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사랑은
감사와 감동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삶을 엮어내는 생활의 원천일 것입니다.
하늘의 빛이 땅에 비추듯
은혜와 사랑은 빛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푸는 힘의 원동력을 가진 은혜와 사랑은
베풀어진 곳에 감사의 꽃으로 피어납니다.
생명의 씨앗이 떨어지는 곳이 척박한 바위라고 할찌라도
그 바위를 쪼개는 소나무를 자라나게 하는 것처럼.......
은혜와 사랑은 생명의 씨앗을 품어서
그 베풀어지는 곳마다 감사의 꽃을 야생의 꽃으로 자라나게 합니다.
은혜와 사랑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속의 원리로
낮은 자가 높아지며 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되며 비천한 자가 고귀한 자가 되며 죄인을 의인되게 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인자와 긍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하고 겸손하여 새누리의 빛으로 온 세상을 영생의 구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열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민생의 복지와 경제 민주화는 먹고 마시는 세상 나라요,이합집산의 사회적 통합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울 수 없고 완전한 평화를 이룩할 수 없으며 참된 기쁨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가 추구하는 비전으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 이상에 범접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참된 은혜와 사랑의 나라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메시야의 덕이요, 그 은혜의 덕을 믿음의 탄성으로 사랑의 감동을 입은 성도는
찬송과 존귀와 영광의 감사를 영원히 화답하는 그 나라 백성입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메시야의 은혜와 사랑의 덕을 입은 성도로
은혜와 사랑을 믿음의 감사로 화답하며 충성을 다하는 존귀한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충성된 성도를 지혜의 말씀으로 교훈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주권적 차별을 평등한 충성의 측도로 온전히 분별하여
받은 은혜와 사랑의 책임을 다하는 착하고 충성된 성도의 삶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칭찬하였습니다.
지옥에서 물 한 방울을 목말라 하였던 부자는
부자의 책임을 은혜와 사랑으로 베풀지 않은 형벌을 영원히 당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시대 성전에 드려졌던 의로운 제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지 않았던 스룹바벨 성전을 영원히 버렸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 백성의 목자로 세워졌던 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을 멸시하여 영원한 심판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적 특권을 누렸던 사두개인, 즉 제사장의 무리들은
성전의 십일조로 부를 축적하여 메시야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목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로마 10대 황제의 기독교 박해는
권력을 가진 힘있는 자가 은혜와 사랑을 베풀지 않는 패악을 저질렀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왕이 되어 부친의 채찍보다 더 무서운 전갈로 백성을 징치하여
결국 열 지파를 신하인 여로보암에게 빼앗겨 분열왕국의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할 때 남쪽 유다의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잘 섬겼던 선한 왕의 업적을 남겼지만
극한 부와 영광을 은혜로 보답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여 또한 진노를 받았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나 "쉰들러 리스트"는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충실히 하는 최소한의 양심일 것입니다.
신명기에 왕의 덕목으로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서를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명하는 왕의 덕목을 실천하지 못한 왕과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진 자들은
비극의 역사를 후세에 남겼습니다.
세상 나라의 수 많은 왕들은 왕의 권력은 가졌으나
왕의 자리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뜻으로 지켜낸 인물이 거의 없습니다.
왕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던 부자 청년은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능력을 가진 자는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사랑의 감동을 향기로운 삶으로 하나님과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요셉은 애굽이 국무총리의 직책으로 국가 정책을 실행하는 가운데
풍요를 절제하고 위기를 대처하는 탁월한 리더쉽을 가진 이상적인 민생 정치를 구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의 백성은
은혜와 사랑의 탄성으로 온 세상을 주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큰 은혜와 사랑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입은 사람들은
은혜를 은혜되게 하고 사랑의 감동을 낳은 향기로운 삶을 감사하는 생활로 보답하여야합니다.
은혜를 멸시하고 사랑을 반역하는 삶의 패러다임은
교만하고 거만하여 패망의 선봉이 될 것이라고 성경의 잠언은 교훈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을 자청하며 복음의 전사가 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주 예수의 복음을 온전히 전파하였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의 권한을 다 쓰지 아니하고
막삭되지 못한 사도요,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요, 포행자요, 악행자로 죄인의 괴수라며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하여 때로는 높고, 때로는 낮은 자리에서
온 몸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온전히 죄인들을 섬겼으며
은혜입은 성도들의 연보로 가난자를 구제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사도의 특권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지 아니하고.....
고난과 핍박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향기를 전하였습니다.
큰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로 감사의 넘치는 그의 삶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영광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삶의 동행을.....
은혜와 사랑을 감사의 삶으로 보답하는 온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중세시대 교회는 농노들의 십일조를 착취하여 초대형 성당을 지었으나
타락과 세속의 어두운 역사를 종교적 자취로 남겼습니다.
오늘날도 초대형 맘모스 교회당을 건축하여 종교적 복당을 지어놓고
성도들의 헌신을 강요하며 만사형통의 복을 흥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하여 헌신된 성도의 강요로 복을 베푸는
이상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고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본질인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먹구름 뒤에 숨어 계시고
초대형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가난한 하나님은 성도들의 복채를 끝없이 탐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 그리고 감사로 이어지는 유기체적인 순환 패러다임의 신앙이 무너지고
성도들의 복채에 목마른 하나님은 끝없이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의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과 복당의 하나님은 너무나 달라서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여호와의 산당을 무너뜨린 부족한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이
그나마 희망의 빛으로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사랑을 감사의 찬양으로 선순환하는 패러다임의 신앙이
개혁의 갈증으로 목마르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온전한 신앙으로
복음을 복음되게,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사랑과 감사로 넘치는 주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