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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이다.
君 : 임금 군(口/4)
子 : 아들 자(子/0)
不 : 아니 불(一/3)
器 : 그릇 기(口/13)
출전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제12장
군자불기(君子不器)는 유가(儒家)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설명하는 사자성어로,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는 뜻이다. 이는 군자가 특정 기술이나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인격 수양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전인적(全人的) 인물임을 강조한다.
'그릇'은 전문성이나 편협함을 의미하며, 군자는 이를 넘어선 종합적 사고와 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주자(朱子)는 그릇이 특정 용도에만 적합한 반면, 군자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통섭형 인간이라고 설명했다.
분업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 전문가와 함께, 조직을 통합하고 미래를 통찰하는 리더의 역할이 강조된다. 군자는 단순한 전문가가 아닌, 혁신과 거시적 사고를 이끄는 인물로 재해석된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제12장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으로 군자는 한 곳에만 쓰이는 한정된 그릇이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뜻이다. 공자가 한 말로 군자란 그 크기가 물건을 담는 데 불과한 그런 그릇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군자는 아니다. 지식과 아울러서 인격도 동시에 갖추고 덕을 실천하는 참된 인물이 군자인다. 오기와 아집, 편경과 독선을 부리는 그런 편협한 사람은 결코 군자가 아니다. 융통성이 풍부하고 포용력이 많은 인물이 참된 인물인 것이다. 성인군자라고 할 때 성인이나 군자나 모두 참된 인물을 말한다.
군자(君子)는 불기(不器)니라. 논어 제1편 학이편부터 마지막편인 요왈편에 이르기까지 총 20편의 수많은 장의 글 중에 가장 짧은 글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장 위정편 12장인 바로 이 장이다. 단 4자 군자불기(君子不器), 이 짧은 문장에 대한 주자(朱子)의 해석도 짧고 확실하다. “군자는 한 곳에만 쓰는 그릇이 되지 않는다.” 간단하고 명료하다.
간단히 다시 말해 한 가지 한곳에 쓰이는 것은 군자의 재목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그 깊고 깊은 속뜻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엿 볼 수 있다. 무릇 군자(君子)라면 마땅히 그 쓰임새가 넓고도 깊어서 언제 어느 때 무슨 경우의 어떤 쓰임새라도 그 그릇이 풍부하고 깊고 넓어서 도무지 아무것을 담거나 덜어내어도 그 무궁 무진함이 가히 끝이 없음을 뜻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먼저 군자(君子)란 과연 어떤 사람을 일러 가히 군자(君子)라 칭함인지 먼저 알아봐야 그 순서가 맞을 것 같다.
논어 학이편 제1장 끝머리에 이르기를 “人不知而不慍하니 不亦君子乎아!”라 하였고, 논어 학이편 제8장에도 이르기를 “군자가 몸가짐을 무겁게 하지 아니하면 위엄이 없고, 배운다 하더라도 굳지 못할 것이다(子曰, 君子 不重則不威 學則不固). 충과 신을 주로 하며(主忠信), 자기와 같지 아니 한 이와 사귀지 말 것이며(無友不如己者) 허물이 있다면 고치는 것을 꺼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過則勿憚改)”라고 하였다.
그리고 학이편 제14장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군자는 먹는데 배부르기를 구하지 아니하고(子曰,君子 食無求飽), 거처하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고(居無求安), 일에는 민첩하고 말은 신중하고 삼가며(敏於事而愼於言), 도 있는 곳에 반드시 자리하며 (도 없다면) 바르게 한다면(就有道而正焉), 가히 배움을 좋아 한다 할 것이다(可謂好學也已)”고 하였다.
이런 군자에 대한 예(例)를 논어에서 만 하여도 수십 수백의 경우를 들어 말하고 또 말하여 강조하는 바인 것은 이는 군자(君子)가 바로 유가(儒家)에서 기대하고 고대하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화된 전형적인 표상인간(表象人間)을 일러 군자(君子)라 하고 우리 모든 인간은 모두 군자(君子) 되기를 소원하고 또는 그렇게 되어가기를 지상 최대의 목표로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여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길에 있어 그 궁극의 지극한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천하평(天下平)에 이르는 과정도 바로 군자(君子)가 지극한 군자의 도(君子之道)에 이르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바로 그 군자(君子)는 그 그릇됨이 한곳에 쓰이는 그런 그릇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그릇을 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말로 말하면 다원화된 사고방식을 가진 아주 다양한 상식과 지식을 겸비한 깊이 있고 폭 넓은 글로벌 지식인을 일러 말함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오늘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고 최고의 화제로 누구나의 밥상머리에 앉혀져 날이면 날마다 씹히고 있는 청기와집 사는 그 군자(君子)의 이야기가 아님은 확실한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무릇 군자라면 군자의 그릇을 말하는 대인(大人), 즉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대인은 “그 덕이 천지와 같고, 그 밝음은 일월과 같고, 그 차례 됨이 사계절과 같고, 길흉을 내다보니 귀신과 같다(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소원하여 항상 제 자신을 돌아보기를 신중히 하고 침작한 성품을 다시 말해 적어도 할 말과 아니 할 말은 가려할 줄 아는 안목과 처신됨은 가지는 그런 군자를 기대해본다.
그릇이란 일정한 쓰임에 맞도록 만들어졌기에 두루 각처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밥그릇은 밥을 담는 데 쓰이도록 만들어졌고, 접시는 찬을 담는 데 쓰이도록 만들어졌으며, 물동이는 물을 담도록 만들어 졌다. 아무 곳이나 다 쓰일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각자 개개인의 개성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두루두루 쓰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그릇에 비유한 것이다. 마치 사람 신체의 각 부위가 제할 일의 소임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에게 정해진 그릇이 되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군자는 성덕(成德)한 사람을 말한다. 마음이 관유하여 인간사회에 조화롭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을 성덕한 군자라 한다.
공자는 젊은 시절 가난하여 부모 봉양이 힘들자 주살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기도 하였고, 활을 들고 사냥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때를 만나지 못해서는 창고의 출납을 맡은 회계직도 감내하였으며, 때를 만나서는 제후의 초청을 받아 사구(국무총리격)벼슬도 지냈다.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두고서 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일재일예(一材一藝)에 국한되여 쓰여 지는 그릇이 되지 말라고 하였다.
예컨대 서울 모대학 교수는 오직 학문과 학교 통학길밖에 모르고 살다가 부인이 죽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역시 이승만대통령시절 농림부장관은 농민출신이 적합하다 하여 함평출신을 기용하였는데 취임 삼 일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고 한다. 다들 정해진 국량(局量)들이 아닌가 한다.
스승은 그릇이요 제자는 물이라는 말이 있다. 가변적인 물이라는 제자는 스승의 그릇이 어떤 그릇이냐에 따라서 그 형태가 결정된다. 즉 스승의 인격은 바로 제자의 인격이라는 말이다. 바다보다 넓고 깊으며 하늘보다 높고 높은 측량할 수 없는 창조주의 그릇! 그 큰 그릇 아닌 그릇으로 이 땅에 나타나신 성인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그릇은 과연 어떤 그릇일까?
참으로 위대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역사의 스승들은 인간들에게 스승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도장은 판대로 찍히고 사진은 생긴 대로 찍히듯이 사람도 그 생긴 대로 쓰여진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쓰여짐이 좌우된다. 지도자는 따르는 자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자신을 만들라”고 하늘은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어떤 그릇으로 만들 것인가?
그 시대의 성인은 인류사에 필요한 그릇으로 오셨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 역시 이 민족사와 세계사에 필요한 그릇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밥상도 정치판도 작은 그릇이 많으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깨지는 일이 있다. 큰 그릇이 많으면 무겁고 소리가 없다. 큰 그릇은 다름아닌 천명을 깨달아 역사의 주인정신을 가지고 실천적 시대의식에 투철한 사람일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뜻을 깊이 음미해 보고 싶다. 논어 위정편 12장에 이런 말이 있다. "子曰 君子不器(자왈 군자불기)" 공자의 말 중에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말이다. 한마디로 군자는 ‘器’가 아니라는 말이다. ‘器’에는 그릇, 기구, 도량이라는 뜻이 있다. 이에 대한 번역은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가 가장 많다. 이 번역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해석이다. 이 말은 주로 ‘군자는 어느 한 가지 용도로만 사용되는 그릇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군자는 전문가가 아니다’, ‘군자는 쓸모를 뛰어넘은 존재이다’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모두 군자의 용도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器’가 가지는 그릇이라는 뜻과 기구를 적절히 혼용하여 해석한 것이다. 그러한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뜻이 분명히 다른 두 의미를 혼용하여 해석해야 뜻이 통한다면 언어의 명료성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이 공자의 말을 모호하게 옮겨놓았다는 혐의가 없다면, 짧고도 분명한 언어를 사용했던 말의 달인이었던 공자의 위상이 의심스러워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공자가 군자의 용도를 문제삼고, 그 쓸모없음을 지적하고자 했다면 ‘用’을 사용하여 ‘군자무용(君子無用)’이라 썼어야 옳았을 것이다.
설사 그릇을 한가지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에 대한 비유로 썼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한 가지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그릇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이 한 가지 용도로만 쓰인다는 전제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설사 그것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한가지 용도로만 쓰이는 물건 중에 왜 하필 그릇이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해석은 이런 이유들 때문에 조악하다는 혐의를 벗기가 힘들다.
그러면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공자는 그릇이 가진 본래의 기능을 비유해 표현한 것이다. 그릇의 본래의 기능이란 상식대로 무엇을 담는 것이다. 즉 군자는 무엇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말이다. 매우 포괄적인 함의를 공자는 이 짧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릇에 담기는 내용은 절대화된 가치이다. 그 그릇에 담기는 것은 부귀, 명예, 종교, 선악에 대한 판단, 미에 대한 판단, 사상 등이다.
그릇에 담지 말라는 것은 이러한 가치 판단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확고한 형태의 진리로 품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가치를 진리의 형태로 품으면 반드시 도그마에 빠지게 마련이다. 돈만이 최상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을 그릇에 담은 것이다. 그런 사람은 돈의 가치만 중시하여, 다른 모든 가치를 그에 종속시켜 버린다.
공자는 신념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느슨한 신념, 열린 신념을 갖으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공자의 ‘仁’은 만물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지, 그 사상을 절대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성인의 모습과 자유로운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을 두루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떠한 틀(그릇)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학업에는 전공이 있다. 고등학교의 교과는 이과와 문과로 나뉜다. 그 뒤로 이과와 문과에 따라 대학 학과의 진학이 달라진다. 이렇게 학업의 전공이 나뉘게 되면 다른 전공에 관심을 둘 여력도 없거니와 관심을 두려고 해도 어려워서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생업에도 사람마다 잘 하는 분야가 있다. 장사에 뛰어난 사람이 있고, 영업이라면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 있다.
인생에는 학업이나 생업처럼 전공과 분야가 따로 없다. 학업과 생업의 이력이 인생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학업과 생업에 따라 다를 순 없다. 삶과 죽음은 사람에게 공통된 특성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이 인생을 잘 살고 행복을 느끼려면 학업과 생업을 떠난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만하다.
군자는 자신의 삶을 최적으로 조직하여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세상을 가꾸려는 사람이다. 이러한 군자가 특정한 분야에 뛰어나고 다른 분야에 엉망이라면, 그 삶이 위태롭게 된다.
그릇 이야기
요즘도 '그릇'을 사용하여 사람의 능력과 국량(局量)을 말한다. “저 사람의 그릇이 크다” “OOO의 그릇은 좁쌀만큼 작다” 등등이 그러한 용례이다.
사실 공자는 이러한 용례를 즐겨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제(齊)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들어서 춘추시대가 낳은 최고의 영웅 중의 한 사람인 관중(管仲)을 두고 “관중의 그릇이 작다(管仲之器小哉!)”라고 말했다. 관중은 재상(宰相)을 맡으면서 관직의 겸직을 허용하지 않아 재정 낭비를 방치하고 자신이 왕인 양 온갖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군자를 그릇이 큰 사람(君子之器大)으로 설명하면 될 터인데 왜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그릇이라는 말 자체에 주목해야 봐야 한다. 공자는 ‘위령공’ 10장에서 그릇을 생업과 연관시켜서 사용하고 있다. “기술자는 자신의 맡은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먼저 연장을 날카롭게 길을 낸다(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이 말에 따르면 그릇은 생업을 할 때 사용하는 도구, 연장 등을 가리킨다. 즉 그릇은 특정한 용도에만 한정해서 쓰이는 도구를 말한다. 그릇이 도구라는 한정된 의미를 나타낼 때 군자와 그릇의 조합은 어울리지 않는다. 군자는 특정한 직종에 속해서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자는 빵을 만드는 제빵사, 자장면을 맛있게 내놓는 요리사,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짓는 농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다. 군자는 제빵사, 요리사, 농부, 어부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 직종을 떠나서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삶의 문제에 대해 조언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군자는 빵을 만들 수 없고 요리를 할 줄 모르고 땅을 갈 수도 없으며 배를 몰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군자는 사람들이 겪으면서 힘들어하고 모든 사람들이 겪는 난관을 뚫어낼 수 있는 길을 찾는 사람이다. 공자는 바로 군자의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켜서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말은 군자는 특정한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반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다 보니 '군자불기(君子不器)'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가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그릇에 비유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공야장’ 4장에서 제자 자공은 공자의 평가를 통해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었다. 그릇을 두고 벌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자.
자공 : 저는 어떤 정도의 사람입니까(賜也何如)? 공자 : 자네는 그릇이라네(女器也). 자공 : 무슨 그릇 말입니까(何器也)? 공자 : 제사에 쓰이는 호련 그릇이라네(瑚璉也).
아마 자공은 '군자불기'라는 말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서 깜짝 놀랐을 것이다. 공자가 느닷없이 “자네는 그릇이다”라고 말하여 자신이 군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침착한 자공은 토라지지 않고 재차 “그릇이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무슨 그릇을 말하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자공을 제사 의식에 쓰이는 그릇으로 말하면서 이야기가 끝나고 있다.
제사용 그릇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실용적으로 쓸 수가 없다. 호련(瑚璉)은 곡식을 담아 신께 바치던 제사용 그릇으로 하(夏)나라에서는 '호(瑚)'라 하고 은(殷)나라에서는 '련(璉)'이라 했다. 호련은 그릇의 꼴을 하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그릇의 실제적인 기능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공자는 자공을 특정한 용도에 쓰이는 현실의 그릇이 아니라 삶을 유의미한 형식이 되도록 하는 ‘그릇의 그릇’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로써 자공은 다시 불기(不器)의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체를 향한 분투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군자가 나아갈 특성을 잘 나타내는 구절이다. 군자는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의 답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보편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누군가 “그러니까 군자가 오늘날 바람직한 인간상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군자가 구체적인 현실을 모르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은 요즘에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라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도 했고 공자의 동시대 사람들도 했던 말이다. 번지가 ‘자로’ 4장에서 공자에게 농사짓는 법과 채소를 기르는 법을 물었다. 공자는 자신이 경험이 많은 농부보다 못한다고 말하고 나서 자신의 학교에서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공자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농사짓는 기술을 익히느라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삶의 질서를 갖추게 하고 올바른 정도를 세우기 위해 학문을 닦고 있다고 생각했다. 번지가 갑작스레 농사를 운운하니 공자는 그가 자신의 학문적 방향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비판한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홍대용(洪大容)은 공자가 농사를 묻는 제자 번지를 나무라는 구절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식위천(以食爲天)'이란 말처럼 농사는 사람이 먹고 사는 기반 산업이다. 농사를 제대로 짓지 않으면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학문은 농사와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홍대용은 농사를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는 공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자가 번지와 대화에서 농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학문 방향을 밝히려다 보니 농사를 물은 번지에게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반면 홍대용은 18세기에 가난과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을 위해 '많은 수확을 가능하게 하는 농법'을 찾아야만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공자가 농사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미자 7장을 보면 당시 정치 현실을 피해 산에 살던 은자가 공자를 비판하며 “팔다리를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먹고사는 오곡조차 구분하지 못한다(四體不勤, 五穀不分)”라고 말했다. 은자는 공자가 먹고사는 곡식을 제대로 모르면서 인의(仁義)와 같은 추상적인 도덕을 설파한다며 비꼬고 있는 것이다. 인의는 먹을 수 없고 생명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곡식은 먹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실용성만을 기준으로 학문과 인생의 가치를 말하게 되면, 사람의 활동 중에 많은 것이 자취를 감춰야 한다.
19세기 말에 축음기와 영사기가 발명되었을 때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그 기술을 사장시켰다면, 오늘날 가장 각광 받는 대중 예술로서 영화가 탄생하지 못햇을 것이다. 또 오늘날 흥행이 되지 않는다고 기록 영화, 실험 영화 등이 제작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번 비슷한 영화만을 보게 될 것이다.
실용성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영화, 무용, 음악, 미술 등의 예술과 문학, 역사, 철학 등의 인문학 중 아주 일부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인문학과 예술은 특정한 분야로 한정되는 분야가 아니라 전체를 볼 수는 안목과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힘을 길러준다. 우리는 전체를 보며 부분을 열심히 살아야 자신이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나는 10여 년 동안 계속해서 교양 강의에서 ‘유서 쓰기’ 과제를 내고 있다. 죽음은 어쩔 수 있는 나의 삶을 전체로 바라보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요일에 따라 강의를 듣고 취업 준비하느라 자신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유서를 쓰면 ‘내’가 무엇을 향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처음에 “젊은 나이에 유서를 쓰다니!”라며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취지를 이해하고 나서는 진지하게 유서를 작성해서 과제로 낸다. 유서를 읽다 보면 젊음의 고민도 이해하고 무엇을 하고자 하고 무엇을 의미있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계속 유서 쓰기의 과제를 내려고 한다.
120세 사회의 출현과 군자불기
현대인은 고대인에 비해 평균 수명이 크게 늘었다. 건강 관리를 잘 하면 사람이 120세까지 살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60세라도 ‘노인’ 대접 받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노인의 연령을 65세에서 70세로 상향 조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옛날에 70세를 먹기가 힘들다는 뜻에서 고희(古稀)라고 했지만 지금 70세가 기본인 사회가 되고 있다.
이렇게 초고령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군자불기'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기대 수명이 늘어난 만큼 사람은 여러 가지 특정한 기술을 익혀서 은퇴 이후에도 먹고 살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기술보다는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을 갖춰서 미래의 삶을 항해할 수 있는 기준을 가져야 할까?
오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변화와 곡절이 생길 가능성이 그만큼 늘어난다. 변화를 맞이했을 때 사람은 숙고를 통해 합리적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이때 그 판단이 적절하면 이후의 삶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부적절하면 이후의 삶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판단의 중요성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다. 좋은 판단을 할 수 있으면 그 상황에 맞는 가장 적실한 방안을 찾아낼 수가 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더 부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120세의 사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자신의 삶을 덜 후회하고 더 의미 있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자세가 더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군자불기'는 짧은 시간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서 지속되는 항해를 목적지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지혜를 가지라는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군자불기(君子不器)
어떤 큰 직분과 권력을 담은 사람이, 그 직분과 권력의 크기보다 작은 그릇일 때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그릇은 작고 담은 것이 클 때, 그릇은 출렁거리고 넘치기 마련이다. 자주 우리는, 그릇보다 많은 것을 담은 인간의 비극과 우행과 혼란을 목도한다.
불기(不器)는 대기(大器)와 전혀 다르다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는 여전히 오해가 난무하는 말이다. '군자는 그릇으로 잴 수 없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군자는 큰 그릇이다'와 같은 풀이가 그것이다. 그럴 듯 하지만, 불기(不器)가 그런 뜻으로 쓰일 수 있는가. 그래서 군자는 어떻다는 것인가. 큰 그릇이라면 대기(大器)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아리송하게 말했을까.
우선 불(不)은 비(非)나 무(無)와는 다른 부정적 수식이라, 성격이나 행동을 가리키는 말 앞에 쓸 수는 있어도, 사물이나 대상을 바로 가리키는 말에는 쓰이는 일이 드물다. '그릇이 아니다'라면 비기(非器)가 적절하고, '그릇이 없다'면 무기(無器)면 족하다. 불기(不器)에서 뒷말인 '기(器)'는 단순히 사물로서의 그릇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릇'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허실생백은, 허공의 효용을 말했다
우선 그릇에 대한 성찰이 진리를 깨닫는 방편이 된 경우는 노장(老莊)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허공이 무슨 효용이 있느냐는 생각에 반격을 한 것이 그릇이나 방의 비유다. 그릇은 그릇을 이루는 테두리나 바닥 때문에 존재하지만, 그 안의 허공이 없으면 그릇을 그릇으로 쓸 수 없다. 방 또한 마찬가지다. 방은 바닥과 천장과 벽과 문으로 이뤄져 있지만, 그 안에 허공 즉 허실(虛室)이 없다면 쓸모가 없다. 허실이 쓸모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허실생백(虛實生白)이다.
인간이 그릇이라면, 그릇 속에는 그릇만큼의 무엇이 담길 수 밖에 없다. 그릇이 크면 그 큰 용량만큼을 담는다는 뜻이지 무한하게 담는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릇이라면, 그릇 속에는 그릇만큼의 무엇이 담길 수 밖에 없다. 그릇이 크면 그 큰 용량만큼을 담는다는 뜻이지 무한하게 담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릇노릇을 하지 않는다
불기(不器)는, 허공을 가둬 그릇의 효용을 만들어내는 그 그릇의 테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릇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릇노릇은 그릇의 본질이며 그릇을 그릇이게 하는 가둠의 형상과 크기를 이루는 것이다.
그릇의 테두리는 그릇의 효용을 만들어내지만, 하나의 그릇은 그 테두리만큼의 효용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며 그 형상과 크기를 벗어나면 사용할 수 없다. 인간이 그릇이라면, 그릇 속에는 그릇만큼의 무엇이 담길 수 밖에 없다. 그릇이 크면 그 큰 용량만큼을 담는다는 뜻이지 무한하게 담는다는 것이 아니다.
큰 그릇도 그릇일 뿐이다
세상은 '큰 그릇'을 자랑하고, '뛰어난 그릇'을 칭찬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릇의 성질을 벗어날 수 없는 '그릇'일 뿐이다. 큰 그릇과 뛰어난 그릇도, 훌륭하다 할 수는 있지만, 그 또한 그 그릇일 뿐이기에 그릇이 지닌 한계와 약점을 노출할 수 밖에 없다.
공자가 말한, 그릇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은 군자는 어떤 존재인가. 크게 보면 신같은 존재이다. 신은 어떤 그릇으로 구획하지도 가두지도 않지만 모든 것을 담는다. 스스로 어떤 그릇을 정하지 않으며, 우주 만물에게 그 무한을 담아준다. 그것을 담아내기 위해, 만물이 스스로 그릇을 만들 뿐이다.
저 말의 효용은, 정해지지 않은 무형과 무한의 그릇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그릇에 가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는 충고에 있다. 큰 그릇을 지닌 인간은 큰 일을 맡을 수 있지만, 그 큰 일이 그릇을 벗어나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릇보다 큰 권력은 얼마나 촐랑거리는가
어떤 큰 직분과 권력을 담은 사람이, 그 직분과 권력의 크기보다 작은 그릇일 때 얼마나 위험해지는지를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그릇은 작고 담은 것이 클 때, 그릇은 출렁거리고 넘치기 마련이다. 자주 우리는, 그릇보다 많은 것을 담은 인간의 비극과 우행과 혼란을 목도한다.
공자가 말한 것은, 큰 그릇 또한 모든 것을 담기에는 위험하니 그릇 자체를 한정하지 않는 조물주의 지혜를 배우라는 것이다. 스스로 크다고 여긴 그릇 또한, 현실에 나서서는 옹졸해지고 비좁아지고 스스로도 몰랐던 작은 그릇의 성질이 나와 일을 그르치기 쉽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문득 권력을 거머쥔 것, 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 손에 돈을 좀 쥐게 된 것을 으쓱이며, 함부로 날뛰는 '작은 그릇'들의 촐랑거림과 위태함을 반면교사 삼으라는 말이다.
넘치는 그릇을 경계하라
공자가 굳이 이런 얘기를 짧고 강렬하게 한 내막에 대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더 공부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심기를 읽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고의 진리를 터득할 만한 열쇠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넘치는 그릇'들을 경계하는 뜻을 키우는 것. 이 한 마디만으로도, 평생의 우행을 많이 줄일 수 있다는 '공자의 팁'을 귀에 담기만 하면 된다.
군자불기(君子不器)
子曰 君子不器(자왈 군자불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그릇처럼 고정된 삶을 살지 않는다." (논어 위정 12장)
공자가 공부를 통해서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경지가 군자였다. 논어 첫머리에서 공자는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면 군자(논어 학이)"라고 하였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데 화를 안 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군자는 "자기보다 수준 낮은 사람을 친구하지 않으며 잘못을 하면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논어 학이)"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을 친구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고, 잘못을 하면 고치기 보다는 변명하기에 바쁘다.
이상 공자가 말하는 군자는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기에는 힘든 면이 많다.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은 공부인의 도리가 아니다. 군자가 되는 그날까지 노력하는 게 공부인의 할 일이다. 그래서 공자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군자상을 말하고 있다. 군자는 "그릇처럼 고정된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릇은 정해진 쓰임새가 있다. 밥그릇은 밥을 담아야 어울리고, 차그릇은 차를 담아야 어울리고, 국그릇은 국을 담아야 어울린다. 그릇의 용도에 맞지 않는 것을 담으면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색하다는 것이다. 행동이나 말이 상황에 맞지 않고 어색하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못되게 하지 않고 멋지게 이루어내려면 말과 행동이 상황에 잘 맞아야 한다.
공자는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일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인격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군자라고 하고, 군자는 그릇처럼 주어진 상황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완성해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될까? 공자는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 번째로 배운 것은 반드시 생각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배우기만 하고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되는 게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생각을 하는 것도 너무 깊이 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배운 것을 생각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해가 안 되면 그만두고 또 다른 것을 배워서 생각하라고 하였다. 이것을 공자는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하였다. 위태롭다는 것은 생각만 줄기차게 하다가 엉뚱한 길로 가버리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정)
두 번째는 네 가지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네 가지는 의(意: 사사로운 생각) 필(必: 반드시 해야됨) 고(固: 고집) 아(我: 이기심)이다. 예를 들면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값이 많이 나가는 자동차를 보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소유하고 싶은 사사로운 생각이 생기고, 다음으로 반드시 소유하고 싶고, 그 사사로운 생각이 더욱 견고해지고, 마지막으로 벌써 자기 것이 되어 있다. 물론 능력이 되면 전혀 문제가 없지만 능력이 되지 않는데 방금 말한 일이 발생하면 자기만 괴롭게 된다. 이런 괴로움을 받지 않으려면 값이 많이 나가는 자동차를 보는 순간 바로 소유하고 싶은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논어 자한)
공자는 자신이 어떻게 공부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섭공이 자로에게 자네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하자 자로가 대답을 못했는데 공자는 자신을 설명하기를 '공부하다가 분발하면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공부가 즐거워 걱정도 잊어버려서 나이 먹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라고 하였다. (논어 술이)
공자는 또한 ‘주이불비(周而不比)’, 즉 ‘원만하지만 붕당을 이루지 않는(논어 위정)사람이 군자라고 했다. ’주(周)‘는 도의(道義)를 통해 사람을 모으는 것으로 뒤에 나오는 ’비(比)‘와 상대적인 개념이다. 비는 붕당이고 작은 집단이며 작은 종파다. 무리에 섞이되 파벌을 만들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존재가 공자가 말하는 군자이다.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혀야 욕망을 합리화하는 자기 안의 작은 그릇을 없앨 수 있으며, 또한 격식이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렇다면 그릇이 크고 작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릇이 아무리 크다 한들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가두는 틀을 부수며 편협 되지 않고 두루 섭렵하는 융통성과 포용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 君(임금 군)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은 손에 무엇인가를 갖는 모양으로 천하를 다스리다는 뜻과, 口(구)는 입으로 말, 기도하다의 뜻의 합(合)으로, 君(군)은 하늘에 기도하여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君자는 '임금'이나 '영주', '군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君자는 尹(다스릴 윤)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尹자는 권력을 상징하던 지휘봉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직책이 높은 사람을 뜻하는 尹자에 口자가 결합한 君자는 군주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君(군)은 (1)친구나 손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에 그 성이나 이름 아래에 붙여 쓰는 말 (2)조선시대, 고려 때, 서자(庶子) 출신인 왕자나 가까운 종친이나 공로가 있는 산하(傘下)에게 주던 작위(爵位). 고려 때는 종1품(從一品), 조선시대 때는 정1품(正一品)에서 종2품(從二品)까지였으며, 왕위(王位)에 있다가도 쫓겨나게 되면 군으로 강칭(降稱)되었음. 이를테면,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 등이다. 이와같은 뜻으로 ①임금, 영주(領主) ②남편(男便) ③부모(父母) ④아내 ⑤군자(君子) ⑥어진 이, 현자(賢者) ⑦조상(祖上)의 경칭(敬稱) ⑧그대, 자네 ⑨봉작(封爵) ⑩군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백성 민(民), 신하 신(臣)이다. 용례로는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을 군주(君主),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를 군국(君國), 임금의 명령을 군령(君令), 임금의 자리를 군위(君位),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군자(君子), 처방에 가장 주되는 약을 군제(君劑), 임금의 총애를 군총(君寵), 임금의 덕을 군덕(君德), 임금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를 군도(君道),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군림(君臨), 임금과 신하를 군신(君臣),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군(家君), 엄하게 길러 주는 어버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자기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을 엄군(嚴君), 남의 남편의 높임말을 부군(夫君), 남의 부인의 높임말을 내군(內君), 거룩한 임금을 성군(聖君), 어진 임금을 인군(仁君), 재상을 달리 일컫는 말을 상군(相君), 임금께 충성을 다함을 충군(忠君), 포악한 군주를 폭군(暴君),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됨을 득군(得君), 덕행을 베푸는 어진 임금을 현군(賢君),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첫째는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둘째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자삼락(君子三樂), 임금과 신하와 물과 물고기란 뜻으로 떨어질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 말을 군신수어(君臣水魚), 임금은 그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똑같다는 말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큰 의리를 일컫는 말을 군신대의(君臣大義),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는 말을 군자무본(君子務本), 군자는 큰길을 택해서 간다는 뜻으로 군자는 숨어서 일을 도모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옳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말을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을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는 뜻으로 가을에 새로 나는 표범의 털이 아름답듯이 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아주 빠르고 뚜렷하며 선으로 옮겨가는 행위가 빛난다는 군자표변(君子豹變),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아서 백성은 모두 그 풍화를 입는다는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을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욕신사(君辱臣死) 등에 쓰인다.
▶️ 子(아들 자)는 ❶상형문자로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들을 뜻한다. 지금의 子(자)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글자가 합쳐져 하나가 된 듯하다. 지지(地支)의 첫째인 子와 지지(地支)의 여섯째인 巳(사)와 자손의 뜻이나 사람의 신분이나 호칭 따위에 쓰인 子가 합침이다. 음(音)을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첫째 글자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子자는 ‘아들’이나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子자는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양팔과 머리만이 그려져 있다. 고대에는 子자가 ‘아이’나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중국이 부계사회로 전환된 이후부터는 ‘남자아이’를 뜻하게 되었고 후에 ‘자식’이나 ‘사람’, ‘당신’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子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아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子(자)는 (1)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 (2)신문(新聞), 잡지(雜誌) 따위 간행물(刊行物)의 어느 난을 맡은 기자(記者)가 자칭(自稱)할 때 쓰는 말 (3)십이지(十二支)의 첫째 쥐를 상징함 (4)자방(子方) (5)자시(子時) (6)글체에서, 그대의 뜻으로 쓰이는 구투(舊套) (7)글체에서, 아들의 뜻으로 쓰이는 말 (8)민법상에 있어서는 적출자(嫡出子), 서자(庶子), 사생자, 양자(養子)의 통틀어 일컬음 (9)공자(孔子)의 높임말 (10)성도(聖道)를 전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사람의 높임말, 또는 그 사람들이 자기의 학설을 말한 책 (11)자작(子爵) 등의 뜻으로 ①아들 ②자식(子息) ③첫째 지지(地支) ④남자(男子) ⑤사람 ⑥당신(當身) ⑦경칭(敬稱) ⑧스승 ⑨열매 ⑩이자(利子) ⑪작위(爵位)의 이름 ⑫접미사(接尾辭) ⑬어조사(語助辭) ⑭번식하다 ⑮양자로 삼다 ⑯어리다 ⑰사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녀/여(女), 어머니 모(母), 아버지 부(父)이다. 용례로는 아들과 딸의 높임말을 자녀(子女), 며느리 또는 아들의 아내를 자부(子婦), 아들과 사위를 자서(子壻), 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을 자손(子孫), 아들과 딸의 총칭을 자식(子息), 남의 아들의 높임말을 자제(子弟), 십이시의 첫째 시를 자시(子時), 밤 12시를 자정(子正), 새끼 고양이를 자묘(子猫), 다른 나라의 법률을 이어받거나 본떠서 만든 법률을 자법(子法), 모선에 딸린 배를 자선(子船),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자막집중(子莫執中),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자모지심(子母之心), 듣고 본 것이 아주 좁고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자성제인(子誠齊人),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자위부은(子爲父隱)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器(그릇 기)는 ❶회의문자로 噐(기)의 본자(本字)이다. 犬(견; 개)은 고대(古代)의 식료(食料)로서 무덤에 묻혀지는 일이 많았다. 개고기를 네 개의 접시에 쌓은 모습으로 먹을 것을 제각기 덜어 먹는 접시나 그릇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器자는 ‘그릇’이나 ‘접시’, ‘도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器자는 犬(개 견)자와 네 개의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器자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개고기를 그릇에 담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개가 귀한 그릇을 지키는 모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모두 口자를 그릇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器자를 보면 마치 개가 마구 짖어대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器자가 본래는 ‘개가 짖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 예서(隸書)에는 工(장인 공)자가 쓰인 噐(그릇 기)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噐자가 器자로 잘못 옮겨진 것은 아닌가 한다. 그래서 器(기)는 어떤 명사(名詞) 다음에 붙어 (1)기계(器械)나 기구(器具)나 그릇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생물체(生物體)의 한 기관(器官)을 나타냄 (3)성(姓)의 하나 (4)음식(飮食)의 그릇 수를 세는 단위(單位) (5)근기(根器), 기량(器量)이라는 뜻으로, 교법(敎法)을 믿고, 이를 실제로 닦을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6)기세간(器世間) 등의 뜻으로 ①그릇 ②접시 ③도구(道具) ④(생물체의)기관(器官) ⑤그릇으로 쓰다 ⑥그릇으로 여기다 ⑦존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그릇 명(皿)이다. 용례로는 세간이나 그릇이나 도구 따위를 통틀어 일컬음을 기구(器具), 사람의 덕량과 재능을 기량(器量), 살림에 쓰는 그릇붙이를 기물(器物), 살림살이에 쓰이는 그릇붙이를 기명(器皿),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기악(器樂),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을 식기(食器), 제사 때에 쓰이는 그릇을 제기(祭器),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데 쓰는 연장을 흉기(凶器), 사람의 덕량과 재능을 기량(器量), 차에 관한 여러 가지 기물을 다기(茶器), 기구와 기계를 아울러 일컫는 말을 기기(機器), 내장의 여러 기관을 장기(臟器), 물건을 담는 그릇을 용기(容器),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기구를 집기(什器), 백토로 구워 만든 그릇을 사기(沙器), 진흙으로 만들어 잿물을 올리지 않고 구운 그릇을 토기(土器), 대나무로 만든 그릇을 죽기(竹器), 옻칠을하여 아름답게 만든 기물이나 그릇을 칠기(漆器), 대소변을 받아 내는 그릇을 변기(便器), 전쟁에 쓰는 모든 기구를 병기(兵器), 전쟁에 쓰이는 총검이나 화포나 핵병기 따위 온갖 기구를 무기(武器), 소총이나 권총 등의 병기를 총기(銃器), 사람의 기량은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다는 말을 기욕난량(器欲難量),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인물은 오랜 공적을 쌓아 늦게 이루어짐 또는 만년이 되어 성공하는 일을 이름을 대기만성(大器晩成), 국가를 다스릴 기량이 있다는 말을 간국지기(幹國之器), 깨어진 그릇 조각을 서로 맞춘다는 뜻으로 이미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려고 쓸데없이 애씀을 이르는 말을 파기상접(破器相接), 마룻대와 들보로 쓸 만한 재목이라는 뜻으로 나라의 중임을 맡을 만한 큰 인재를 이르는 말을 동량지기(棟梁之器),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을 군자불기(君子不器), 이미 망가진 일을 고치고자 쓸데없이 애를 씀을 이르는 파기상종(破器相從), 큰 그릇을 작은 데에 쓴다는 뜻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을 시킴으로써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함을 두고 이르는 말을 대기소용(大器小用), 쥐를 잡으려다가 그 옆에 있는 그릇을 깨뜨릴까 염려한다는 투서공기(投鼠恐器)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