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卵生朱蒙(난생주몽)
卵:알 난, 生:날 생, 朱:붉을 주, 蒙:어릴 몽.
어의: 알에서 태어난 주몽이라는 말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
이 뜻하지 않게 큰 성과를 이루는 것을 비유하여 쓴다.
문헌 삼국유서
주몽(朱蒙. B.C.58~19)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이름이며, 성은 고(高)씨이다.
동부여왕(東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아들 갖기를 원하여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을 드리다가 곤연(鯤淵) 연못가 돌 밑에서 노란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를 주워 왔다. 해부루는 기뻐하면서 황금개구리란 뜻으로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자라 태자가 되었고, 해부루가 죽자 마침내 왕이 되었다.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미모의 유화(柳花)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본시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그런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유혹에 빠져 정을 통했다. 그러자 부모는 딸이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함부로 몸을 허락했다 하여 그곳으로 귀양 보낸 것이었다.
금와왕은 그녀를 방안에 가두어 두게 했는데 해모수가 햇빛이 되어 다시 그녀를 찾아와 정을 통한 후 닷 되들이만 한 큰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유화부인의 방에 있는 알을 보고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갖다 버리도록 했다.
그래서 그 알을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해 갔으며, 들판에 버리니 날아가던 새가 내려와 품어주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그 알을 깨뜨리려 했으나 깨지지 않아 도로 유화부인에게 주었다.
유화부인이 그 알을 잘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얼마 후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생김새가 비범하고 영특하게 생긴 그 아이는 일곱 살이 되자 활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주몽만 못했다. 그런데도 장자 대소(帶素)는 주몽을 시기하여 그는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니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부왕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금와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 기르는 임무를 맡겼다. 주몽이 말을 맡아 기르게 되었는데 그는 좋은 말에게는 사료를 적게 주고, 나쁜 말에게는 좋은 먹이를 주어 살찌게 했다. 그래서 사냥을 나갈 때면 왕이 살찐 말을 타고 주몽은 야윈 말을 탔는데 이 말이 야위기는 했으나 좋은 말이라 주몽이 잡은 짐승이 항상 많았다.
이를 시기하여 왕자와 신하들이 공모하여 주몽을 없애려 하자 유화 부인은 주몽에게 차라리 궁을 떠나 살라고 일렀다.
주몽은 평소에 사귀어오던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과 함께 궁을 떠나게 되었는데 엄수(淹水)에 이르러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물에게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오, 나를 쫓는 자가 있으니 길을 여시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모여들어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한 후 흩어지니 쫓는 자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주몽은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성을 고(高)씨로 정했다.
그때 주몽의 나이는 22세로, 신라 박혁거세21년(갑신년) B.C.38년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耐心求鴨(내심구압)
耐:견딜 내, 心:마음 심, 求:구할 구, 鴨:오리 압.
어의: 인내심이 오리를 구하다. 참을성의 중요함을 이르는 말로 조선 세종 때의 재상 윤회의 고사에서 유래하
였다.
문헌: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조선 세종 때의 명신 윤회(윤회. 1380~1436)는 어려서부터 경사에 통달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그는 노비변정도감에서 제십방()을 맡아 신속 정확하게 판결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을 찾아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했으나 주인은 냉정히 거절하고 들어가 버렸다.
윤회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 집의 뜰아래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어린아이가 나와 진주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땅바닥에 떨어뜨리자 곁에 있던 거위가 그것을 낼름 삼켜버렸다. 그것을 보지 못한 아이는 이리저리 찾다가 윤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이는 구슬을 윤회가 가져간 것으로 의심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쫓아나온 주인이 다짜고짜 윤회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진주 구슬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방금 우리 아이가 가지고 나간 진주 구슬이 없어졌으니, 네 소행이 분명하렷다.!”
그러고는 하인을 불러 윤회의 온 몸을 뒤지게 했다. 그러나 진주 구슬이 발견되지 않자 그를 결박하고, 내일 아침에 관가로 끌고 가겠다고 했다. 윤회는 아무 저항 없이 묶이면서 주인에게 부탁했다.
“좋소, 구슬을 찾고 싶다면 저 거위도 내 곁에 묶어주시오.”
주인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윤회는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하여튼 거위를 곁에 함께 있게 해달라고만 하였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해서 주인은 그렇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이 나오자 윤회는 거위가 눈 똥을 가리키면서 헤쳐 보라고 했다. 주인이 이상히 여겨 헤쳐 보니 그 속에서 진주 구슬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주인이 사과하며 말했다.
“어제는 왜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그때 이야기했으면 이렇게 묶이는 고역을 치르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윤회가 대답했다.
“만약 내가 어제 거위가 진주 구슬을 먹었다고 말했다면 주인장께서는 빨리 그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은 나머지 그 거위의 배를 갈라 진주 구슬을 꺼냈을 것이 아니오, 그렇게 애꿎은 짐승을 죽게 하느니 내가 하룻밤을 고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거요.”
그는 이처럼 사리 판단이 분명하고, 특히 사람의 마음을 통찰해 보는 안목이 높았다. 훗날 그는 관직에 올라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병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면서 인자한 마음씨로 어떤 일도 실수 없이 처리했다. 그는 주호로도 이름이 났는데 세종이 절주하라는 의미에서 하루에 술 석 잔씩만 마시라며 작은 잔을 하사하자 대장간에서 큰 사발로 늘려 석 잔씩 마셨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蘆花揷冠(노화삽관)
蘆:갈대 노, 花:꽃 화, 揷:꽂을 삽, 冠:갓 관.
어의: 모자에 갈대꽃을 꽂다. 고구려 때 미천왕을 옹립하는 거사에 찬성한다는 뜻으로 갓에 갈대꽃을 꽂았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비밀리에 찬성 여부를 확인하는 암호를 이른다.
문헌: 삼국사기 권 제17.
서기280년, 고구려의 13대 서천왕(西川王 재위 270~292) 11년, 만주 동북방에서 수렵 생활을 하던 숙신족(肅愼族)이 고구려 땅을 침범하니, 많은 백성들이 죽고 재물을 약탈당했다. 그러자 서천왕은 아우 달고(達賈)를 불러 간곡하게 명했다.
“네가 남달리 지략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우니 숙신족을 물리치도록 하라.”
달고는 즉시 싸움터로 나가 숙신족의 대장을 죽이고, 단로성(檀盧城)과 그 외 여러 성을 빼앗았다.
왕은 그의 공을 높이 사 양맥과 숙신 두 부락을 그에게 주었다. 백성들도 달고의 용맹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서천왕이 죽자 아들 봉상왕(烽上王. 재위292~300: 일명 치갈왕雉葛王)이 대를 이어 제14대 왕이 되었다.
봉성왕은 천성이 오만하고 의심이 많았다. 그러한 그가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달고를 내버려 둘 까닭이 없었다. 자기의 지위를 빼앗길까봐 지레 겁을 먹은 그는 군사를 풀어 숙부인 달고를 처치해버렸다. 또 자신의 아우 돌고(咄固)에게도 역모를 도모했다는 누명을 씌워 사약을 내렸다. 그러자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다고 생각하고 미리 도망을 쳤다.
봉상왕은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대궐을 크게 짓는 등 국력을 낭비함으로써 나라를 어렵게 몰아갔다.
대궐 공사가 끝나던 해에는 봉화산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린다는 등 민심이 흉흉해지고,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지진이 거듭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가뭄까지 겹쳤다. 자연히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굶주려 누렇게 붓는 부황으로 쓰러져갔다. 그런데도 봉상왕은 또다시 대궐을 수리하라고 명령했다. 백성이야 어떻게 되든 대궐이 웅장해야 왕의 위엄이 선다는 생각이었다.
한편, 을불은 궁궐에서 도망친 후 정처 없이 떠돌다가 수실촌이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살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한 부잣집의 머슴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비류강에서 뱃사공이 되었다.
어느덧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조정에서는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를 비롯하여 조불(祖弗), 소우(蕭友) 등의 신하들이 나라를 바로잡기로 뜻을 모았다.
“이제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쳤소. 그러니 임금을 폐하고 돌고의 아드님 을불을 모셔다 새 임금으로 모십시다.”
그래서 조불과 소우는 변장을 하고 을불을 찾아 나섰다. 그들이 우연히 비류강에 이르러 강을 건너고자 배를 탔는데 뱃사공이 을불, 바로 그 사람인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을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함께 도성으로 돌아와 은밀하게 기회를 노렸다.
그즈음 봉상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후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창조리와 조불, 소우 세 사람은 그때를 틈타 거사를 행하기로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와 뜻을 같이 할 사람은 나처럼 하라.”
그러고 나서 그가 갈대를 꺾어 관에 꽂으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따라서 했다. 창조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같은 것을 확인하고 드디어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을불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제15대 미천왕(美川王. 재위300~331)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淚琴之孝(누금지효)
淚:눈물 누(루), 琴:거문고 금, 之:어조사 지, 孝:효도 효.
어의: 눈물 젖은 거문고의 효도라는 말로, 조선 성종 때 남산골의 한 선비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정성이 지극한
효도를 빗대어 쓴다.
문헌: <성종실록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9대 성종(成宗. 1457~1494)은 세조(世祖)의 손자로서 제위 13개월 만에 타계한 예종(睿宗)에 이어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 등극 후 처음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세조비 정희대비(貞熹大妃)의 7년 섭정을 받았지만 성인이 되어 국정을 맡고 나서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세조 때 이룩한 문화를 되살려 꽃을 피웠고, 외교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했다. 그리고 농사를 적극 권장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돌봤으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일이 없도록 애썼다. 또 백성들의 삶을 살피기 위해 수시로 야행을 했다.
어느 늦은 가을밤, 성종이 야행을 하고 있는데 남산 밑 어느 오막살이 안에서 한밤중에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때 아닌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성종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거 참 괴이한 일이다. 기쁜 일과 슬픈 일이 한꺼번에 겹친 모양이로구나!’
성종은 호기심이 동해서 오막살이 가까이로 가서 들창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서는 고갈을 쓴 여승 차림의 한 여인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옆에는 한 사내가 낡은 거문고를 타고 있는 가운데, 술상 앞에 앉은 노인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성종은 방안의 분위기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밖에 사람이 왔다는 신호로 ‘에헴’하고 기침을 하니 거문고 소리가 뚝 그치고 노래 부르던 사내가 나왔다.
“누구십니까?”
성종은 자신이 조금 전에 방 안의 광경을 엿보았다는 사실을 털어 놓은 다음, 그 곡절을 물었다.
사내와 여인이 머뭇거리자 술상 앞에서 울던 노인이 말했다.
“다 보셨다니 무엇을 숨기겠소. 이 애는 내 아들이고, 이 애는 며느리랍니다. 오늘이 이 늙은 것의 회갑인데 살림이 워낙 어렵다보니 뭐 차릴 게 있어야지요, 생각다 못해 며느리가 제 머리를 잘라 팔아서 이렇게 초촐하게나마 술상을 마련하고, 흥을 돋우기 위해 흉한 머리를 고깔로 감추고 춤을 추니, 아들이 거기에 맞추어 거문고를 연주했던 것입니다. 하여, 내가 저들의 지극한 효성을 보고 목이매어 울었던 것입니다.”
성종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효도 사례를 들었지만 이보다 더 귀한 효도는 없었소, 내 장담컨대 반드시 큰 복이 내릴 것이오.”
이튿날 아침, 어제의 그 오막살이집에 관복을 차려 입은 관리가 찾아와 허리를 정중하게 숙이며 말했다.
“어명이오. 어서 입궐할 채비를 하시오.”
노인은 영문을 몰라 손을 내저었다.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대궐에 입궐할 사람이 못 됩니다.”
“허허! 어젯 밤 만난 분이 상감마마이셨소.”
“뭐, 뭐라고요?”
노인 일가족은 허겁지겁 임금이 있는 궁궐을 향하여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노인과 아들 부부는 궁궐에 당도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고, 상금과 쌀을 하사받았다.
성종은 스스로가 학문을 즐기고 사예서화에도 능하였으며, 농사를 적극 장려하는 한편, 인재를 등용,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를 크게 융성케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能者昇當(능자승당)
能:능할 능, 者:사람 자, 昇오를 승, 當:마땅할 당.
어의; 능력 있는 자가 승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로, 조선 성종 시대의 문장가 구종직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조선 7대 세조(世祖. 1417~1468)의 큰 아들 덕종(德宗. 추존명 1438~1457)이 세자로 책봉된 후 갑자기 요절하여 둘째 아들 광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예종(睿宗. 1450~1469)이다. 그런데 예종 또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승하하니, 사람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로 그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예종의 뒤를 이어 제9대 성종(成宗. 1457~ 1494)이 즉위하자, 세조의 왕비 윤시를 비롯하여 성종의 생모와 양모가 모두 살아 있어 궁중에는 과부 왕비가 셋이나 있게 되었다.
성종은 할머니와 두 어머니를 위하여 잔치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궁중에서는 노랫소리와 장구 소리가 떠날 날이 없었다.
성종이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자 궁녀들은 왕의 사랑을 먼저 차지하려고 은근히 교태를 부렸다. 성종은 술도 잘하고, 풍류 기질이 있었다. 또 유능한 선비를 아끼어 크게 쓸 줄도 알고, 해학도 즐겼다.
학문을 장려하기 위하여 세종 때 설립되었으나 세조 때 폐지되었던 집현전을 홍문관(弘文館)으로 개칭하여 임금의 자문기관으로 부활시켰다.
또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등을 편찬케 하였고, 나라의 기강이 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도 완성시켰다. 그는 실력이 있는 사람을 극진히 우대하였다.
한번은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데 축관으로 지명된 장령이 축문을 읽다가 모르는 글자가 나오자 당황하여 그냥 서 있었다. 성종은 어이가 없어 환궁하는 즉시 그를 무관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언관들이 들고 일어나 문관을 무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불가함을 말하자,
“축문도 제대로 못 읽는 사람이 무슨 문관이오?”
하고 일언지하에 묵살해 버렸다.
훗날 좌찬성을 지낸 문장가구종직(丘從直. 1404~1477)이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벼슬에 올라 경복궁 안에서 숙직을 하게 되었다. 시골 사람이 처음 궁 안으로 들어온지라 마침 시간도 한가해서 경회루 구경을 나갔다가 왕의 행차를 만나게 되었다. 어명 없이는 들어오지 못하는 곳에서 왕의 행차와 마주치자 구종직은 그 자리에 엎디어 대죄하였다. 성종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누군데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네, 시골에서 올라와 교서관의 말직에 있는 구종직이옵니다. 경회루 경치가 좋다 하기에 구경하러 들어왔습니다.
“노래를 할 줄 아느냐?”
“격양가(擊壤歌)를 조금 부를 줄 아옵니다만…….”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불러보아라.”
구종직은 농부들이 부르는 격양가를 열심히 불렀다. 그러자 성종은 흡족해 하며 다시 물었다.
“경서를 읽을 줄 아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무슨 경서를 잘 알고 있는고?”
“<춘추>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어디 한번 외워보도록 하라.”
구종직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춘추좌전>을 막힘없이 줄줄 외워 내려갔다.
성종은 마음이 흡족한 나머지 어주(御酒)까지 하사하며 칭찬하고, 다음날로 구종직의 벼슬을 일약 부교리(副校理)로 승격시키니, 삼사(三司. 사간헌. 사헌부. 홍문관을 합한 속칭)에서는 반대하는 여론이 빗 발치듯 하였다. 그러자 성종이 언관들에게 말했다.
“경들이 급제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승진시켰다고 반대하는데 그럼 어디 <춘추좌전>을 외울 수 있는 자 있거든 나와 보시오.”
그러나 한 사람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성종은 구종직에게 외워보라고 하였다. 구종직은 전날과 같이 자신 있게 줄줄 외웠다. 성종이 말했다.
“경들도 과거에 급제했고 경력 또한 많은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경전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서 신진의 벼슬을 승격시켰다고 반대만 하오? 무릇 관리는 실력이 가장 우선하는 것이오. 경들도 공부를 좀 하도록 하시오.”
성종의 파격적인 인사에 반대하던 신하들은 오히려 무안만 당하여 묵묵부답이었다.
성종은 수렴청정으로 다져진 왕권이 흔들리지 않게 권력의 균형을 이루었고 권신들의 세력을 견제하였으며, 사림(士林)세력을 끌어들여 유교사상(儒敎思想)을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했다.
권농치민(勸農治民)에 힘쓰면서 현명한 왕으로 세조 때 이룩한 초기의 문화가 개화되었다. 독서당(讀書堂)을 설치하고 향학(鄕學)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종교적인 면에서는 배불(排佛)정책을 강화하여 화장(火葬) 풍습을 없애고,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가 비구니 되는 것도 금지시켰다. 6촌 이내의 결혼을 금하고 정치적으로는 도학정치(道學政治)의 기틀을 세워나갔다.
성종 당시 태평성대가 이뤄지자 성종 스스로도 퇴폐풍조에 빠져 궁중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다가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하여 폐비되는 비화가 있게 되었다.
이는 연산군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성종은 1494년 38세로 생을 마감했으며 능은 선릉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泥中眞珠(니중진주)
泥:진흙 니, 中:가운데 중, 眞:참 진, 珠:구슬 주.
어의: 진흙 속의 진주라는 말로, 훌륭한 인물은 진흙 속의 진주처럼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유진동(柳辰仝.1497~1561)은 중종(中宗) 때 공조판서를 지낸 사람으로 서화를 잘했는데 특히 죽화(竹畵)와 큰 글씨인 대서(大書)를 잘 썼다. 태조 4년에 기공된 숭례문(崇禮門)은 세종 29년에 정분(鄭苯)에게 명하여 신조(新造)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현판 글씨는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양영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설에는 유진동이 조선 명종 때 썼다고도 한다.
유진동은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제대로 공부도 못 한 채 건달들과 어울리면서 남의 가축을 훔치고, 한길에서 힘자랑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중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이자견(李自堅.1454~1529)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자견은 나이가 스물 전이었는데 유진동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알고 자기 누님에게 그와 혼인할 것을 권하였다. 평소 동생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던 그의 누님은 별말 없이 길일을 택하여 건달 유진동과 혼인을 하였다.
혼인 후에도 진동은 시정의 무뢰배와 어울리며 심지어 처갓집 종들에게까지 행패를 부렸다. 장모는 매우 걱정했으나 자견은 별로 걱정하지 않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얼마 후에 그를 필요로 하는 때가 왔다.
진동이 말을 타고 사냥을 갔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화가 난 그는 그날로 위험한 무술과 담을 쌓고 군자가 업으로 할 것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독서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고, 자견과 그 아우도 재상이 되어 형제가 안찰사로 임명되는 등 명성을 얻었다.
1550년 진동은 명종(明宗)의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나라의 대업을 위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또 조정에서 주역(周易)을 권장하자 경연관으로 기용되었으며 도총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내다가 과로로 중풍(中風)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진동은 늙어서도 항상 자기를 바른 사람으로 이끌어 준 처남 자견을 부모나 다름없이 공경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자료-http://cafe.daum.net/pal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