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9일
본문 : 약2:14
제목 : 믿음이 행합니다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또한 사도로서 귀하게 쓰임 받은 주님의 종입니다. 야고보서의 중심 내용은 믿음과 행위입니다.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의 행위는 신자의 마땅한 삶의 열매이기 때문에 격정적으로 살되 사랑과 겸손으로 살 것을 주님을 믿는 세계의 모든 신자들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습니다. 그는 늘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분의 행실을 눈여겨보았으며, 영적 깨달음을 몸에 담고 경건한 습관처럼 실천하며 사역에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로서 늘 옆에서 주님을 가까이 모시며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아끼며 그분께 헌신했던 제자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야고보서를 읽으며 그가 항상 '예수님이라면 내가 겪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시고 말씀하시고 대처하셨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그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며 늘 말씀으로 인도하신 형님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의 믿음의 삶을 기억하며 그분의 가르치심대로 행동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설교자로서 단언컨대 야고보는 늘 진리를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살았으며, 삶과 목회 속에서 은은하면서 강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가르치심을 드러내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본을 보이는 귀한 종이었습니다.
야고보서는 먼저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서만 죄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다른 하나는 바로 '행함'입니다. 그는 행함을 대단히 중요시했습니다. 믿음을 말하면서 정작 행동하지 않는 '비상식적인' 사람들을 신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만 하는 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침을 가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안으로는 신자들 사이에 율법주의가 기승을 부렸고,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신앙관을 오해한 자들이 율법페기론을 들고 와서 불화를 일으켰으며, 밖으로는 난폭한 정치에서 비롯된 박해의 공포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전쟁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교회를 향해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신자들은 반드시 예배자, 순교자의 삶을 살아야 하며, 그것을 순종하는 '행함'이 신앙 고백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행함은 너무나 은혜롭고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가 이렇게 강력하게 외친 이유는 믿음을 내세우기만 할 뿐 순종의 행함이 없는 신자들이 교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사회적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야고보를 포함한 많은 사도들은 요한을 제외하고 모두 순교했습니다. 복음을 외치다가, 말씀을 가르치다가, 제자들을 기르다 죽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복음의 의를 따르며 순종하는 예배의 삶을 살아내기란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거나 신앙을 부인함으로써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지키기도 했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믿음을 지킨 신앙인들은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났습니다. 믿음은 마음속에서 잘 지키고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신앙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교회 안에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릇된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씁쓸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생활 형편이 좋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성도들은 따로 관리하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성도들은 방치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아픔이 무엇이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관심도 없고 그냥 인사와 당부만 주고받는 사랑 없는 교회의 모습이 우리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너무나 마음 아픈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에 대해 설교할 때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하면서 구원은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이 모든 것을 가리켜 은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구원은 믿음을 통해 얻으며,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 곧 이신칭의 신앙입니다. 이 은혜의 구원론이 전파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된 소식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귀한 진리를 통해 성도들은 묵묵히 신자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성장하지 못한 채 교회 안에 자리잡은 몇몇 교인들이 그릇된 신앙으로 주님의 교회를 썩게 만들어 지독한 악취가 나는 곳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원래 죄로 변질된 사람에게는 영적인 악취가 나기 마련입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믿는 자의 권위는 인정받고 싶지만 삶에서는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삶을 살기는커녕 오직 자신의 존재감만 높이고 드러내며 신앙을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극도로 싫어하십니다. 그들을 보시며 분노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그런 현실의 심각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변질된 권속들을 향해 일침을 놓았습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세상 사람들이 아닌 신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깊이 묵상하며,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깊이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닮아가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지 못하는 가라지의 인생을 보며 야고보 사도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어찌 나만 호의호식하며 가난하고 병든 형제자매에게 말로만 축복하며 그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빵을 뜯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나의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포도주를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 하시며 그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야고보는 신자들에게 그분을 닮아야 한다고 강론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합리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물든 내 생각으로는 의로우신 주님의 모습과 말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해한다 하더라도 의보다는 나의 주관이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충만할 때 우리의 것들은 믿음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진멸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나의 생각과 마음에 정복당하지 않고 나를 움직이는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내 마음의 왕으로, 주로 역사하셔서 내가 아닌 그분의 믿음으로 사는 은혜가 내 안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 그리스도를 닮는 거듭난 삶을 믿음으로 살아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를 그분의 찬란한 구원의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따뜻함과 눈물, 사랑과 은혜, 그리고 겸손과 섬김이 있습니다. 이 은혜를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 교회, 사회에서 행함으로써 믿음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능히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