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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est Love of All /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1963년∼2012년)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 상업성과 영향력에서 여자 가수 TOP 5 안에 모두 드는 전설적인 가수이다. 미국 대중음악사에서 아레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의 뒤를 이은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디바로 인정받은 흑인 여성 보컬리스트이며, 1985년에 데뷔하여 2000년까지 약 15년 간 정상의 위치에서 커리어를 이어간 인물이다. 특히,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휘트니 휴스턴의 부모는 모두 미국 흑인이고, 외가측 조상 중에는 인디언과 네덜란드계 조상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육군 군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가스펠 가수였다. 엄마를 따라서 교회에 가서 가스펠이란 음악을 배우게 된 것을 시작으로 학창 시절에도 꾸준하게 어머니께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상기한 것처럼 휘트니 휴스턴을 시작으로 가창력이 뛰어난 여가수를 디바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만큼 팝계의 전설적인 목소리로 통한다. 그녀의 별명이 자잘한 수식어 없이 짧고 간결하게 'The Voice'인 것이 그녀의 목소리 자체가 얼마나 높은 가치와 상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가창력으로는 항상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데, 'Queen of Soul'로 불리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뒤를 잇거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며, 전세계적으로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과 함께 90년대 세계 3대 팝 디바로 꼽힌다. '성량의 휘트니 휴스턴, 기교의 머라이어 캐리, 음색의 셀린 디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특히 머라이어 캐리와는 매체들의 기사 소재 발굴 때문에 라이벌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쇠락기도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게 된다. 한 번 침체기를 겪고 다시 재기에 성공한 머라이어 캐리, 꾸준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셀린 디옹과는 달리 실패한 결혼 생활, 마약 중독, 과다한 라이브 공연, 담배로 인한 목소리 변화, 여러 구설수 등으로 롱런하지 못했으며 2009년 《I Look To You》로 완벽한 재기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 비록 말년엔 마약 남용과 흡연으로 목소리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많은 세계인들은 그녀를 "The Voice"로 추억한다.
별명이 'The Voice’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여성 보컬의 전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엄청난 성량과 가성을 매우 부드럽게 올라갔다 내려오며 정확한 발음, 그루브, 폭발적인 진성, 기교, 감정까지 모든 게 완벽했던 최고의 가수다. 수많은 보컬 학원에서 휘트니의 노래를 예시 삼아 가르칠 정도로 교과서 그 자체다. 올타임 레전드에 항상 거론되는 전설급 가수.
흑인 보컬로서 흑인 음악의 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가스펠과 리듬 앤 블루스 양자를 당대에 맞게 세련되게 풀어내는 해석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이브 영상을 보면 같은 곡을 단 한 번도 동일하게 부르지 않는다. 본래 가스펠 음악 집안 출신으로 데뷔 초기엔 백인 취향 컨템퍼러리 팝에 흑인의 목소리만 얹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L.A Reid와 Babyface 등을 위시한 여러 흑인 아티스트들의 집중 지원을 받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을 3집에 이르러선 흑인 사회에서도 그 예술성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집대성'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흑인 보컬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그 가창력의 핵심이라면 역시 특유의 음색과 그를 뒷받침하는 공명감이다. 휘트니의 음색을 들어보면 막힘없이 쭉 뻗으면서도 깊은 배음이 울려서 아주 두텁고 단단한 공명감이 곡 전체에 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아무리 노래를 잘 하는 보컬이 휘트니의 노래를 불러도 휘트니의 공명감보다 약하기 때문에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 쉽게 말하면 휘트니의 파워or목소리의 굵직한 느낌이 너무 강해 특유의 파워풀함이 덜한 것이다.
본래 데뷔했을 때엔 기존 흑인 알토들이 공유하던 비성으로 집중된 두성의 공명감을 사용했고, 이때에도 이미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만 그 후로는 점점 더 공명감을 늘려갔고 벨팅, 특히 인 골라 테크닉까지 결합하기 시작했다. 즉 야구의 투수가 팔 근육을 뒤틀어 인간이 일반적으로 낼 수 없는 시속 140km의 공을 던지듯, 음을 만드는 조음부의 근육을 한계 이상으로 확장시켜 거대하게 울리는 소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함은 그 이후에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조음부 근육을 확장시켜 깊은 소리를 만들어내면 당연히 벨팅에서 그렇듯이 발음이 무너지고 섬세한 리듬감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휘트니는 그 한계까지 울리는 공명감을 가진 소리로 완벽한 발음과 그루브를 만들어 냈다. 두성은 아름다운 음색과 뛰어난 공명감을 가지고 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고 파워가 딸리며, 믹스보이스는 성구 변환이 자유롭고 그루브를 타는 데 좋지만 얇고 약한 소리다. 벨팅은 파워 하나만은 최강이지만 발음이 무너지고 성대 근육이 긴장해서 리듬을 타기 어렵다. 휘트니 휴스턴은 그 모두를 섞어버렸고 그 모든 소리를 완벽히 컨트롤 해내었다. 그 대가는 혹독하게 치러야 했지만.
멜리스마(melisma) 기교를 본격적으로 팝에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멜리스마는 한 음절을 다양한 음으로 쪼개 부르는 기교를 말하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I Will Always Love You'의 첫 소절이 대표적인 예. 'If I'에서 I라는, 한 음절에 불과한 가사를 8개의 음으로 쪼개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휘트니 휴스턴이 멜리스마를 최초로 사용한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며 스티비 원더를 비롯한 흑인 아티스트들이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을 휘트니가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 이후 멜리스마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기교의 머라이어 캐리가 등장하며 멜리스마는 기본적인 가창 기교로 자리 잡게 된다. 2010년대에 들어서야 개나소나 다 하는 멜리스마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만 휘트니는 메조 소프라노였기 때문에 말년에 목소리를 거의 잃었던 것 역시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즉 전성기 시절엔 어린 나이에서 오는 피지컬과 신에게 받은 재능으로 음역대를 벗어난 고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지만, 마약과 흡연 등으로 피지컬이 떨어진 말년에는 메조 소프라노인 자신의 원래 음역대 이상의 고음을 구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중들은 전성기 당시 휘트니의 하늘을 찌를 듯한 파워와 고음을 기억하지만, 경력 후반기의 앨범과 싱글에서는 원래 음역대인 메조 소프라노 톤으로 돌아온 휘트니의 깊은 음색과 편안한 그루브를 들을 수 있다. "I Look To You" 앨범 시절에는 그 그루브마저 거의 잃긴 했지만...
여자 가수의 상업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가수로 평가받는다. 여가수 중 가장 많은 상을 받았으며 가장 많이 팔린 여가수 앨범, 싱글을 모두 보유한 아티스트. 즉 압도적인 가창력을 지닌 가수가 얼마나 상업적으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휘트니의 데뷔 전에도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았지만, 휘트니 휴스턴이 거둔 상업적 성공만큼을 이룬 여자 가수는 휘트니 휴스턴 이전에는 아예 없었다. 모든 가수를 놓고 봐도 휘트니 휴스턴이 거둔 상업적 성취 그 이상을 거둔 가수는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디바'라는 오페라의 주역 프리마돈나에게 쓰이던 용어를, 최초로 대중음악계에 도입한 이도 바로 휘트니 휴스턴이다. 휘트니 휴스턴이 2020년대까지도 '디바의 원조'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소위 '3대 디바'인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 셀린 디옹의 팬들은 디바 칭호를 두고 끊임없이 치고받아 왔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한 점은 최초라는데 있다. 현대에 와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우아한 롱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고급스러운 발라드를 부르는 뛰어난 가창력의 여가수'를 평론가와 대중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이 휘트니 휴스턴이기 때문이다.
또한 컨템퍼러리 R&B라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장르의 시초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곡 'I Will Always Love You'는 초창기 컨템퍼러리 R&B의 전성기를 견인했던 곡이며, 이 장르의 역사를 짚을 때 빠지지 않고 꼽히는 컨템퍼러리 R&B를 상징하는 곡들 중 하나이다. 또한 이 장르를 상징하는 인물 머라이어 캐리와 함께 90년대 대중음악계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대중음악 최초의 디바답게 휘트니 휴스턴은 현존하는 세계 탑 아티스트들 거의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비욘세, 아델에, 3대 디바로 같이 언급되던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에게까지도 말이다! 아래는 그녀가 영향을 받은 사람과 준 사람들이다.
80년대에 두 사람에 의해서 흑인 뮤지션의 위상이 달라지게 되는데, 남자는 마이클 잭슨 여자는 휘트니 휴스턴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음악성, 가창력, 댄스, 세트와 무대, 뮤직 비디오까지 완벽하게 결합된 '엔터테인먼트' 자체를 상징한다면 휘트니 휴스턴은 압도적인 가창력을 상징한다. 휘트니 휴스턴은 백인 취향으로 여겨졌던 (소위 MOR이라고 하는) 고급스러운 발라드 음악을, 그 어떤 백인 여가수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가창력으로 불러냈다. 아무리 곡을 모방하거나 스타일을 모방한다고 해도 휘트니 휴스턴의 가창력만큼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휘트니 휴스턴 자신이 I Will Always Love You를 리메이크하면서 그 누구도 자신을 모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휘트니의 예술성과 영향력을 볼 수 있는 가장 단적인 예인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 제창. 이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레전설 중의 레전설로 유명하다. 휘트니 휴스턴이 이 노래를 부른 뒤부터 국가를 부를 수 있는 모든 여가수들은 무조건 휘트니의 버전을 참고한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로는 빌보드 Hot 100 6위로 치고 올라가기도 했다.
91년 2월 열린 제25회 슈퍼볼에서 제창한 이 국가는 휘트니 이후 대형 이벤트에서 불리는 국가 스타일 그 자체를 바꿔 놓았다. 이 버전을 위해 박자는 기존의 3/4 박자에서 4/4 박자로 편곡해 한음 한음 곱씹어 부를 수 있게 바뀌었고, 대대적인 가스펠 풍 편곡이 가미됐으며 하이라이트 부분인 "free" 부분에서 가성 애드립을 처음으로 선보인 곡이다. 이 노래가 나온 뒤부터 대형 행사에 등장한 미국 국가에서 이 애드립이 빠진 적이 거의 없다. 곡이 대중에게 인식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
립싱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공식 발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변인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립싱크였음을 인정한 바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라이브 느낌을 낸 '사전 녹음'. 사실 음향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기장에서, 그것도 국가 제창과 같은 중대한 행사의 경우 립싱크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큰 흠이라고 할 것은 못 된다. 다만 92년 당시는 밀리 바닐리의 립싱크 파동 (91) 직후였기 때문에 립싱크에 대한 미국 여론이 살기등등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밀리 바닐리야 다른 보컬이 녹음한 앨범으로 립싱크만 한 것이라 문제가 되었지만 휘트니의 경우는 사전 녹음이라도 본인이 직접 녹음한 것이고 이후 공연을 통해 실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란 것을 증명해 보였다.
역대 슈퍼볼 국가를 제창하면서 츄리닝에 머리띠만을 두르고 나온 유일한 사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미국 국가는 가사에 서린 인종 차별과 노예 제도의 이미지 때문에 흑인에게 꺼려지는 노래였다. 그런데 가장 보배와도 같은 흑인 디바가 미국을 대표해 이 곡을 부름으로써 흑인이 국가를 부르는게 자랑스러워지는 효과를 낸 것이다.
본인이 차별 철폐 운동에 참여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엄청난 성공은 흑인 사회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보수적인 80년대 사회상에도 불구하고 MTV에선 휘트니의 뮤직비디오가 주구장장 나와댔고, 이런 성공은 미국 뿐만이 아닌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휘트니가 모든 가수들을 통틀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것만으로도 흑인들에 대한 업계 대우는 달라졌다.
다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인권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는 의견과 달리, 휘트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가수 데뷔 전 모델 활동 시기에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펼치던 남아공과 거래하는 에이전시와는 계약을 하지 않았다. 988년 6월 11일, Moment of Truth World Tour 유럽 일정 중에는 다른 음악인들과 함께 당시 투옥 중이었던 넬슨 만델라의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 참여했다. 72,000명 이상의 관중들이 입장한 이 콘서트는 전 세계에서 1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청했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며 100만 달러 이상이 모금된 거대한 행사였다. 그 해 8월에는 뉴옥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흑인연합장학재단(United Negro College Fund)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 2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94년 10월, 휴스턴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남아공에서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의 미국 방문을 기념하는 만찬에 참석하여 "Love's in Need of Love Today", "People", "Greatest Love of All" 과 같은 곡들을 불렀다. 또한 1994년 11월,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선출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공의 세 개 도시에서 Whitney - The Concert for a New South Africa로 이름 붙여진 세 번의 콘서트를 개최하며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휴스턴은 만델라의 선출 이후 새롭게 통합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한 첫 번째 주요 뮤지션이었고, 이 공연은 만델라 취임식 이후 가장 크게 펼쳐진 미디어 행사로 간주되었다. 세 번의 공연 가운데 11월 12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치뤄진 콘서트는 HBO를 통해 생중계되었고, 공연 수익은 모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자선 활동을 위해 기부되었다.
1990년대를 살았다면 다른 곡은 몰라도 I Will Always Love You는 다들 알 것이다. 휘트니의 대표곡 I Will Always Love You는 본인의 주연작 보디가드 OST로 널리 알려졌으며, 워낙 유명한지라 한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패러디된다.
1985년에 발매된 《Whitney Houston》의 여섯 번째 싱글이자 네 번째로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한 곡이며, 휘트니 휴스턴의 세번째 빌보드 핫 100 1위 곡이다. 조지 벤슨의 곡을 커버했다.
언급된 것처럼, 휘트니 휴스턴의 3번째 빌보드 핫 100 1위곡이다. 또한 I Will Always Love You가 발매 되기 전까지 휘트니 휴스턴의 곡 중 가장 오래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한 곡 이었으며, 미국 내에서만 100만 장이 팔려 RIAA로부터 1×플래티넘 인증을 받는 등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작품성도 인정받아 1987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레코드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수상은 아깝게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