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천부'(邊山 天府)'라 했다. 조선 인문지리지는 이미 변산의 산천과 물산이 남다름을 기록했다. 옛사람들은 '동국이상국집'에 '변산은 예로부터 천부라 좋은 재목 가리어 동량으로 쓰리라' 고 적었다. 변산은 부안의 상징이름이다. 생거부안(生居 扶安), 조선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는 어염시초(물고기ㆍ소금ㆍ땔나무)가 풍부해 부모를 봉양하기 좋은 곳이라 말했다. 온 땅과 산, 바다가 풍성하니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리라.
부안은 갯가에 접한 전형적인 농ㆍ어촌이다. 인구 5만7184명에 1읍 12개 면이다. 부안읍(2만2062명)에 거의 절반이 몰려 산다. 광주에서 승용차로 1시간30분 정도다. 젓갈로 유명한 곰소는 원래 바다였다. 1942년 일제가 부안지역을 군항으로 개발하려고 제방을 축조하고 도로를 개설하면서 육지가 돼버렸다. 이 때 곰소 염전도 만들어졌다. 부여, 김제가 곡창인데 일제가 가만 둘리 없었다. 그로부터 부안은 늘 권력의 손때를 탔다.
부안읍 서외리 나즈막한 언덕, 주택가 골목길에서 20~30m 가면 만날 수 있다. 첫 인상이 남다르다. 시골 성당치고는 영판 세련됐다. 누구는 마카오에서 본듯하다고 하고, 혹자는 남미풍이란다. 아무래도 지중해풍이 더 어울린 듯 싶다. 전면 둥근 기둥은 베이지색에, 벽면은 흰색이라 산뜻하다. 마치 사진에서 봤던 지중해 언덕 하얀 집들의 파노라마처럼 말이다. 도무지 촌 동네에 있을법한 건축미는 아니다.
우리나라 성당은 대부분 붉은 벽돌조나 한옥양식을 곁들이고 있다. 외벽은 세월이 쌓여 검붉은 벽돌빛으로 연륜이 묻어난다. 이 성당은 특이하게도 새하얗다. 종탑부 아치에 고동색 포인트를 줘 하얀 벽면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요샛말로 스마트하다.
근데, 이 성당이 1959년, 그러니까 57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성당 입구에서 자원봉사자를 만났다. "이 성당이 정말로 1959년에 지었단 말입니까. 성당 주춧돌에 '1960'이라고 돼 있으니 그럴 겁니다." 한국전쟁의 뒤끝인지라 건축 자금이 여의치 않았다. 가톨릭구제위원회의 원조를 받아 1963년 8월27일에 축성식을 했다. 어둡던 시절에 이리 환한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는 누구였을까.
그 무렵 부안성당 신부는 파란 눈이었다. 지정환(85ㆍ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 벨기에 귀족가문의 막내아들이었다.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이듬해 한국으로 향했다. 1961년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지 신부는 부안군청으로부터 간척사업 허가를 받아 신자들과 함께 공사에 매달렸다.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여의도 면적의 두배가 넘는 100만㎡(30만평)농지가 생겼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했다. 배고프고 힘겹던 시절이라 성당이라도 환했으면 했을까.
지 신부는 1964년 임실성당으로 옮긴다. 산양 젖을 이용한 치즈가공에 나섰다. 실패를 거듭하지 손수 이탈리아에 가서 기술을 배워왔다. 한국 최초의 치즈, 임실치즈의 시작이다. 벨기에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지원 받아 1967년 치즈공장을 세우고 서울 특급호텔에 납품했다.
신부는 불의에도 맞섰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했다. 5ㆍ18 항쟁때는 시민군들에게 나눠 줄 우유를 트럭에 싣고 혼자 광주로 내려갔다고 한다. 당시 경찰들을 만나면 '지정환'이란 자신의 이름이 "정의가 환히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단다. 그는 지난 4월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한국 국적증서를 받았다.
성당을 한바퀴 휘 둘러봤다. 유별난 정문도 없고, 경계 짓는 담벽도 없다. 정문 왼편에 에수 성심상이 있고, 에수상 정면이 본당이다. 특이하게 성당 옆에 큰 마당이 있고, 계단으로 된 작은 무대같은게 있다.
힘쎄 보이는 느티나무가 큰 그늘을 만드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인다. 마당 끝에 성모상이 서 있다. 키 작은 붉은 꽃 위에 선 하이얀 성모상에 자주 눈길이 간다.
종탑과 첨탑이 독특하다. 여타의 성당은 높고 뾰족한 종탑을 이고 있다. 부안성당 중앙 종탑은 뾰족하지 않고 둥근 아치형이다. 양옆의 작은 종탑도 아치형이다. 종탑에 낸 창문도 아치형이다. 측면과 후면에 낸 창문도 마찬가지다. 아치로 시작해서 아치로 마무리했다. 가만보니 로마네스크 양식처럼 느껴진다. 중세 고딕성당이 나타나기 이전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둥근 아치를 사용한 건축문법과 닮아 있다. 부드러운 곡선의 향연이다. 화사한 부드러움, 부안성당은 그랬다.
2003년 7월11일 오전 9시30분 김종규 부안군수가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었다.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다고 했다. 당시 산업자원부는 원전 쓰레기를 처리할 핵폐기장으로 부안 위도를 내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용단을 내려줘서 고맙다" 며 "국력을 다해서 돕겠다"고 치하했다. 바로 다음달 부안군 농민회를 중심으로 원불교 김인경 교무, 내소사 진원 스님, 황진형 목사를 비롯한 지역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모여 '핵폐기장 백지화ㆍ핵발전소 추방 범부안군민 대책위'를 발족했다. 참여정부의 첫번째 국책사업인 핵폐기장을 둘러싼 부안사태의 시작이었다.
대책위는 부안성당으로 찾아들었다. 성당에서 매일 30여명의 사람들이 자고 밥을 먹었다. 주민들은 성당 앞마당에서 집회에 들고 나갈 피켓과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신자들은 투쟁하는 군민을 위해 하루 200명분의 밥을 날마다 해댔다. 핵폐기장 수배자들은 경찰을 피해 성당에 머물렀다. 처음 투쟁이 시작된 7월 한여름부터 눈 내리는 12월까지 성당은 대책위 사무실이자, 숙소였으며, 동지를 확인하는 대동마당이었다. 어느새 부안성당은 '반핵의 성지'가 돼 버렸다.
반핵의 성지, 부안성당에 문규현 신부가 있었다. 당시 성당 주임신부였다. 1989년 전대협 대표 임수경씨의 귀국을 돕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일로 널리 알려진 그였다.
2003년 3월 문 신부는 수경 스님, 김경일 교무, 이희운 목사 등 성직자 3명과 함께 65일간 '삼보일배' 고행을 통해 새만금 간척사업의 부당성을 온몸으로 호소했다. 삼보일배, 출발지인 부안 해창갯벌에서 도착지인 서울 광화문까지 305㎞. 약 12만 번의 걸음과 4만 번의 절이 필요했다. 초인적인 고행은 새만금 간척사업을 다시 사회의제로 떠올렸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문 신부는 핵폐기장 반대 투쟁의 맨 앞자리에 섰다. 길위의 신부-.
당시 핵폐기장 대책위 대변인을 지낸 고영조씨는 훗날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문규현 신부님이 허락해서 부안성당을 근거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성당에서 매일 30여명의 사람들이 자고 밥 먹고 그랬다. 문 신부는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인 가정사와 대소사를 일일이 챙겨주셨다. 너무나 고마웠다"고 말했다.
부안 핵폐기장 사태는 2004년 2월14일 주민투표를 통해 종결됐다. 투표율 70%에 반대 90%였다. 방폐장은 결국 경주로 갔다.
성당 종탑에 시대의 흔적이 스며 있었다. 부드럽고 화사한 아치에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이 작은 성당에 일제하 침탈과 수탈, 60년대 가난 극복을 위한 자활, 70~80년대 가톨릭 농민운동, 2000년대 반핵과 새만금 생명운동이 살아 있었다. 그 자리에 문규현 신부가 늘 함께했다. 이제 67세, 사제직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역사와 시대를 껴안고 있다.
'길 위의 신부'에 세상은 늘 호의적이지 않다. 종북, 빨갱이, 외부세력, 전문 시위꾼이라 몰아세운다. 부드러운 아치가 너무나 이국적인, 부안성당을 뒤로한다. 문규현 신부가 거기, 서 있는 듯하다.
'저희 사제들의 가장 큰 고통은
억울하고 서러운 이들의 마음을
달리 위로할 수 없을 때입니다.
저희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형벌은
이 땅에 정의와 인권이
부재함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입는 사제복이 부끄러울 때는,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들이
분별없이 희생되고,
죽임당할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최고의 선물인 평화가
거부당하고, 파괴될 때입니다.'
-2012년 5월 문규현 신부 제주법정 진술 중에서
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 gslee@jnilbo.com
문규현 신부. 오마이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