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중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공 교육의 기반을 왜곡시킨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충량한 황국시민을 키운다면서 정작 자신의 본토(일본은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이 실시)와는 많은 차별을 두었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단선형이 아닌 복선형으로 학제가 다양했다.
시골의 경우 지금의 시군단위에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면단위에도 초등학교를 만들었지만 중등교육기관은 그에 비해 너무 적었으며 그나마 기초자치단체에 농림학교를 많이 만들었다.
자신들의 자녀는 구제중학교(경성중:지금의 서울고로 변경하였고 서울고는 해방후 경성중과 역사를 단절), 용산중(용산고등) 그리고 지역 도시에 다양한 공립중학교를 만들어 차별화하고 조선인은 지역의 고등보통학교에 입학을 시킨다.
농림학교를 만든 이유는 농업관련 산업을 발달시킨다는 목적보다는 행정기관의 하급실무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광역자치단체 마다 상업학교가 만들어 지는데 이들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각 도시에 사범학교를 만들며 이곳에 입학하려면 학교 기록 (이것을 내신이라고 했으며 교장등 학교의 추천)이 중요한 요소였다.
서울이나 지방도시의 고등보통학교나 중학교를 보면 일본인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해방후에나 시군구에 공립중학교(6.25전후 분리)를 미군정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만든다.
인구에 비해 초등학교의 숫자가 적어 입학도 경쟁이 치열했고 중등학교가 너무나 부족했으며 해방전후 고등교육기관을 졸업(다니는 것이 아닌 졸업)한 이들은 190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은 예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를 시작으로 주로 법과나 문과 의과계통이었으며 이공대도 만들어 지는데 여기에 재학했던 이들의 절반 이상은 국내의 일본인들과 일본에서 건너온 학생들이었다.
경성제대에 입학은 조선인에게 너무나 어려운 과정이었고 충량한 신민이 되어야 가능했으며 해방이 되자 이 대학을 중심으로 서울의 전문학교나 중학교를 통합 미군정은 국립 서울대학교를 만들려고 한다.
문제는 일제 때 부터 학계에 몸담고 있던 이들이 앞장을 서고 복선형 학제에 존재했던 학교의 상황이 다양했고 갑자기 바뀐 사회 현실에 이념적 성향이 달랐던 각 대학의 구성원의 반대와 갈등은 심각했다.
여기에 미군정은 목사이며 학장 경력이 있는 해군대위 Harry Bidwell Ansted 총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결국 진통 끝에 학교를 통합하긴 하지만 8000여명의 학생중 4000여명이 학교를 떠나게 되고 많은 교수들도 해고 되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북으로 올라가 김일성대학교를 세우는데 참여하고 북한의 과학자나 의사 기술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경성제대의 체계를 김일성대학에 적용하기도 한다.
현재 서울대를 해방 이후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통합을 했다고 보는 이들도 많지만 반대의 시각은 다양한 대학의 통합으로 보며 새로 시작했다고 보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김일성종합대학이 경성제대를 이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그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다음으로 원래 경성제대에 있던 대학과 학부 그리고 다른 전문학교와의 통합은 계속적인 갈등을 내재하고 있었으며 불균형한 성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경우 여러제국대학과 그 밖의 대학들이 통합보다는 공존을 한 것에 반해 우리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의 경우엔 서울대라는 이름으로 이질적인 교육기관을 통합하게 되고 이들은 이후 우리나라의 정관계 및 다양한 분야를 독식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힘으로 4년제 고등교육기관을 만드고자 했지만 일제에 의해 꺾이고 그들이 세운 경성제대는 우리나라 학계를 독점하고 해방 이후엔 이름이 바뀌지만 그 영향력은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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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 정책과 교육
f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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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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