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3년 상(喪)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경자년(庚子年)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는 해이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식은 탈상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 즉, 시묘살이를 하여 생전의 불효를 뉘우치며 명복을 빌었다. 나는 그런 효자는 못되고 3년 동안 그날 하루는 우천도 불문하고 외국 여행도 삼가며 간단한 주과포(酒果脯)로 삭망성묘(朔望省墓:초하루와 보름에 산소를 찾아뵘)를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다. 나에게 부모님 산소는 종교적 장소다. 사람들은 주일에 한 번씩 교회나 절을 찾아서 속죄하고 경건한 심신을 가다듬듯 나 또한 목적은 같고 절차나 방법이 다를 뿐이다.
나의 어머니는 5년간 악성 골다공증으로 병원에 계셨다. 말년에는 기력이 쇠진하여 의식은 있어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셨다. 우리 어머니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대학 친구는 “자네는 그래도 어머님이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위안과 희망이 있지 않은가?” 하면서 비록 병석에 누워계시지만, 살아계신 어머니 자체를 부러워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다.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운명 직후 잠깐은 귀는 그대로 열려있다고 믿는다. 운명 직전에 어머니는 자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마지막 입술과 목울대의 작은 움직임이 바르르 떠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때 자손들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잡고 마지막 삶을 마감하고 떠나가시는 어머니의 귀에다 대고 불효했던 사연을 사죄하고 모두 다 잊으시고 가시라며 보내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의 두 눈가에는 알아들으셨다는 뜻인지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인간의 모든 희망은 살아있을 때뿐이다. 이제는 부모에게 불효했던 후회는 땅을 치고 통곡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간의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검은 장막은 서서히 내려지고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린다.
어머니는 생전에 불교의 익산지역 신도회장을 역임하셨다. 그래서 제례 의식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셔서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낼 때는 예법이나 예절에는 전통불교제례를 고수하고 있다. 어머니는 조상님들 제삿날 제수는 어머니가 시장에 가셔서 일일이 손수 고르시고 장만하셨다. 나와 동생들은 집 안팎을 쓸고 닦는 일과 어머니 뒷일을 돌봐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나와 동생들이 하고 있다.
제삿날 우리 집은 아침부터 철질하는 냄새와 불땀 좋은 마른 솔가리 타는 연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나와 동생은 제사 후에 오랜만에 먹어볼 색다른 제사음식에 신이 났다. 어머니가 조리하시는 옆에서 도와드리면서 음식 부스러기가 나와도, 조상님들이 제사 시간에 잡수시기 전까지는 자손이 먼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다른 그릇에 모두 담으시고 뚜껑을 덮어 놓으셨다. 나와 동생은 참았던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쪼르륵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늘이 3년 상(喪)이 되는 날이다. 참으로 인생은 허무하고 덧없다.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어서 오라 하시면서 물 묻은 손을 행주치마에 닦으시며 내 손을 덥석 잡으신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셔 제사음식 만드는 모습이 아른거려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우리 형제는 7남매이다. 부모님 제사 때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제일 멀리 살고 항상 직장생활에 바쁜 막내 매제에게 고맙다. 제수 준비는 동생은 삼색실과를 중심으로 모든 과일을 전담하고, 나는 나머지를 준비한다. 제사상 병풍은 내가 사자소학 효행 편에서 글귀를 따서 불효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먹을 갈고, 한 자 한 자씩 써서 만들었다. 제사 때는 펼쳐 세운 병풍 문구를 항상 속으로 읊조리며 순간이나마 반성하고 있다. 어머니 삼년상 제례가 끝났다. 나는 축문과 지방을 떼어서 대문 밖에서 마지막 소지(燒紙)로 부모님을 배웅해드렸다.
현재 부모님 제사를 모시는 집은 우리 형제들이 낳고 자란 그 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통제례에는 장남이 사는 곳에서 부모님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 관례이다. 어머니 3년 상 제례를 모시고 음복하는 자리에서 내년부터는 내가 사는 전주에서 부모님 제사를 모신다고 선언하고 부모님께도 그렇게 아뢰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전 고향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전주에서 모시는 것을 서운하시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아실 테니까 너그러이 받아 주시리라 믿는다.
언제인가 부모님 상(喪) 후에 일본에 갔다 온 적이 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치솟더니 하얀 구름 위를 떠서 날아가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고 들었다. 비행기 창문 밖을 아무리 살펴봐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은 보이지 않고 하얀 구름바다 위에 비행기만 미끄러져 날아가고 있었다. 오늘 어머니 제삿날에 그 구름이 또 몰려와 석양에 붉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마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은 구름 나라인 것 같다. 입추와 백로가 지나서인지 밤에는 서늘하다. 아래 동생은 농사지은 수확물을 올망졸망 나누어 묶어놓고 형제들에게 나누어 준다. 아내와 제수씨는 제수 음식을 분배하여 이 집 저 집 차에 실어 놓는다. 내일이 출근하는 월요일이라 먼데 사는 동생들부터 빠져나가기에 바쁘다.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집안이 금세 절간처럼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다. 아마도 부모님 생전에 명절 때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의 부모님 심정을 내가 맞고 있다. 제일 마지막 부모님 집 마당을 빠져나와 전주 집으로 향하는데 앞의 가로등이 뒤로 계속 밀려가는 모습에 옛날과 현재가 바뀌듯 만감이 교차했다.(2020.9.13.-음력 7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