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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금요일. - 합동 작전, 합동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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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연중 제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합동 작전, 합동 믿음
연중 1주 금요일-2021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다른 사람 넷이 들것에 실어 지붕까지 뚫어가며
주님께 데려가 치유받게 하는 얘기입니다만 이 과정에서 주님께 용서의
권한이 있는지 권한 논쟁으로 번지는 얘기입니다.
구약 때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 죄의 결과,
그러니까 인간의 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결과라고 믿고,
그래서 죄의 치유는 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라고 믿는데 주님께서
용서받았다고 하며 치유하시니 그들에게는 독성죄로 보였던 겁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 히브리서나 복음 모두
믿음이건 용서건 용서에 의한 치유건 공동체적인 거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오늘 치유는 합동 작전으로 이루어지는데 합동 믿음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도 치유받고는 싶었지만, 그 믿음이 반신반의 상태였는데
이웃들의 믿음이 그를 설득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설득에
중풍 병자는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중풍 병자의 부족한 믿음이 이웃의 확고한 믿음에 결합됨으로써
치유가 이루어진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에는 그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이 복음 말씀을 들었지만, 불신자들은 복음을 귀여겨들은 신자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않아 결국 복음 말씀이 구원과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 공동체 또는 믿음의 공동체란 어떤 것입니까?
개인의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이 공동체의 믿음과 결합되어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 구원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라면 치유도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나의 치유를 너의 들것에 맡기고
너의 치유를 위해 내가 들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용서가 오로지 하느님의 권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지만
꼭 예수 그리스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도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이 지상 교회에 용서의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사람들에게 베푸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용서가 하늘에 이르러야 하고,
우리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와 결합됨으로써
완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기도 가르침에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시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는 정반대이지요.
권한 문제를 떠나서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같아야 하고,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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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치유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제거하고 없앨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을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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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천국을 가야 하는데 성직자는 입만 천당에 가고 수도자는 귀, 일반신자는 발바닥만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자기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을 빗대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삶은 전인적인 성화의 삶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잘못된 선입견을 지붕을 벗겨 내듯이 벗겨 내고 영적 여정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환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11).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 가듯이 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 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 것에 누워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환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며 의아해 하였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하는 이들에겐 안다고 여긴 지식이 장애물이고 병입니다. 영혼의 중풍병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제게 눈이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어 보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코가 있어 숨쉬는 것이 아니라
산소가 있어 숨쉬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귀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니라
공기가 있어 들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입이 있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가르쳐 주셨음을 깨닫게 하소서.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이 중심이듯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새롭게 하소서. 아멘” -유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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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를 상징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교황님을 중심으로 하는 교계제도가 있습니다. 바티칸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구심점입니다. 교계제도는 이단과 분열을 막아주는 방패가 됩니다. 교계제도는 신학과 교리의 오류를 식별합니다. 교계제도는 사적계시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 판단합니다. 저 역시 교계제도의 ‘틀’에 의해서 사제가 되었고, 교계제도의 ‘인사이동’에 의해서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계제도는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거나, 새로운 시대의 표징을 읽는 유연성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교계제도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교회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지역교회의 다양한 의견을 담은 시노드의 문서가 교황청에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대륙별로 시노드의 의견이 정리되면 시노드의 최종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시노드의 의견을 청취하고, 식별하여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도 3년은 넘게 걸립니다. 2000년 동안 교계제도가 이어지는 것은 교계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시노드를 통해서,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법과 제도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수정되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상을 향해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었던 공의회였습니다. 라틴어로 사용되던 전례를 자국어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평신도가 교회의 활동에 더욱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사를 통해서 시작되고, 성사를 통해서 성장하고, 성사를 통해서 완결됩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물질과 형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이고, 죄를 용서받는 선물입니다. 견진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복음의 사도로 이끌었듯이 세례 받은 신앙인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사를 줍니다. 고백성사는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잔치를 베풀어준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회개하는 이들이 공동체와 하느님 앞에 화해할 수 있는 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수고하는 이들은 모두 내게로 오라고 하셨듯이 아픈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성사입니다. 혼인성사는 나자렛 성가정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듯이 부부가 가정을 이루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신품성사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에 봉사할 사람을 선발하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시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들 또한 우리의 몸과 피를 기꺼이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탄이 교계제도와 성사의 ‘울타리’를 부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시기, 질투, 욕심, 분노와 같은 것들입니다. 시기, 질투, 욕심, 분노는 늘 상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상대와 화해하거나, 상대가 용서를 청하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마지막 수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절망과 낙담’이라고 합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절망하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우리가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교계제도와 성사의 ‘울타리’에서 우리가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잘못한 것을 뉘우친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우리는 모두 희망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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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어머니께서 제 위의 누님에게 식사 후에 무엇인가를 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나는 어머니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그것을 먹어야 했지요. 그런데 당시에 너무 배가 고파서 누나만 무엇인가를 주는 어머니가 미웠고, 누나가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모두 자는 밤에 몰래 나와 그것을 훔쳐 먹었습니다. 달콤한 사탕이 아니었고, 생각보다 너무 썼습니다. 하지만 물을 마시며 억지로 몇 알을 삼켰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부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저를 발견한 어머니는 옆집 친구분을 불러 저를 업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더 큰 병원에 가라는 말을 듣고 또 저를 둘러업고 더 큰 병원 응급실에 가서 저는 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때 제가 죽는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뒤집혀 있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친구분이 오셔서 정신없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저를 업고 병원으로 간 것입니다. 병원에 가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시 깨어나는데 저의 역할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프니 병원에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고, 아프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장 믿었던 옆집 친구를 불렀고, 그 친구분은 병원을 믿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이 떠올려진 이유는 오늘 복음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였지요. 그의 곁에는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래서 지붕을 뚫고 내려보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의 믿음으로 병원에 간 것이 아닌 것처럼,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어머니와 친구분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처럼, 중풍 병자가 고쳐 달라고 달려오지 않았아도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렇지 않을까요? 내가 열심히 해야 구원받을 것 같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곁에 있는 많은 사람을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을 내쳐야 할까요?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큰 힘이 되는 그 누군가를 위하여 함께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쫓아야 합니다.
맹자(孟子)는 인간이 본래부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성선설을 내세우며 이것을 4단(선을 싹틔우는 4가지 단서, 실마리)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나누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이 사단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런 마음을 버려두고 세상의 허영을 쫓고 있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것을 버려두고 사라질 것을 쫓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랑’으로 영원한 것을 쫓으라고 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쫓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참된 지혜를 쫓으려 하지 않을까요? 먼 훗날 아쉬움 속에서 후회할 우리의 모습을 지금 당장 지워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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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당신은 파도를 멈출 수 없다. 그러나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울 수 있다(존 카밧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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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교회 공동체에 뿌리 내린
-“개인 신앙”-
어제 요셉 수도 공동체 형제들은 참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마르코 수사님의 예언이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은 순수하다.” 말한마디 천량 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한달 가량 피정을 마치고 떠나면서 감사카드와 더불어 주신 왜관 수도원의 박알렉시오 신부님의 덕담입니다. 이에 마르코 수사님은 웃으며 “프란치스코 수사님이 강론에 인용할 것 같다” 예언 하였고, 저는 곧장 오늘 강론 서두에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순수하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듣고보니 우리 요셉 수도 공동체 형제들의 빛나는 특징은 ‘순수’입니다. 순수한 마음,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은 그대로 ‘주님의 빛’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역시 순수한 이들에게 축복을 전해 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알렉시오 신부님의 “순수하다!”란 말마디와 카드 내용을 듣고 후에 게시판에서 읽으면서 새삼 “신부님 역시 순수한 분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마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예전 읽은 대목도 생각났습니다.
“기적이나 신비체험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한 믿음을 지향하는 것은 종파를 초월한 모든 영성가들의 공통점이다. 비밀스런 능력에 관심을 갖는 인간은 신의 임재속에 살 수 없게 된다. 그러한 현상들이 네 안에 생겨나더라도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마라. 비밀스런 능력을 획득하기는 쉽지만, 마음의 순수에 이르는 길은 몹시 힘들다. 순수함을 소유한 자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
인도 힌두교의 신비가 라마크리슈나의 말이지만 참으로 공감이 가는 진리말씀입니다. 이렇게 수도원에 머물다 떠나는 수도형제가 이런 순수한 친필의 카드를 전하기도 처음입니다. 카드에 그림과 더불어 성탄 미사시 입당송인 이사야 9장5절 말씀도 은혜로웠습니다.
“Puer natus est nobis”(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나셨다)
이어지는 신부님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친필 내용 전문을 인용하여 나눕니다.
“+주님의 평화
요셉 수도원의 여러 형제 수사님들께!
한달 가량 요양하러 온 알렉시오가 진심으로 감사와 새해(설날) 인사를 이렇게 글로나마 올립니다. 지내는 동안 요셉성인상(특히 정문옆 성가정상과 주차장 앞 아기 예수님을 안은 요셉상)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출입구 신장 맞은편 창문턱에 편안하게 잠든 작은 요셉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 수사님들이 이런 요셉 상에 잘 어울리고 물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암산보다 옛 이름인 천보사天寶山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늘이 보호하는, 하늘의 보화인 이 산속에서 부디 묻혀 있는 보물을 찾으시기를 빌며 감사드립니다. Alex”
얼마나 멋진 순수한 편지글인지요! 하늘의 보물같은 정주의 천보산天寶山처럼 순수한 믿음의 정주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자들의 소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천장암天藏庵이란, ‘하늘 보물을 감추고 있는 암자’란 이름의 서산 개심사에 있는 불가의 유명한 선사 경허 스님이 머물더 암자이름도 생각났습니다. 한때는 제 집무실 명칭도 천장암天藏庵이라 불렀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은 얼마나 순수한지요! 말그대로 순수한 마음, 순수한 믿음,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같은 동료들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바로 “교회 공동체 안에 뿌리 내린 개인 신앙”입니다. 무한한 믿음의 살아 있는 보물창고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공동체의 믿음은 무궁무진한 힘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날로 깊이 뿌리내릴 때 튼튼히 성장, 성숙하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공동체에서 뿌리 뽑힌 개인신앙은 쉽게 변질되며 얼마 못가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성전에서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그렇게 고맙고 소중한 것입니다.
기도도. 믿음도, 삶도 반드시 하느님 중심에 더불어와 홀로, 공동체와 개인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함은 영적 삶의 필수적 리듬이기도 합니다. 제 좋아하는 미사경문중 한 대목도 이와 일치합니다. 영성체 예식중 주님의 기도후 평화예식중 경문의 일부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이렇게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기도를 통해 교회의 믿음에 깊이 뿌리 내릴 때 날로 성장, 성숙하는 오로지 주님 향한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믿음에서 그 무엇보다 결정적 도움을 받는 것은 성모님의 전구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가장 많이 청하는 것도 형제들의 기도와 성모님의 전구입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2월1일 까지 매일 잠자리에 들기전 바치는 성모찬송가는 곡도 가사 내용도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은혜로운지 요즘 새삼 깨닫습니다. 라틴어 가사를 해석한 우리말이 좋아 전문을 인용합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시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가브리엘의 인사 받으신 그 후도 전과 같이 동정이신 이여,
죄인을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의 친모는 돌아가셨어도 우리의 영원한 마리아 성모님은 천군만마처럼 늘 우리를 위해 전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전구는 “영(0)” 순위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복음의 중풍병자보다 행복합니다. 수도형제들의 믿음과 더불어 성모님의 전구가 늘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의 간절한 믿음, 순수한 믿음입니다. 참으로 소망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할 때 믿음은 순수할 수 뿐이 없습니다. 궁즉통(窮卽通), 궁하면 통한다 했습니다. 동료들의 순수한 믿음의 눈은 활짝 열려 절망적 상황안에서 예수님께 도달할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내리는 참으로 기발한 착상입니다.
어제는 푸근하기가 겨울속의 봄처럼 느껴졌습니다. 얼마전은 겨울눈이었는데 오늘 밤에 내리는 겨울비는 흡사 봄비처럼 느껴져 참 푸근하고 상쾌했습니다. 겨울속의 봄이, 흡사 절망속의 희망, 죽음속의 생명, 어둠속의 빛처럼, 파스카의 신비를 연상케 했습니다. 결코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 상황에서 순수한 믿음, 순수한 희망, 순수한 사랑을 지닌 중풍병자의 동료들은 예수님의 치유 구원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은 즉각적으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영혼을 치유하시고 이어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함으로 육신을 치유해 주심으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예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의 순수한 믿음으로 용서 받는 중풍병자처럼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중 교회 공동체의 믿음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흡사 미사가 끝나고 치유 구원된 우리를 향한 파견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말씀은 오늘 복음과 연결되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바로 파스카 예수님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임을 깨닫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기쁜소식을 들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이미 히브리서 저자의 권고대로 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 미사를 통해 순수한 믿음으로 영원한 안식처를 앞당겨 체험함으로 복음의 중풍병자처럼 영육의 전인적 치유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이와 연관된 제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성가 177장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 성체성가 2절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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