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마라톤, 127회 보스턴 마라톤을 달리다. 1
단테는 스승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무시무시한 문구가 쓰여있는 문을 통해 지옥으로 들어간다. 지옥문 입구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쓰여 있다.
나를 거쳐 고통의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길 잃은 무리 속에 들어가노라.
정의는 내 높으신 창조주를 움직여,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
최초의 사랑이 나를 만드셨노라.
내 앞에 창조된 것들은 영원한 것들뿐,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127회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하는 7명은 모든 희망을 버렸다. 메이저 6대 마라톤에는 하프코스나 10km 이런 종목은 없다. 보스턴 마라톤 풀코스 42.195km 코스는 언덕이 많아 힘든 코스였고, 일기 예보를 보면 대회 날은 몹시 춥고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고, 즐겁게 달리라는 말은 영혼이 멀쩡할 때나 즐길 수 있는 말이고, 13시간 비행은 대회 날까지 육체를 지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예측하기 때문에 늘 망한다.
작년 7월 LA에 살고 있는 선배 집을 방문해 2주 동안 머물렀고 그 기간에 UCLA에 사는 동호회 선배 SS를 만났다. 보스턴 마라톤에 오라며 'BOS 22'가 인쇄된 펜던트를 받았다. 돌아오자마자 8월에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할 사람을 모았다. 이때만 해도 정말 가는 건가? 이러다 말겠지... 했고, 실제 대회가 열리는 날까지 너무 먼 계획을 잡아서 반신반의했다. 보스턴 마라톤 기준 기록이 없어 '초청장' 모드로 신청을 하고 8월 예약금과 12월 중도금을 차를 팔아 입금하고 마지막 2월에 집을 팔아 잔금까지 약 500만 원을 내고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다.
아주 좋은 기준 기록이 있다면 대회 참가비는 USD 250$을 내면 되고, 기록이 없다면 약 400$을 추가로 내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함께 가는 과천 마라톤팀 유자 선배는 기록이 있어 대회 참가비를 아낄 수 있었다.
마라톤이 좋은 이유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해 400개 마라톤 대회가 국내에서 열리니 어느 지역에나 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 어디서나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축구나 야구를 한다고 전 세계를 다니며 경기를 하지는 않는다.
경험이라고 했나? 사람들이 말하는 경험도 일종의 교묘한 소비와 같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올라오는 것들이 좋은 예다. 모든 있어 보이는 소비는 멋진 사진을 건지게 하고, 보는 사람은 똑같은 소비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젊고 나이 어린 사람은 심리적으로 우울한 기분을 들게 한다. 훨씬 의미 있고 조용하며 개인적인 경험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하고 화려하고 웅장하고 값비싼 경험만 쉽게 보인다. 경험을 많이 하라는 말은 불편한 행동을 많이 하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몰입하는 시간, 구글 아트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감동을 받는 것, 좋은 책을 많이 읽는 일,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은 행동을 많이 하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
127회 보스텀 마라톤 참가 일정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 후 뉴욕 관광을 하고 2일 차에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보고 오후에 보스턴으로 약 4시간을 버스로 이동한다. 보스턴에 도착해 다음 날 EXPO에 참가해 배번호 BIB번호를 받고 보스턴 시내를 둘러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다. 대회 끝나고 일명 쫑파티를 하고 다음 날 아침 귀국이다. 비행기에서 이틀을 보내면 4일 안에 모든 것을 해치워야 한다. 정말 짧아도 너무나 짧은 일정이다. 이런 짧은 시간을 길게 느끼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정적인 시간을 많이 가지면 길어진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아니면 요가 수련이나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면 제법 길게 느낀다.
보스턴을 다녀오는 왕복 비행이 모두 낮에 13시간을 난다. 미국으로 갈 때는 하루를 벌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하루를 반납한다. Boston Athletic Association에서는 일정 경비를 더 부담하는 조건으로 여행사에 참가 티켓을 배부하는데 그 초청을 이용해 참가하니 여행 스케줄이나 시간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게 또 좋은 일이다. 예정대로 12시경에 도착하면 양해를 구하고 Met라고 불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우리의 뇌는 이로운 것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익숙한 것을 선호한다. LA와 샌프란시스코에 놀러 갔을 때에 더 가장 먼저 미술관이나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했다. 어디를 가도 반드시 꼭 가야 할 곳을 선택하라면 미술관을 선택할 것이다. 보는 눈이 있거나 잘 아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냥 느낌이다.
여지없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번에 같은 여행사를 통해 대회에 참가하는 러너들은 19명이고 한국 국적을 가지고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은 45명 정도다. 인천 공항에서 미국 ESTA(전자여행 허가제) 발급 문제로 4명이 출국 수속을 밟지 못해 오전 10시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남았다. 일단 출국에 문제가 없는 15명은 뉴욕 JFK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밥을 두 번 먹고 간식을 한 번 먹고, 영화 4편을 보고 출발할 때와 착륙 전 2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건조하고 지루한 비행이 끝나고 미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번엔 2명의 입국 수속이 늦어져 짐을 찾고도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공항을 나서고 그때까지 밥을 먹지 못해서 센트럴파크가 있는 맨해튼 중심가 식당으로 이동했다. 먹고 자고 화장실 사용하는 것만 제대로 되면 세상에 가지 못할 곳은 없다.
전혀 입맛이 맞지 않은 한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시내를 전용 버스에서 바라보며 맨해튼의 타임 스퀘어로 이동했다. 세계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곳, 가장 비싼 삼성 광고판이 있는 곳이 볼 게 뭐가 있을까? 날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간판에 불이 들어오자 조금 볼만했다. 센트럴 파크 카페에 앉아서 뉴욕 시내 빌딩을 바라보며 커피나 마시는 것이 훨씬 좋았겠다.
타임 스퀘어를 구경하고 호텔로 간다. 호텔이 있는 곳은 허허벌판이다. 한 방에 두 명씩 배정을 하고 남은 선자 선배는 혼자 방을 차지했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호텔에 있는 수영장을 이용하지 못한다. 그나저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원자는 어디쯤 오고 있는 걸까? 안내를 맡은 가이드 말로는 오후 7시 비행기를 간신히 타고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침 7시에 공항에 도착해 저녁 7시 비행기를 탄다고 한다.
이미 엇갈린 시차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아서 심심하니 기자와 호텔 바에서 와인과 치킨을 먹는데 순자, 선자 선배가 내려왔다. 떠들고 놀다가 밤 12시까지 기다려서야 원자가 도착했다. 원자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늦은 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사온 족발에 소주를 마셨다. 소주 종이팩 30개를 한국에서 사 오길 잘했다. 일찍 도착한 동료들의 환영을 받으며 뉴욕에서의 첫날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