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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재앙
출 8: 16-17
우리는 옛날을 좋았던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가난하기는 했었지만 이웃들과 다정하게 정을 나누며 살았고 따스한 추억들이 만들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옛날 기억 중에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억들이 적지 않은데, 강단에서 말하기 쑥스러운 기억 중에 하나가 이나 빈대 같은 해충 때문에 고생한 기억입니다. 이는 사람의 내의에 붙어살면서 별로 먹은 것도 없는 비쩍 마른 사람의 살을 뜯고 피를 빨아먹기 때문에 살갗이 몹시 가려웠고, 헌데가 나기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목욕을 자주하지 못했기 때문에 겨울철만 되면 속옷이나 여자들의 긴 머릿속에 이가 있었고, 그래서 여인들이 시집갈 때는 참빗이라는 빗을 혼수로 가지고 갔는데, 그것은 대나무로 만든 촘촘한 빗입니다. 참빗은 머리를 가지런히 빗기도 했지만 머리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시골의 겨울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이상한 사냥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를 잡는 모습이었습니다. 6.25때에 제주도의 포로수용소에서는 이 때문에 고생하는 포로들을 위해서 포로들의 몸과 머리에 디디티를 허옇게 뿌려주는 장면을 기록영화에서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북한주민들은 지금도 이 때문에 지독히 고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애굽의 바로에게 세 번째 벌을 내리시는데, 애굽 온 백성들에게 이가 득실거리게 하셔서 온 백성이 괴로워 못 견디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을 내리시자 아론이 지팡이로 티끌을 쳤더니, 그 티끌과 먼지가 이가 되었고 그 순간 애굽의 모든 티끌과 먼지가 이가 되었습니다.
티끌은 없는 데가 없습니다. 땅에도 있고 방에도 있고 공기 중에도 있고 온 사방 천지에 먼지투성이인데, 공기와 온 사방에 있던 티끌과 먼지가 한 순간에 모두 이가 되어버렸으니 얼마나 무섭고 소름끼쳤을까요? 많은 이가 옷과 음식과 모든 것에 달라붙어 기어 다니고, 사람의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으니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벼락이나 지진이나 해일이나 산사태 같은 큰 것으로만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으로도 사람을 징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재앙으로 보여주십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을 우습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려왔음에도 내가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항한다면, 내 주위에 있던 어떤 아주 작은 것, 평소에 아무 의미가 없던 사소한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아픔과 절망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 하나도 바꿀 수없는 존재요, 하나님이 살게 하시니까 겨우 살아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 이 재앙의 책임은 전적으로 바로에게 있습니다.
8:8에 보면, 둘째 재앙을 만났던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내가 이 백성을 보낼것이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하나님께서 개구리들을 다 제거해 주셔서 개구리가 없어지고 그것들이 썩는 냄새가 감하여 겨우 숨이 통할만 하니까 다시 약속을 어겼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하지 않아도 될 세 번째 재앙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재앙은 바로가 벌어들인 것입니다.
둘째와 셋째 재앙을 보면, 재앙들이 갈수록 점점 인간의 육신과 정신에 접근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 재앙인 피는 강물에 있었으므로 문을 닫으면 보지 않을 수 있었고, 비린내가 멀어질 수 있었지만, 개구리는 방안과 침상과 밥상으로 달려들었으니 좀 더 가까이 재앙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세 번째인 이 재앙은 옷 속 피부에 착 달라붙어있으니 그 고통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이 재앙입니다. 몸에 착 달라붙어 따라다니고,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고 잘을 잘 때는 더욱 괴롭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겪는 육체와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했겠습니까?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재앙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최소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싫어하시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날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 뉴스에 보니, 미국의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가 25일 주일에는 교회에 오지 말라고 했다 합니다. 그날이 성탄절이니 가족과 즐기라는 이유랍니다. 그러나 주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키라 명하신 날로, 우리생명의 창조자를 바라보는 날이지만 성탄절은 우리가 만든 기념일일 뿐입니다. 주일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위를 보세요. 하나님의 종을 우습게 여기고 괴롭힌 사람이 온전한 것을 본적이 있나요? 보이는 하나님의 종을 듣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습니까? 주의 종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표시오 멸망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분깃인 십일조를 떼어먹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나와 내 소유의 주인이 누구신가를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치시는데, 처음에는 물질을 치시지만 나중에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치시고 다음에는 그 자신을 치십니다. 그 때에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존귀하게 살고자 한다면, 최소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고맙고 좋으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누가 말릴 이가 없고 피하여 도망칠 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분깃을 존귀하게 대합시다.
본문에 보면, 이 재앙을 만나고도 바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인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자기가 짓는 죄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앞에 닥쳐올 하나님의 진노의 큰 재앙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멸망할 짐승 같아서 자꾸 진노를 쌓아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악한 짐승 같다”고 하였으며(딛1:12), 벧후2:12에는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한다.”고 하였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고, 결국 하나님은 그를 짐승 취급하시고 재앙으로 징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치시는 채찍의 손길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했고, 재앙을 만나면서도 또다시 어리석은 짓만을 골라서 하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잠언1:32절에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라고 하신 말씀은 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였고, 그가 순종하지 않음으로 이미 피, 개구리 재앙을 당하였고, 결국 제가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는 순종하겠노라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노라고 약속을 하고서도 어기고 다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으니, 이 재앙은 순전히 바로가 자초한 재앙입니다. 누구에게 핑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 중에 대부분은 누구를 향하여 원망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 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2. 지극히 사소한 것도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큰 강물이나 필요불가결한 샘물을 가지고도 재앙의 재료를 삼을 수 있지만, 쓸모없는 것들,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티끌이나 먼지를 가지고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을 징계 하시고 고난에 던지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재앙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티끌이나 먼지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실 때 그것은 더 이상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 지팡이로 티끌을 치자, 대 제국 애굽의 군주, 교만하기 짝이 없는 바로가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하게 하는 큰 재앙이 되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국민들을 밤마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감당못할 고통의 재앙이 작은 티끌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먼지와 티끌을 가지고도 한 나라의 왕을 좌절하게 하고 역사의 방향을 바꾸시는 하나님께 사람이 대항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두려운 분입니다.
그와 반대로 만일 사람이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에게 붙잡혀 사용된다면, 얼마나 큰일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가 가지고 다니던 마른 지팡이를 가지고도 열 가지 재앙을 일으켜 바로를 녹아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을 가지고도 역사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된다면 그가 얼마나 귀하고 강하게 쓰임을 받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신 작은 것의 위력을 아십니까? 주님께서 축사하시자 오병이어 한 사람의 간식거리가 오천 명 장정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에 가득 남았으며, 산골에서 양 치던 어린소년 다윗을 하나님이 사용하시자 다윗은 골리앗을 작은 돌로 쳐서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였고,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윗을 보시고 아주 기뻐하시면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대하게 쓰셨습니다. 만사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이 혹 이상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제 성경말씀에 주목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봅시다.
3. 여기서 부터는 애굽의 술객들이 따라 하지 못하였습니다.
18절에 보면 티끌로 이를 만드는 일은 술객들이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19절에는 술객들이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라고 고백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전능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게 살 사람입니다.
신약에서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마다 하나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여, 혹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여”라고 부르면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기를 간구하거나, 자기를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을 알아봅니다. 약 2:19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술객들은 그동안 바로의 명을 받아서 자기들의 속임수와 술수로 모세가 행하는 표징들을 따라서 해 보였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가 행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마술사의 능력과 비슷한 것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결국 애굽의 술객들은 바로를 돕지 못하였고 애굽 백성들을 실컷 고생하게 해 놓고는, 이제 와서 모세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면서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그들의 말을 믿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래서 당한 고통과 재앙의 손해는 누가 보상할 것입니까? 그들은 사람을 바로 인도할 능력도 없고 사람들을 책임질 힘도 없습니다. 술객들은 바로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바로의 판단을 흐리게 했고 하나님을 대항하게 하여 손해만 끼쳤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돕지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행복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식이 있다는 사람이나 세상 종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결국 하나님을 등지고 배척하다가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말이나 사람이 만든 종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진리를 깨닫고 죄를 버리며 구원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더 큰 재난을 자초할 뿐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고, 사람의 장래를 인도하며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식과 사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애굽의 술객들은 왜 티끌로 이를 만들지 못하였을까요?
첫째는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이거나 눈속임에 능한 마술사라 할지라도 그들은 불완전한 사람에 불과하고, 그들이 요술부리는 물과 땅과 세상의 사물은 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어서 하나님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유익을 주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술객들이 세상만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사나 박사나 주술사나 어떤 점쟁이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만물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둘째는 그들의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도 영물이지만 역시 피조물입니다. 사단에게 굉장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조물주 하나님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을 위협하고 조롱하며 시험에 들게 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육신이나 영혼을 제 마음대로 죽이거나 살리지 못하며 고난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천국에 이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말고, 육과 영을 아울러 지옥 불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단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신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은 미래를 주관하지 못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다만 사람을 속여 진리를 좇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4.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 하십니다.
모든 재앙은 애굽 사람들의 집에만 있었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없었습니다. 물들이 피가 되는 재앙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의 물은 멀쩡하였고, 개구리가 떼로 몰려오는 재앙이나, 모든 티끌이 이가 되어버린 재앙도 고센 땅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채찍을 맞아야 할 죄인을 기어코 찾아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등진 사람이 땅 끝에 가서 숨을 지라도 찾아내시어 벌을 주시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백성은 하늘이 무너지는 재앙 속에서도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아십니다. 당신의 사람을 구분하여 내십니다.
마3:12에는 손에 키를 들고 오셔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신다 하셨고,
말3:18에서는 “악인과 의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2) 그때 택한 백성은 절대 보호하십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내내, 이스라엘에게는 그 재앙이 미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홍해를 갈라서 길을 내 주셨지만, 애굽 군대는 그 홍해 물에 수장시켜버렸습니다. 시91:7에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들게 사는 사람, 말씀대로 살아가는 한 사람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그를 챙기시고 보호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복권에 당첨되고도 자기가 당첨된 줄을 몰라서 당첨금을 타지 못하는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산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받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의 가치와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아시겠습니까?
5.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십니까?
1)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치시지만, 겸손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벧전5:5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2)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통감하며 죄 용서받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사6:5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 이사야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는 심히 낙망하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 숯불을 입술에 대주시면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고 용서를 선언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당신의 선지자로 사용하셨습니다. 딤후2:20에 “큰 집에는 금과 은그릇이 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는데, 어떤 그릇이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가슴아파하며 성결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하나님은 틀림없이 찾아내어 높이 사용해 주십니다.
3) 하나님께만 절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몸에 밴 세상의 사고방식 때문이고, 이미 굳어진 자기의 가치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티끌로도 큰 재앙을 만드시며, 단단한 반석에서도 시원한 물이 흐르게 하시는 분이신데,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세상에서 보고 들어온 세상 원리와 사례들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순종하는 사람을 들어 쓰시는데, 그를 돕기 위해서 천하를 동원하여 도우시고 사용하십니다. 렘 33:2에 당신을 설명하시기를,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없는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은 맨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지게도 하시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도 하셨고, 깊고 넓은 홍해 바다가 열려 길이 되게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 자기의 지은 죄를 두려워하며 씻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그 한 사람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모세는 과거에 정치적으로 실패한 사람이고 80 노인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들어 사용하시자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마치 자기 능력처럼 사용하여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심판하였고, 이스라엘 200만 명을 노예의 땅에서 구원하였습니다. 그들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모세는 마치 하나님의 손발처럼 백성들을 먹이고 마시게 하였으며 수많은 가로막는 장애물과 대적을 물리쳤으며, 마침내 가나안땅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참 신자가 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특별히 보호하시고, 없는 길은 만들어서라도 그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불신하고 말씀을 거역하면 재앙을 피할 길이 없게 되고, 그 주변에 있던 아주 작은 것도 그를 지극히 고통스럽게 하는 재앙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고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작정합시다.
하나님의 손가락
출 8: 16-19
출애굽기 8장을 통해 원래는 두 번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 보
려고 하다가 묵상하는 중에 출애굽기 8장의 주제가 개구리 재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재앙인 ‘이의 재앙’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 번째 재앙인 이의 재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라는 명령을 들었
지만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자
만해도 노동력 인구가 60만인데 그 노동력의 손실은 애굽에게 있어서도 큰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쉽게 놓아주겠습니까? 결국 바로왕은 마음을 강
퍅하게 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마음이 강퍅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
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10가지 재
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왕이 마음을 강퍅하게 할 때마다 10번씩이나 재앙을 내리셔
서 결국은 바로왕을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해방을 얻
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요 자유의 책이요 해방의 책입니다. 출애굽기의 주제도 역시 구원
이요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를 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
는 자유를 원해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눌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도 눌려
서는 안 되고 정치적으로도 눌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눌려서는 안 됩니
다. 눌리고 압박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원해야 합니까? 자유를 원해야 합니다. ‘나를 지금 누르고 있는 것, 속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영적인 세력인가? 이것이 인간적인 세력인가? 이것이 정치적
인 세력인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누르고 있는 그 핍박의 원
인을 찾아내고 그 핍박의 원인으로부터 자유함을 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가 인
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구원과 해방이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
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자기의 능력으로 해방을 이루었습니까? 이스라엘 백
성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므로 결국
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 자유와 참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 가운데서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세 번째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모세야 너는 네 지팡이를 네 형 아론에게 주어라 그래서 아
론이 그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땅의 티끌을 치게 되면 티끌이 다 변하여 이가 될 것이
라” 여러분 이 아십니까? 이가 톡톡 몸을 깨물면 가렵고 긁으면 살이 불어오릅니다.
한두 마리만 몸에 있어도 괴로운데 애굽 온 땅의 먼지가 이로 변했다고 생각해 보십시
오. 그리고 그 이들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이 세 번째 재앙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이 다른 재앙들
은 미리 경고를 주셨지만 이 세 번째 재앙은 미리 경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
수가 변하여 피가 될 것이다.” “개구리가 너희 밥상과 침상에 뛰어오를 것이다.”
라고 경고해 주셨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재앙과는 달리 이의 재앙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신속하게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첫 번째 재앙과 두 번째 재앙까지는 애
굽의 술객들도 똑같이 따라서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기적을 행하면 술객들도 똑
같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기적을 보고 애굽의 술객들이 뭐라고 말
을 합니까? 출애굽기 8장 19절에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
다.”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우리말로 의역된 원래의 영어는 “This
is the finger of God”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라는 말인 것입니
다.
그래서 오늘 세 번째 재앙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
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손가락은 손에 붙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손을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님의 손, 이것이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
입니다. 사람의 손가락도 얼마나 많은 기능이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
도 그리고 젓가락질도 합니다. 손가락으로 피아노도 칩니다. 손가락으로 길도 가리키
고 손가락으로 맛도 찍어봅니다. 인간의 손가락도 엄청난 기능을 행하고 있는데 하나
님의 손가락은 얼마나 더 큰 기능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출애굽기
에 있습니다만 먼저 출애굽기 이외에 다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어떻게 묘사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출애굽기 이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
출애굽기 이외에 다른 성경의 기록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이 세 가지 기능을 행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손가락은 두 돌비에 율법을 기록한 손가락입니다.
신명기 9장 10절에서 모세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판
에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두 돌 위에 기
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 내려온 그 두 돌비에 인간이 지켜
야 될 최고의 법을 친수로 써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우리 인간에
게 법을 주시는 손가락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법을 자꾸 넘습니다. 이 법을 자꾸 어기고 침범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손가락은 심판을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기능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바벨론 왕 벨사살이라고 하는 자가 귀인 천명을 모아가지고 왕궁에서 파티를 벌였습니
다. 술파티를 벌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술잔으로 마시면 술맛이 없는지 느브갓
네살왕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에 성전에서 빼앗아가지고 온 여호와께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귀한 금그릇과 은그릇을 꺼내 와서는 거기에다 술을 마시면서 우상을 찬송했
습니다. 그런데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갑자기 벽에 사람 손가락 같은 모습이
나타나더니 벽에 글씨를 쓰는 것입니다.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벨사살왕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 손가락이 나와서
글씨를 쓰고 있으니까 깜짝 놀라고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넙적 다리가 녹는 듯 하고
두 다리가 떨리게 됩니다. 그리고 “도대체 저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
냐?” 그러니까 “바벨론에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히브리 사람이 있습니다.”해서 다니
엘을 불러 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왕 앞에서 해석을 합니다. “메네라고 하는 것은
셈을 센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왕의 시대를 세셔서 이제 끝나게 되었습니다. 데겔이라
고 하는 것은 무게를 잰다는 뜻으로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놓고 보니까 부족함이
보여서 이제 왕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우바르신이란 나눈다고 하는 뜻인데 왕
이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둘로 나누어서 메데와 바사에게
줄 것입니다 고로 왕은 오늘 부로 멸망할 것이고 왕의 나라는 나뉘고 왕은 하나님께
부족함이 보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벨사살 왕은 그날 죽임을 당하고
다리오 왕이 이어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다니엘서 5장에 기록이 되어 있
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어기는 자에게 심판하는
그런 능력이 있는 손가락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행전 13장에 사도바울이 일차 전도여행을 할 때에 바보
섬에 도착을 했습니다. 바보섬에서 바울이 총독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남자 무
당이 거기 옆에서 자꾸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남자무당을 박수라 하지 않습니까? 박
수 엘루마라고 하는 자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하고 자꾸 방해를 하니까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3장 11절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리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
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박수 엘루마가 더듬거리고 갈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고
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법을 주실 뿐만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에게 심판하는 손가락입
니다.
그러면 법을 어기고 나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벌벌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
님의 손가락은 어떤 손가락입니까? 용서와 은혜를 주시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요한복
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
리고 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은 돌로 치라고 했는데 이 여
인을 돌로 치리이까 용서해 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아주 못된 질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딴죽을 걸어 궁지에 빠뜨리려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만약 예수님이 용서해
라 하면 율법을 어기는 이단이라고 고소할 것이고 돌로 치라 하면 자비가 없고 사랑
도 없는 지도자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해도 걸고 저렇게 대답해도 걸려는 못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무
릎을 굽히시더니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십니다. 그러기를 두 번이나 하십니다. 그
리고 일어나서 뭐라 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먼저 아무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아 그러니까 돌을 들고 서 있던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갑자기 팔이 가렵네 하면서 하나씩 없어지더니만 아무도 안 남고 결국은 간음
한 여인과 예수님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 여인을 용서하셨습
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바르게 살라고 교훈을 하신 사건이 요한복음 8장에 기록이 되
어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죄를 짓고 그로 인해 떨고 있는 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용서하시는 손가락이요 치료하시는 손가락
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귀신에 눌린 자에게는 해방하는 손가락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에 “네가 만
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 여러분 중에 귀신이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이 임
하여 해방함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법도 주시고, 심판도 하시
고, 구원도 하시고, 악한 영으로부터 해방도 하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의 의문
그런데 오늘 출애굽기 8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출애굽기 8장에 볼 때에 마음속에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나타나서 우리가 좋아진 것이 뭐가 있냐? 우리가 전에는 그래도 노예
생활을 해도 재료를 애굽 사람이 다 주고 해서 벽돌만 찍어내면 되는 것이었는데 저
모세와 아론이 나타나더니 그만 우리 스스로 재료도 가서 구해야 되니 더 괴로워지게
되지 않았느냐? 저 모세와 아론이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 아들들을 낳으면 하수에 던
져 죽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다 재앙으로 인해 애굽의 하수가 변하여 피로 변하고 물이 악취가 나서 마실 수가 없
는데 그 재앙이 애굽 사람에게만 내렸습니까? 이스라엘에게도 같이 내린 것입니다. 그
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에다 재앙까지 같이 당합니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재앙,
두 번째 재앙은 애굽만 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똑같이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
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제가 만약 이스라엘 백성
이면 저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 따르는 것이 이런 것이냐 야 도
대체 가만히 보니까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재앙도 내고 하는데 애굽 술객들도 똑같
이 따라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과 애굽신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아니 우리가 하나님
의 백성이라서 여호와를 따르려고 하는데 여호와를 따르는 것이 이렇게 괴로움을 받
고 또 애굽에 내린 재앙으로부터 면제 되지도 않고 하니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는 것
과 애굽 백성이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렇게 의문을 가질 법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의문을 일격에 날려버린 것
이 바로 ‘The finger of God’ 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이런 의문을
일격에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3.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은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
님의 손가락은 능력(power)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기적도 일
으키는 능력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손은 애굽 술객들이 말한 대로 여호와의 권능이
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권능의 손가락입니다. 하나님의 손과 손가락은 단순
히 기적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요 천지를 보호하시는 능력이
요 사람과 만물을 통치하시는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시편 102편 25절에 “하늘도 주
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늘을 보시면 태양도 있고 달
도 있고 별도 있고 구름도 있습니다. 누가 만드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
드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손은 창조의 능력의 손입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시는 하나님
이시기도 합니다. 만물이 전부 원자가 있기 때문에 원자끼리 부딪히면 만물이 원자폭
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존하시지 않습니까? 욥기 14장 15절에 “주께
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나이다.” 주님이 아껴 보시지 아니하면 불
로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껴보시고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
손가락으로 사람도 통치하시고 만유를 통치하시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에스
라서 8장 22절에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
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자기
를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배반하는 자에게 진노를 베푸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창조(Creation)의 손, 보존(preservation)
의 손, 통치(government)의 손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치면 섭리(providence)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섭리는 창조, 보존, 통치의 세 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은 섭리의 능력이 있는 손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
리가 만유를 보고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손가락의 흔적을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손가락은 구별성이 있습니다. 애굽의 술객의 능력과 여호와 하나
님의 능력이 구별된 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난 세 번째 재앙부터입니다. 그러니
까 애굽의 술객들도 “아이고, 이것은 여호와의 손가락이기 때문에 우리가 따라할 수
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니까 애굽의 신과 여호와의
신이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애굽의 신은 수준차이도 나고 질적 차이도 나고 능력에
도 압도적인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애굽의 신은 거짓신이
요, 열등신이요, 귀신이요, 악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요 진실하신 창조주
보존자 통치자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딱 구별해 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가락은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백성도 구별합니다. 거기 출애굽기 8장 23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
라” 하나님의 손가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마에 있으니까 애굽 사람들하고 완전히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재앙까지는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 번
째 재앙,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날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별이 되는 것입니
다.
구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네 번
째 재앙부터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의 재앙이 애굽을 덮쳤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8장 21절에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
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
하리라 그날에 내가 네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중의 여호와인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세 번째 재앙
까지는 애굽과 이스라엘이 같이 당했지만 네 번째 재앙부터 열 번째 재앙까지는 하나
님이 애굽에만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은 면제해 주셨다는 말입니
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이렇게 구별해서 보호해 주시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고센 땅 경계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자기 땅에는 파리가 한 마리
도 없고 경계에서 팔을 내밀어 보면 파리떼가 붙었을 테니 말입니다. 얼마나 신기하
고 놀라웠겠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경계가 져서 저 땅에는 파리가 득실거리고 이 땅
에는 파리가 없는가?”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임하니까 이렇게 구별되어
서 보호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여 우
리를 자유케 해주옵소서 우리를 누르는 것은 저 애굽왕 바로니이다. 자유를 주십시
오! 해방을 주십시오!” 했지만 그들의 능력으로 무슨 해방이 됩니까? 모세의 능력으
로 구원이 일어났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능력으로 자유를 얻고 해
방이 되고 출애굽이 되었습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능력으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귀에 눌려 있고 정치적으로도 눌리고 경제적으로도 눌리고 이모저모 눌
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귀신으로부터
여러분이 자유할 능력이 있으십니까? 안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무슨 능력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를 딱 찍어서 구별하시고 보
호하시고 그리고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이 우리는 마귀로부터 해방되
고, 우리를 지배하는 귀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우리를 누르고 있는 죄로부터도 해방된
줄로 믿습니다.
침례교회의 정신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유입니다. 우리 침례교는 “자유”를 추구
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왕이 종교를 가지고 이거 믿어라 저거 믿어라 명령하고 국가
가 말하는 것을 안 믿으면 핍박하고 죽일 때에 침례교회는 “순교를 당할지라도 성경
그대로 믿겠습니다. 왕은 정치나 잘 하시오 신앙 문제는 종교문제는 우리가 성경을 중
심으로 우리 양심대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고로 국가교회 만들지 마시고 종교의
자유를 주시오.”라고 용감히 말했던 것입니다. 침례교는 장로교, 감리교와 달리 우리
는 국가교회를 인정치 않습니다. 침례교회의 정신은 자유(Spirit of liberation)입니
다. 우리는 자유를 원합니다. 우리를 누르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해방되시기를 주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무슨 능력으로 해방됩니까?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에게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 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첫 째로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 위
에 임한 것을 영안이 열려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위에 임하여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영안이 안 열려서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세야 내가 내 손이 너와 함께해서 능력을 줄 테니까 너는 출애굽
의 지도자가 되라”고 말씀하셔도 모세처럼 “저는 못합니다. 내가 입이 둔한데 난 못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한다면 사명자도 자기 사명을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
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손이 자기 위에 함께 한 것을 보지 못하면 자기
들의 지도자를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딴죽 걸고 자기들의
지도자는 꺾어 버리고 자기들을 구속하고 있는 원수는 찾아가서 “지푸라기라도 주시
오” 하고 비는 이런 꼬락서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자기들 위
에 임한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처럼 하나님의 손가락이 안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하고 싸워서 이길 줄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머리로 바위에 대고 박치기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한번 박치기 한 후에 머리가 깨지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열 번 씩이나
박아서 다 깨져도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바로왕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으면 아예 처음부터 내가 하나님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하고 그냥 보냈으면 저 좋고 남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을 것인데
왜 그런 어리석을 짓을 하다가 저도 망하고 심판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손
가락을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로 여러분 영안이 열려서 여러분 위에 임한
하나님의 손을 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 위에 임한 하나님의 손이 어떤 종류의 손인가를 잘 봐야 한다
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심판의 손일 것입니다. 벨사살 왕을 심판한 것
처럼 그리고 박수 엘루마를 심판한 것처럼 심판의 손가락으로 와 있는 사람도 있을 것
입니다. ‘내 머리 위에는 하나님의 손이 심판의 손가락으로 와 있다’고 생각되는 사
람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빨리 엎드려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 믿어 죄사함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자기 머리로 바위와 박치기하는 짓을 계속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로, 자기 머리위에 심판의 손이 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회개하시
고 예수 믿으시고 하나님을 따라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나는 죄
를 지어서 “아 내 마음은 참 지금 어쩔 수 없고 내 마음이 참 슬프고 괴롭고 하나님
앞에 양심의 가책이 많이 되고 우 주여 어떡합니까?”라고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성도
들은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을 도와준 그 용서의 손이 와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으시고, 용서 받으시고, 위로를 받으시고, 격려를 받으십시오.
결론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보호하시고 능력 주셔서 우리 앞에 원
수를 물리치고 장애를 물리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그런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돕는 손길은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를 날
마다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손을 자꾸 놓는 것이지 하나님은 우리 손을,
우리를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천국 갈 때까지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 손을 잡
았다가 놨다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위에 임한 이 하나님의 손을 다시 강하
게 붙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유를 얻고 해방을 얻습니
까?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고 그 능력이 역사할 때 자유와 해방이 있는 것입니다. 주
의 영이 계신 곳에는 영혼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의 자유를 누
리시고 인생 살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
을 붙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하고 배고플게 무서워서 벌벌 떨 때 노예가 되는 것이
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나는 자유자라 할 때에는 뭐가 두렵겠습니까? 죽으면 더 좋
은 것이죠.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합니다. 123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에 올라가면서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
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
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노래했습니다. 여종의 손이 주모의 손을 바
라듯이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구별하시고, 우리에게 전능의 능력으로 역사
하셔서 해방과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가락을 붙드시고 바라보시고 그 손
의 도우심을 얻어 승리하시고 치료받게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별된 사람, 구별된 은혜
출 8: 20-24
1. 크리스천 기업 중에 인상적인 기업으로 ‘이 랜드’가 있습니다. 이 랜드의 역사는 1980년 이화여대 앞 ‘잉글랜드’라는 2평 남짓한 보세 옷가게에서 출발했습니다. 서울대 공대 출신의 창업주 박 성수 씨는 단골 고객을 바탕으로 놀라운 사업 수완을 발휘하면서 점포를 늘려갔습니다.
그로부터 6년 뒤, 그는 주식회사 ‘이 랜드’로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이 랜드를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을 맺는 신앙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이 이 랜드는 중저가 캐주얼 전략으로 틈새 시장을 공략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 랜드의 기회로 열어주셨습니다. 80년대 학생들이 교복을 벗고 캐주얼을 입기 시작하면서 비약적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구멍가게로 시작한 이 랜드는 15년만인 95년에 8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급성장 하였습니다. 그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8개 법인 32개의 기업의 새 역사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지금 경기 침체 여파로 대다수 기업들이 몸집 줄이기에 주력하고 있지만, 이 랜드 그룹은 요즘 팽창 경영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제상사’ 인수를 선언한 이 랜드는 이 회사의 주식 18만주 가량을 최근 추가 매입했습니다. 또 고급 아동복 브랜드인 ‘엔젤’을 인수한데 이어 애슐리 브랜드로 정통 패밀리 레스토랑 사업에도 진출했습니다. 올해 안으로 서울, 경인 지역에 할인 백화점 2001 아울렛 신규 점포 4개를 추가로 열 계획이랍니다.
오늘 아침 목사님이 이 랜드로부터 뭘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 랜드와 나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얼마 전 읽은 글이 생각난 것일 뿐입니다.
이 랜드가 이렇게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비결은 뭘까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지난 2000년부터 본격화한 이 랜드의 ‘지식경영’ 덕분이라고 합니다. 정말일까요? 요즘 지식 경영하지 않는 회사가 어디 있습니까. 펑펑 넘어가는 중견 기업들이 지식 경영을 하지 않아서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이처럼 어렵다 어렵다 하는 요즘에 이 회사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는 대학 시절에 사랑의 교회에서 목사님으로부터 제자 훈련을 받았고, 그 때 하나님이 주신 꿈을 품었답니다. 그리고 기업을 선교 사역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늘 기도하며 주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사업을 펼쳐왔답니다. 장로가 되고나선 더욱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 세계에선 유별난 성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장사나 사업을 할 때 신자임을 내세우면 만날 손해만 보고 망한다고들 하는데,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임을 내세우면서도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었을까요? 오늘 성경이 대답합니다.
2. 오늘 본문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바로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모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끝까지 버티며 불순종하는 바로에게 10가지 재앙을 쏟아 부으며 그를 항복시키고 마침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보면 좀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물이 피가 되는 첫 번째 재앙에서 이의 습격을 받는 세 번째 재앙까지는 애굽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모두 똑같이 받습니다. 애굽을 징계하려고 재앙을 내렸는데, 그 피해를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받습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쉽게 우리 주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든 간에 똑같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얼마 전 IMF 때도 이 땅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다 똑같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도, 잘 못하는 사람도 다 똑같이 당했습니다. 이것이 재앙의 첫 번째 성격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어려워지면 그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들이 다 어렵습니다. 다 고통을 당합니다. 다 힘듭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라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딤전 2:1-2).
노 무현 대통령을 선택했든, 안 했든 이제는 별 수 없습니다. 이 노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가 실수하지 않도록, 사람의 여론에 민감하여 인기 정책을 무책임하게 남발하지 않도록, 가볍게 말하지 않도록, 보다 신중하고 보다 믿음직스럽게 이 나라를 이끌어 가도록 기도하십시오.
공동체가 평안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받습니다.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공세와 국세를 정직히 납부해야 합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집단 이기주의에 부딪쳐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모릅니다. 지지난 주간, 바나바 남선교회를 따라 일본에 한 주간 가 있다가 다시 이 땅에 돌아와 TV.를 켜는 순간, 얼마나 다시 머리가 아파지는 지 모르겠더라구요. 켜자마자 데모, 파업, 정치인들의 부정, 카드 빚으로 인한 유괴, 납치, 살인, ... 정말 골치 아프더라구요. 다시 나가고 싶습니다. 누구 나갈 때 나 좀 데리고 가십시오.
우리 사회, 이런 식으로 나가면 소망이 없습니다. 자기 것만 주장하고 남의 것은 다 틀렸다는 식으로 해서는 나라가 다시 위기 상황에 부딪힐 것이고, 우리는 서로 다 망하고 맙니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는가요? 그러나 국민 노릇도 정말 못해 먹겠습니다. 그래서 이민 보따리를 싸는 엘리트들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국가를 위하여, 이 사회를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양보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국가가 힘이 없으면 결국 국민 모두가 고통을 당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사회를 위해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양보할 것은 양보합시다. 협력해야 할 것은 협력합시다. 나라가 안정되어야 우리 모두가 다 안정될 수 있습니다.
애굽은 바로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애굽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에서 세 번째 재앙을 함께 당하며 함께 괴로워했습니다.
3. 그런데 이상하게도 4번째 재앙부터는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는 재앙이 내렸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애굽인들은 엄청 고통을 당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평안이 있었습니다. 본문 22절,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첫 번째에서 세 번째 재앙까지 모두 똑같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애굽의 지도자 바로는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이 재앙들이 자연의 일반적 현상이거나 이변(異變) 정도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당하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4번째부터 구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애굽인들은 고통을 당해도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평안이었습니다.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한국판 베드로의 기적’이란 소식을 아는가요? 포항 근처의 어느 어촌에 사는 김 집사가 있습니다. 출어(出漁)를 앞두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들 풍어제를 가졌습니다. 용왕에게 고기 많이 잡게 해 달라고, 풍랑이 잔잔하여 배들이 모두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 달라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돼지 머리에 돈을 꽂으며 술을 뿌리며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김 집사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부정 탄다고 흉을 보았지만 그저 교회에 가서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출어 날이 되어 모든 배들이 바다로 나갔습니다. 풍어제를 올린 배들은 저희들끼리 모여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물을 내렸고, 왕따를 당한 김 집사의 배는 좋은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배들은 거의 빈 그물이었는데, 유독 김 집사의 그물에는 몇 천 마리의 고기 떼가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고기들은 가장 자리로 이동을 하지 않고 가운데로 이동하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김 집사가 친 그물은 가장자리에 있었음에도 김 집사의 그물에만 고기 떼가 몰려들어간 것이었습니다. ‘한국판 베드로의 기적’이라는 글로 2년 전에 화제가 되어 기독신문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구별된 축복, 구별된 은혜가 있습니다. 모두들 힘들어하고 고통 당할 때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평안을 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어려우면 우리도 어렵습니다. 세상이 불경기면 우리도 불경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다 어려울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불경기라 할 때 호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힘들다고 하는 데 나는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납 한 조각을 물에 떨어뜨리면 물 속에 가라앉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납이 다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그 납을 나무토막에 묶어서 떨어뜨리면 물위에 그대로 뜹니다. 납의 성질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납은 똑같은 납입니다. 그런데 나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만유인력보다 더 강한 법칙, 즉 부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납이 뜹니다.
나, 홀로 동분서주해 봐야 현실의 법칙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묶일 때 모두 그렇다고 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구별된 은혜, 구별된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이 구별된 은혜, 구별된 축복을 받기 바랍니다.
4. 그럼 이 구별된 은혜, 구별된 축복은 누구나 다 받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출 9장을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재앙인 우박의 재앙을 내리시는데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내일 이맘 때 쯤에 우박을 보내리니 들에 있는 것들을 다 집으로 모아 들이라.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앙을 바로 내리지 않고 예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별된 은혜, 구별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순종하는 사람들, 즉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모든 이가 ‘그럴 리가 있어? 괜찮아, 별 거 아닐 거야’하는데, ‘아니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라는 믿음을 갖고 순종하는 별난 사람들에게 그 은혜와 축복은 주어집니다.
일반적인 은혜, 일반적인 축복은 평상시 모든 이에게 골고루 주어집니다. 그러나 특별한 때에 내리는 은혜와 축복은 구별된 특별한 이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어느 집사님이 사업을 시작하며 고민하였습니다. 서울 시내에만도 같은 업종으로 사업을 시작하거나 이미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그들이 다 성공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못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게으르거나, 경험이 없거나 자본이 딸려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두들 최선을 다하는데 그러합니다.
이 때 이 분의 마음에 감동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렇다. 남들과 좀 달라야 성공할 수 있다. 그 남들과 다른 것이 뭔가? 그래, 나는 하나님께 잘 보여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해야지. 하나님께 충성하자. 하나님만 붙들자.’ 그래서 사업을 시작하며 어려운 때인데도 그는 첫달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하였습니다. 초창기 자본 회전이 빡빡할 때, 얻은 수입을 재투자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남들은 다 그렇게 할 테니 나는 좀 별다르게 하자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를 철저히 드렸습니다. 하루를 반드시 기도로 시작하고, 아무리 바빠도 주일을 성수하고, 성도들과 어울리는 교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 실업(實業)인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반 사업가와는 달랐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구별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백성과 당신의 백성 사이를 구별하십니다. 고센 땅과 애굽 땅을 구별하십니다. 왜 구별하시는가요?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역사를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벧전 2:9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전에는 구별이 안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왜 이렇게 구별되었는가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모든 이와 똑같이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비로소 우리를 구별하십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불쌍히 여기시며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내 앞길을 열어주시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며,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모두들 힘들다 힘들다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선 당신의 이름을 인하여, 당신의 긍휼하심을 인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살기 얼마나 힘드십니까? 모두들 힘들다 힘들다 하며 정말 힘든 세월을 보냅니다. 이 때 우리 믿음이 있는 사람들로 이렇게 하나님의 구별된 은혜, 구별된 축복을 받아봅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구별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법도를 따라갑시다. 당장 좀 손해를 보고 어려울 것 같아도 이왕 그런 것, 구별된 성도의 삶, 구별된 신자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들에게 구별된 은혜, 구별된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땀의 열매가 풍성히 맺힐 것입니다. 전쟁이 났다고 다 죽는 거 아닙니다. 폭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고 다 죽는 것 아닙니다. 다 파괴되었다고 다 망하는 게 아니다. 그 중에서도 살아나는 자가 있고, 그 중에서도 돈 버는 자가 있고, 그 중에서도 찬송하는 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이 구별된 은혜, 구별된 축복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내 경험, 내 재산, 내 지식, 내 백그라운드, ... 내 것으로만 계산해 보면 뻔합니다. 이런 것들을 넘어서서 하늘로 임하는 놀라운 은혜, 놀라운 축복, 놀라운 능력을 맛보지 않으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성도답게 살라면 그렇게 사십시오. 그리스도인 기업가답게 하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손해보는 일 없습니다. 구별된 은혜, 구별된 축복은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사는 이에게 임합니다.
무엇보다 하늘로부터 그에게 평강이 임할 것이요, 그 평강 속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에게 메마른 광야 위에 무수한 들꽃이 피어나듯 그렇게 땀의 열매가 비로소 맺힐 것입니다. 구별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별된 은혜가 반드시 있습니다!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8:14)
“...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히 6:14)
이 구별된 은혜와 구별된 축복이 반드시 여러분 모두에게 듬뿍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파리 떼로 해를 받더라
출 8: 20-24, 마 25: 31-33
어느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결혼할 의사가 조금도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그런 말들은 제발 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 글에 대한 답변이 다음과 같이 실렸습니다. "선생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고 믿습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조언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가축병원 의사에게 문의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도덕을 저버리면 인간이 아닌 동물입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성도가 아닌 그냥 인간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분명한 구별이 있듯이 성도와 인간도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성도에겐 기쁨의 이유에도 슬픔의 이유에도 거룩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말의 뜻이 구별된 자입니다.
평신도로서 부엌의 성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의지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질러 우리로 세상에서 분리된다는 것의 기쁨을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에 세상과의 완전한 분리가 가능합니다. 세상과 완전하게 분리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우리도 밥을 먹어야 살고, 잠을 자야 살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그래도 세상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7:16에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예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십니다. 4:4에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라고 합니다. 4:5에는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말씀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광입니다. 연꽃은 지저분한 물에서 삽니다. 물은 지저분하지만 꽃은 아름답습니다. 꽃만 봐서는 도저히 더러운 물에 사는 꽃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밑을 보면 그 뿌리는 맑은 물이 흐르는 쪽으로 휘어져 있다고 합니다. 겉모습은 더러운 물위에 드러내지만 속 모습은 항상 깨끗한 자태를 잃지 않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책망과 재앙으로 가득한 애굽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완전히 구별하여 그 재앙을 면케 하십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첫째, 애굽 사람의 집에 파리 떼가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침에 다시 나일 강에 나가라고 하십니다. 첫 번째 이적 때와 같이 다시 아침에 나일강에서 가서 바로를 만납니다. 아마 이때는 나일강의 범람이 그치고 물이 빠진데 대한 제사시기였을 것입니다. 파리는 '아로브'란 단어인데 과수와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특별한 종류의 파리라고 합니다. 이 파리는 애굽인들이 잘 알고 있는 해충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그런 종류의 개파리 떼였을 것입니다. 이 파리는 사람과 짐승에게 해를 끼치고 심지어 죽게 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식물들도 갉아먹어 농사를 죄다 망치게 된다고 합니다. 이사야 7:18에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니"라고 합니다. 해를 주는 벌레를 말할 때 애굽의 파리와 앗수르의 벌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이 파리는 해를 주는 벌레의 대명사인 듯합니다. 21절에는 "가득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파리 몇 마리만 있어도 귀찮아하고 신경이 곤두설 터인데 파리가 가득했으니 어떠했겠습니까? 우선 애굽 사람들이 머리가 돌 정도로 피곤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파리 몇 마리는 재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리 떼가 가득한 것은 분명히 재앙입니다.
은총과 재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적당한 것과 지나친 것의 차이입니다. 비가 적당히 내리는 것은 은총입니다. 비가 넘치게 와서 홍수가 나는 것은 재앙입니다. 해가 적당히 비취는 것은 은총입니다. 해만 비치어 나무가 살지 못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햇볕만 있는 곳에서는 생명이 살 수 없듯이 어둠만 있는 곳에서도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일년 내내 햇볕만 비치면 사막이 됩니다. 우리 자연을 보면 사실은 벌레가 있는 게 좋습니다. 지렁이가 있는 땅이 좋은 땅입니다. 장구벌레가 노는 웅덩이가 좋은 물입니다.
배추벌레가 있는 배추가 공해가 적은 배추입니다. 복숭아 속에 벌레가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기도 파리도 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진다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 것입니다. 24절에는 "땅을 해쳤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 말 때문에 파리가 딱정벌레와 같은 벌레가 아니겠느냐고 합니다. 얼마나 파리가 공격적이든지 파리 떼는 땅까지 다 해쳤습니다. 사람 때문에 땅이 고생합니다. 농작물이 파리 떼로 크게 손상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땅이 해를 받으면 사람이 손해를 보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잘 보존돼야 사람이 평안합니다. 인간의 샬롬은 피조물의 샬롬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22에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합니다. 피조물이 탄식할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피조물이 함께 고통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 때문에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에게 의존적입니다. 사람에 따라 피조물은 달라집니다. 편하기도 하고 고통 당하기도 합니다. 부모에 따라 자녀들의 의식이 달라집니다. 남자 만나기에 따라 여자의 삶이 달라집니다. 사람 만나기에 따라 자연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북한의 산들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공원을 빼놓고는 많은 산들이 민둥산들입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니 자연들이 해를 당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고쳐져야 자연이 고쳐지고 땅이 고쳐지고 물이 고쳐집니다.
둘째,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라고 하십니다. 고센도 애굽 땅의 한 부분이지만 하나님은 구별하여 애굽의 재앙을 면하게 하십니다. 구별이란 '페두트'란 단어인데 본래는 구속, 구원을 의미하였습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잘라서 떼어놓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베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표준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구별되는 것이며, 탁월하고 비범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탁월해지고 비범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탁월하고 비범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이란 책에서 "왜 하필이면 핍박인가?
첫째로, 핍박은 하나님이 내리신 법령이다.
둘째로, 핍박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핍박은 위선자들과 참 성도들을 구별해낸다. 위선자들은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지만 갈보리 산까지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심한 고역을 치르고 핍박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사람이 구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구별되게 만듭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성별 되게 합니다.
고센 땅은 애굽의 삼각주에 세워진 땅입니다. 삼각주에 있기 때문에 비옥하고 농사와 목축지로서는 최적지였습니다. 야곱이 식솔들을 데리고 애굽에 이주했을 때에 바로는 이 비옥한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 땅은 나일강에 접해 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나일강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적이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안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항상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를 당치 않습니다. 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해가 우리를 피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살아도 애굽 사람이 아닙니다. 애굽에 살아도 애굽 사람들이 당하는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 살아도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아도 세상 사람이 당하는 해를 당치 않습니다. 레위기 20:26에는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고 하십니다
.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세상의 신과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세상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에스겔 44:23에는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세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엄격히 구별하십니다. 얼핏 보기에는 양 같지만 염소라고 왼쪽에 두시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마치 염소 같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양이라고 오른쪽에 두시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의 사람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시고 구별하십니다. C. S. 루이스는 말합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천국을 지향하고 얻어야 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둘 다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내 마음을 확정한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아예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기쁜 일입니다. 악인들이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은 성도들의 약점 때문이 아니라 거룩함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별되어 사는 것을 악인들은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셋째, 재앙의 목적은 여호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재앙을 내리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을 벌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재앙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배반하고 대든다고 맞붙어 싸우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상대할 만한 천하고 낮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사람의 잘못 때문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재앙이 사람들에게 벌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벌을 주시기는 것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에게 벌을 주어 기분 좋아하실 분이 아닙니다. 벌주는 것을 오히려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20절)라고 하여 여호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의 주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하십니까? "세상 중의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고"(22절) 그렇게 하십니다. 누가 그와 같이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24절).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십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정하시고 이루십니다. 영광이라는 뜻의 희랍어는 '독사'(doxa)인데 '인정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찬양이나 예배 등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예배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인정하는 예식입니다. 첫째,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완전히 반대란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인생과 같이 식언치 않으십니다.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구원받아 출애굽할 것이고, 애굽의 백성은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말이 72번이나 나타납니다. 여호와를 나타내고 인정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연극에서 포샤는 세 명의 청혼자에게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상자를 고르게 합니다. 세 개의 상자 중 하나는 금인데 그 상자 위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얻을 것이다." 두 번째 상자는 은 상자이고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그 사람은 합당한 대가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비사니오라는 남자는 무서운 글이 적혀 있는 납 상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큰 도전에는 가장 큰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마치 이 납 상자의 글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선택받은 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책임도 함께 따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모든 것을 주고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우리의 또 한 주간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백성 되고 자녀 된 은혜를 마음껏 누립시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날마다 찬송하며 주님을 높이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