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류에게 외 1편
이리영
기다릴게, 말하면
앵무새가 되고
기다려, 말하면
물어뜯는
류에게서 류가 오면 더는 류가 아닌 것 같아
이런 고백도 괜찮다며 류는 기다릴까?
웃으며 말하는 게 어려워
울며 말하는 것보다
흠뻑 젖어야 빛나니까
길에 떨어진 동전처럼
오직 반짝이는 일에 온통 마음이 뺏겨
이곳에 와서야 도착하고 싶어졌어
눈을 감고 맞추기 게임을 하고 싶고
류에게 보랏빛 입술을 주고 싶고
매일매일이 생길 테니까
매일매일이 죽을 테니까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연달아 발생하는 기포들
류에게서 류가 생기고 류가 망치고 류가 배신하고 류가 달아나
이런 고백도 괜찮다며 류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 웃으면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아닌
바닥이 드러나고 내 옆에는 끌어당겨 덮을 담요가 생기고 같이 끌려오는 버터 향 가득한 어둠과 어둠의 긴 꼬리가 있어 꼬리에서 꼬리가 돋아나는 무생물의 긴 밤이 아주 천천히 우리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려서
류의 노래에는 류가 없고
류의 책에는 류가 한가득
목에 두른 흰 레이스의 구멍들처럼
류는 자유자재로 류를 빠져나가서는
돌아갈 곳 없어 류가 되고 마는 그런 돌림 노래로
기다리는,
길어지는 류
먼 훗날 만났던
검은 원피스
이리영
세탁소는 어디 가고
꽃집이 있다
지난 계절 잊었던 원피스를 찾으러 왔는데
유리문은 밀어도 열리지 않고
이미 닫힌 계절이라는 듯
꽃이라도 한 아름 가지고 싶어져
프리지아, 리시안셔스, 카라, 모란, 델피늄, 라넌큘러스……
옷장에서 색색의 옷들을 끄집어낸 적이 있고
그것들을 창밖으로 내던진 적이 있고
유리문을 있는 힘껏 두드리는데
안에서 꽃집 주인이 날 향해 미소 짓고 있다
내 검은 원피스를 입고서
계절은 돌아올 테고,
그때마다 검은 원피스를 벗어둔 채로
아스팔트 바닥에 널브러진 색색의 옷 무더기를
한참이나 내려다본다
곧 죽을 사람처럼
병든 벚나무 가지에
비닐이 씌워진 백색 원피스가 걸려 있다
이리영 2018년 시인동네 등단
첫댓글 이리영 시인의 시는 언제 봐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