김조이 씨는 납북당해요.
다시 서울이 탈환되고 9월 8일 이후에 평양까지 쫓아갔는데 부인을 못 찾아요.
한편으로는 국회에서 결의한 '이승만 사과, 정부의 사과가 필요하다.' 이래서 이승만한테 쫓아가요. 신익희 국회의장하고 조봉암이 그때 국회 부의장이었으니까 쫓아갔는데 이승만에게 사과를 요구하니까 '내가 왜 사과를 하냐? 사과는 당신들이 해라.' 이랬대.
하여튼 권력을 오래 가지려면 뻔뻔해야 돼. 이렇게 좀 뻔뻔한 게 있어야 돼요.
아 뻔뻔한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다. 1980년 12월 1일날 우리나라 KBS가 처음 컬러 티비를 방영하기 시작했어요.
윤석열이 연두기자회견 생략하고 대담 녹화해가지고 방송했던 거 기억나시죠?
그때 대담을 했던 박장범이라고 하는 앵커가 김건희의 명품백을 뭐라 그랬어요? 조그만 파우치라고 얘기했지. 그렇게 얘기해서 김건희한테 이쁨 받고 윤석열한테 사랑받아갖고 KBS 사장으로 이번에 되셨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언론이 아첨 언론이 됐죠. 뭐 그것뿐인 줄 아세요? 1981년 3월달에 전두환이 대통령 취임하고 났을 때 KBS 앵커가 '남북이 대치하는 이런 한반도에서 이런 나라 상황에서 전두환 장군같이 훌륭한 분을 내려주신 하늘에 감사드린다.' 이게 공식 멘트였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언론이 엉망진창이 되고 제기능 못 찾고 이런게 오래된 건데, 누가 사장이 되냐가 사실은 그걸 또 규정하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이를 꽂냐 이것도 정권으로서는 되게 중요한 일이죠.
하여튼 조봉암 선생이 나중에 이승만 쪽하고 결별하고 진보당을 만드는 거죠. 진보당의 기치는 딱 세 가지예요. '민주주의 사회주의 평화통일', 이 세 가지의 기치로 현재 우리 상황이나 민족의 앞으로의 활로를 찾자고 하는 그런 것으로, 선거에도 나가서 굉장히 유효한 득표도 하고, 그러니까 이승만으로서는 아주 중요한 정적이 된 거죠.
그래서 이 진보당을 국가보안법 엮어서 결국 사형시키잖아요. 조봉암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경찰이나 공안기관에서 비석 비문 이걸 다 못하게 했어요. 어찌어찌 해서 비석은 세웠는데 비문을 못 썼어요.
비문을 언제 썼냐 하면 2011년에 조봉암이 무죄 판결을 받아요. 대한민국 법원이 52년 만에 무죄로 판결해서 그 딸이 2022년에 돌아가셨는데 딸이 '이제야 비문을 세울 수 있게 됐다.' 그러고 비문을 넣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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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대한민국 민주주의퇴보 사법살인 진보당사건(조봉암)
한국역사 특히 1945년부터 1960년 이승만정권을 보면 뭐 하나 제대로 한 개 별로 없습니다 친일파처단도 못했고 반공을 내세워 여수 순천 제주에서 양민학살을 벌렸죠 전쟁 중엔 부역했다고 피난 못 간 서울시민을 학살 사사오입이란 기적의 논리로 독재를 꿈꿨죠 중석불이라는 정경유착사건도 일어났죠 이 정도면 이승만 이 양반은 건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권력에 미친 노친네라고 밖에 안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밑에 사람들이 잘못했고 이승만은 몰랐다고 실드 치시는데 만약 몰랐다면 무능한 거 아닌가 싶은데 재밌는 건 이승만의 최대업적이라고 말하는 토지개혁은 이승만손에 간접으로 죽은 죽산 조봉암이 초대농림부장관으로 있을 시절에 토대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좌우합작을 극렬히 반대하던 이승만이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
live1973.tistory.com
조봉암 선생이 이렇게 돌아가셨다고 하면 지금도 살아있는 분, 국가보안법 피해자 얘기를 한 분만 더 하면 강용주라고 하는 분이 있어요.
강용주 얘기를 하려면 1980년 광주로 가야 돼요. 1980년 광주에서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강용주는 고3이었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도청을 사수하겠다고 도청에 갔다가 그날밤에 나와요. 칼빈총 들고 있다가 나와, 너무너무 무서워서. 대개 그런 일을 하게 되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그럴 거 아니에요? 거기에 끝까지 있지 못한 자기를 자책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막 이런데, 강용주는 1년 정도 가까이 수배 비슷한 거 받다가 주변의 설득 부모의 설득으로 다시 고3 들어가서 전남대 의대에 들어가요.
전남대 의대를 다니다가 그 유명한 85년 국가보안법에 의한 피해 사건인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서 사형을 구형받았는데 무기징역을 받아. 정확하게 14년을 살고 나와요.
감옥에 갇혔을 때 사상전향서를 쓰라 그래요. 내미는 쪽지에다가 싸인 하나 하면 당장 석방될 수도 있고 나가서 의대 다시 해서 자기가 하려고 했던 의사를 할 수도 있는데 거부하죠.
'그거를 하는 것은 내가 나를 인간의 존재를 갉아먹는 거고 그리고 국가는 이거를 강요하면 안 되는 일이다.' 이러고 거부해요.
국가보안법 피해자들, 내란죄 이런 경우에는 어떤 법이 또 기다리고 있죠? 보호관찰법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그래서 3개월마다 한 번씩 자기가 뭐 했는지 이거를 관할 경찰서에다가 신고하고 보고해야 돼. 안 하면 현행범으로 또 잡혀가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과거에 국가보안법으로 조작돼서 만든 사건에 거기에 머물러 있게 하는 거잖아요.
강용주가 이거와 맞서는 싸움을 해. 보안관찰법에서 요구하는 보안, 자기 사찰을 보고하는 거를 거부해요. 그래서 7번 재판도 받고 벌금도 내고 해요.
헌법소원까지 했는데 헌재는 합헌으로 결정을 하는데 강용주의 이 긴 싸움으로 보안관찰법은 못 없앴지만 그 안에 사상 전향을 강요하는 건 2019년에 그 법안을 삭제해가지고 폐지시켜요.
그래서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한 개인이 자기를 꺾고 자기를 무릎 꿇게 하는 거에 맞서 싸우는 싸움은 본인으로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한 거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런 피해에 가장 앞장서서 싸운 거잖아요. 잘못된 거를 바꿔내고 없애는 역사를 또 쓰기도 하는 이런 것들을 같이 공유하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용주는 나중에 의사가 돼서 뭘 하냐 하면 정말 내가 중요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광주에서 트라우마 센터를 만드는데 거기에 초대 소장을 맡아요. 국가폭력에 의해서 피해받은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을 치유하는 역할들을 쭉 하고 있는 것까지를 확인해 봤습니다.
https://blog.naver.com/go518s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의 희망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청년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블로그입니다.
blog.naver.com
민주주의가 사회주의가 그리고 평화통일만이 우리가 나가야 될 길이라고 해서 당을 만들고 그런 정치 활동을 했던 조봉암, 국가보안법 피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죠. 강용주 같이 조작된 수많은 간첩과 수많은 사건들을 만드는 국가보안법의 그것 때문에 만들어진 모든 피해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돼요? 다 무죄 판결을 받아요.
무죄 판결받고 국가가 배상하고 사과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이 권력을 유지해야 되는 이런 굴곡진 역사를 갖고 있는 게 한국 정치사고, 분단 때문에 기형적으로 운영되는 이런 나라꼴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만, 강용주가 그 싸움을 통해서 잘못된 제도를 없앤 것처럼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불법적으로 배치된 미국과 일본을 위한 미국의 불법 사드를 뽑는 이 투쟁이야말로, 사실은 또 우리가 이 시대에서 감당하는 그런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이런 해야 되는 그런 시대적 과제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날 그 많은 피해 사례를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두 분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한테 주어져 있는 또 과제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이야기를 공유했습니다."
노래하는 농부 우현덕 님.
"날이 너무 추워가지고 여기 옹기종기 모이신 분들이 연탄 한 장 같은 따뜻하신 분들이라 '연탄 한 장' 준비했습니다."
삶이란 나 아닌 다른 이에게
기꺼이 연탄 한장 되는 것
방구들 싸늘해지는 가을녘에서
이듬해 봄 눈 녹을때까지
해야 할 일이 그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면
하염 없이 뜨거워지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히 남는 게 두려워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장도
되려 하지 못했나보다
하지만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아침에
나 아닌 다른 이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나는 만들고 싶다
"오늘 아침에 제가 교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목표가 있으면 정말 살아가는 힘이 좀 나는 것 같더라고요.
말씀도 그렇고 지금 들려드릴 노래가 '우리의 김 씨'라는 노래입니다.
옛날에 황간역에 갔었거든요. 황간역 역장님이 노래도 하시고 그림도 그리시고 조각도 하시고 이랬는데 철사로 막 얼기설기 뭐를 만들어 놨어요. 나무에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놨는데 지게를 지고 가는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놨더라고요.
지게에다가 짐도 있고 이러니까 되게 힘들어 보였거든요. 얼굴도 막 찡그려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역장님 사람이 되게 힘들어 보여요.'
이러니까 역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지게를 진 사람'이라고 '지게 위에 짐은 어깨를 짓누르지만 빈 지게는 가슴을 짓누른다'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살아가는데 우리한테 주어지는 적당한 짐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를 조금 담은 '우리의 김 씨'라는 노래입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이 집 저 집에 물건을 배달하는 우리 김 씨.
오토바이 뒤에 놓인 상자 속에는 김씨의 꿈과 희망 가득 들었네.
오늘은 어제보다 수입이 좋아서 김 씨의 얼굴에는 웃음이었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인사하고 내려오려는데 앵콜 요청이 빗발쳤다.
'어머니와 고등어'
다소 춥기는 하나 견딜만한 겨울 날씨다. 이렇게 버텨내다보면 어디인가 도달하겠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나 가보려 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온 게 아까와서라도... 다음 주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오늘 집회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