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환 작가
몇 해 전부터 선보일 때마다 높은 인기를 자랑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1990년대 청춘 스타들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 기억에서 잊혀진 가수들을 재소환하는 음악 프로그램, 그리고 변상환 작가의 작품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복고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는 것도 틀리진 않다. 조금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풀어보자면 ‘아직 현재에 존재하지만 잊혀 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길가에 버려진 자개장이나, 적색 벽돌로 지어진 주택가의 코너스톤, 단독주택의 옥상 하면 누구나 떠올릴 ‘녹색 방수페인트’ 같은 것들은 지금,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다분히 가까운 과거의 한국을 대표하는 풍경들이다. 생각 외로 이런 풍경은 주변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니 쉽사리 보이지 않는 것일 뿐.
변상환 작가는 이를 ‘아슬아슬하게 동시대에 걸쳐 있는’ 것들이라 표현한다. 또한 누구도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치지만 그것에는 저마다의 이야기와 충분한 존재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변상환의 눈에 띈 ‘잊혀 가는 가까운 과거의 사물들’은 다채로운 조각의 형식을 빌려 현재로 소환된다. 그리고 소환된 낡은 것들은 마치 거울처럼 한국 사회의 특징적인 감성들을 비춰내고, 또한 조각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저는 사물을 다루고 관찰하는 작가입니다.”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지만 정확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자기소개가 또 있을까 생각했다. 변상환 작가는 조각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 세계를 조각이라는 글자에 묶어두지 않았다. 흔히 조각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고정관념이 있게 마련인데, 이런 자기소개를 마주하고 보니 단순히 그의 조각 작품은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가 다루고 관찰한다는 ‘사물’들이 무엇인지, 그것으로 구축해나가는 그의 작업 이야기는 어떠한지가 더 궁금해졌다.
“통상적으로 익숙하게, 자주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물 중에서 유난히 동시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것들이 있어요. 한국적 감성을 가진 사물들이라 생각하는데요. 저는 그런 사물들에 유난히 눈길이 더 가는 편이에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소재로 작업하게 되죠.”
변상환 작가의 초기 작품을 보면 1980~1990년대 어느 집에나 한두 개쯤은 있었을 자개로 된 가구라든지, 진분홍색으로 대표되는 고무장갑, 여름철 무더위에 유난히 찾게 되는 ‘쭈쭈바’ 아이스크림, 밥 도둑이라 불리는 간장게장 등이 소재다.
이미지 목록 변상환, [크로커다일(Crocodile)], 2011년Rubber Gloves, Cement, 43x13x9cm | 변상환, [무제(Untitled)], 2011년Freezie, Cement, 12x5x4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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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진행 중인 ‘돌’ 시리즈 작업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사는 낙산 주변 창신동 골목에는 곳곳에 돌들이 널려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방해물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돌들을 변상환은 새롭게 바라본다. 역사의 관찰자라는 관점이었다. 이 돌에 거울로 자연광을 반사해 조명을 주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작품화했다. 그리고 돌이 위치한 주소를 작품명으로 정해 그 의미를 더욱 강하게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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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상환, [대사관로 30가길 36(Daesagwan-ro 30ga-gil 36)], 2015년Mirror Reflected Light, Inkjet Print, 59.4x84.1cm 2 변상환, [창신8길 32(2)(Changsin 8-gil 32(2)], 2015년Mirror Reflected Light, Inkjet Print, 59.4x84.1cm |
변상환은 이렇게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가구를 주워와 새롭게 만든다거나, 상하거나 변하기 쉬운 소재들을 시멘트로 캐스팅(주물)해 화석처럼 불변의 존재로 치환했다. 그가 사는 창신동 골목의 돌덩어리들은 한 컷의 사진으로 재조명해 ‘창신동’ 역사의 산물로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런 그의 작업을 통해 잊힐 뻔했던 그 물건에 담긴 각각의 의미와 이야기들, 나아가 그런 의미가 모여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한 역사적 단면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상과 추상, 친수와 방수, 형식의 충돌에 주목하다
올해 초, 그의 첫 개인전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에서도 여전히 이런 소재가 활용됐다. 전형적인 한국 주택 옥상의 녹색 방수페인트라든지, 이제는 있는지도 모를 뒷산 약수터의 바가지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보다 형식적인 면에 집중했고, 재료의 형식이나 미술적 개념들이 충돌하는 지점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여냈다.
한국 주택의 옥상을 보면 대부분 인공의 녹색 방수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여기에 작가는 물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플로랄폼을 함께 활용해 방수와 친수의 충돌을 보여준다. “물에 뜨는 조각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 한 마디로 그의 시도는 충분히 설명된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의 형태는 언뜻 그 용도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형태이지만 바가지의 손잡이 끝부분, 낙산의 돌이나 석기시대 초콜릿과 같이 실제 존재하는 사물의 파편을 응용, 구체적인 재현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구상과 추상이라는 개념의 충돌을 보여준다.
변상환, [맥스라이프(Maxlife), 용기(Courage)], 2016년Floral Foam, Roof Waterproof Paint, 84.5x110cm, 59x120cm
변상환 작가의 개인전이 흥미로울 수 있었던 것은 비단 형식의 충돌이라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조각을 선보이는 것 이상으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일 터다. 작가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도 있지만, 작품을 통해 관객 스스로가 상상의 이야기 만들어갈 수 있도록 연출에도 신경을 썼다.
“이 작업을 하면서 노아의 방주를 생각했어요. 엄청난 비가 내려 세상이 물에 잠기고, 노아는 방주에서 가족과 동물과 살아남아 표류하잖아요. 제 작업의 과정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이 전시가 끝나고 엄청난 비가 내려 세상이 잠기게 되면 나는 내가 만든 이 녹색의 조각들을 타고 표류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요. 그래서 전시장에도 모래를 깔고 약간 언덕이나 해변 같은 곳에 초록색 조각들이 표류해 있는, 뗏목이 정박한 느낌으로 연출했어요.”
그뿐만이 아니라 개개의 작품들이 가진 아이러니한 의미들도 주목할 만하다.
“흔히 사용하는 바가지의 손잡이 고리 부분을 확대해 조각한 [용기(Courage)]는 바가지 밑면에 쓰인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에서 따온 제목이에요. 그걸 처음 봤을 때 바가지임에도 그릇이라는 의미의 용기는 생각지 못하고 ‘Courage’의 용기로 생각해 이게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한참을 생각했거든요.”
플로랄폼을 엮어 한 평 크기의 뗏목으로 만든 [맥스라이프(Maxlife)]의 의미 또한 생각거리를 던진다. “손바닥만 한 플로랄폼에 적힌 문구였어요. 식물이 충분히 잘 자랄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였죠. 그게 마치 최대치의 삶을 위한 최소한의 파편같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두 번째 개인전 [서늘한 평화, 차분한 상륙]은 앞선 전시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노아의 방주처럼 표류하다가 착륙한 이후의 이야기를 변상환만의 실험적 방식으로 담아냈다. 이렇게 그간의 작업과 두 번의 개인전을 통해 변상환이 보여준 것은 그저 깎고 다듬고 칠한 결과물로서의 조각이 아닌, 형태 자체로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조각의 모습이었다. 이런 형식적인 충돌과 스토리를 상상하게 하는 연출 등은 작가가 비단 소재나 재료만이 아닌 조각가로서 조각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각이라는 전통적 매체에 대한 관심이 커요. 반드시 깎아내고 칠하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만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조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형식적인 실험을 당분간은 계속해나갈 거예요. 전에 없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조각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죠.”
여느 젊은 작가들처럼 매체에 경계를 두지 않고 다채로운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조각 영역을 구축해나가는 조각가 변상환. 그의 다음 실험은 어떤 결과물로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관객 또한 매번 그의 전시가 끝날 때마다 이 젊은 작가의 다음 작품을 자연스레 기다리게 되지 않을까.
글 김희정 / 문화예술기자
지금 활동하는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에게 조소, 즉 돌을 깎거나 흙을 다루거나 나무를 조각하는 것은 학습 단계에서의 과정일 뿐 조각적 덩어리, 부피, 조형 등을 적용하여 입체를 설명하기에는 그 언어 자체가 낡은 요소가 되었다. 이제 막 대학원을 졸업한 변상환 작가 역시도 텍스트적 요소를 강하게 부각시킨다던가, 존재하는 오브제를 화석화 하여 근대적 기억과 잔재의 공시간적 감각을 와해한다던가 하는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작업 속에서 드러나는 세련된 조형 감각은 이 작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지점으로서 여겨졌다.
이후 2015년에 진행된 변상환 작가의 개인전에서는 조형적, 조각적, 무게감, 부피 등의 언어가 강력하게 드러나면서, 초기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과거와 현재의 틈을 내보인 그의 감성을 확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여 부피와 무게가 비례하는 물리적 감각의 반전을 꾀하였고 단어의 이중성을 통한 반전 또한 전시 속에 녹여냈다. 또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 회자된 옥상의 방수페인팅에 대한 시각적인 착오를 빗대어 재료가 가지는 성격, 즉 물을 밀어내는 재료와 물을 흡수하는 재료, 이 두가지 반대 성격의 재료를 통하여 특정 개념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기지도 발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에 놓여진 덩어리들은 순수하게 조각적이고 조형적이다. 이를 둘러싼 환경과 이들의 배치 등 조성된 결과물이 그러하다. 조각이라는 것을 풍부하게 컨텐츠화 할 수 있는 그 지점부터 작가는 현대성을 얻고 있었으나 어쨌든 그가 초기에 다루었던 작업들, 근대의 잔재를 박재하여 역사성의 이면을 재생산하는 일련의 시도들처럼 그의 작업에는 정통의 언어 또한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성향을 바탕으로 그가 가진 세련되고 정교한 감각으로 변상환 작가만의 특수한 관심을 가시화 하는 단계에 있다고 보인다.
추천인 김인선 / 헬로!아티스트 작가선정위원
변상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조형예술과를 수료했다. 2011년부터 [In The City(인더시티)], [Best of Best(베스트 오브 베스트)], [This Plus(디스 플러스)], [굿-즈(Goods)], 개인전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 [서늘한 평화, 차분한 상륙] 다양한 형태의 전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설치전경(installation view), 2012
혼합재료(mixed media), 240x120x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