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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향한 긴 여정 - <벤허>
유난히 여러 번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나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를 11번 보았다. 아니, 이 글을 쓰기 위해 USB로 다운받아 한 번 더 봤으니 12번 본 셈이다. 그러니 웬만한 장면은 디테일까지도 기억이 나고, 벤허가 로마에서 귀국하여 폐가가 되다시피 한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바닥에 쌓여있던 나뭇잎들이 벤허 주위에 흩날리는 스산한 정원 신은 꿈에도 나올 정도다.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본 것은 1962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한극장에서 단체로 관람한 것이었다. 내 자리가 2층 왼쪽 사이드 석이라 화면이 상당히 왜곡되게 보였음에도 영화가 시작되면서 70mm 대형 화면으로 예수의 탄생을 신비스러운 색조로 보여준 다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배경으로 주연 배우와 감독 등의 이름이 나오는데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전개되는 노예선과 해상전투 장면 그리고 더 없이 박진감 넘치는 전차경주 장면과 골고다를 오르는 예수의 경건한 모습에서는 내 어린 혼을 다 빼앗겼다. 물론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 영화의 주제인 ‘용서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충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후에 천주교 영세를 받게 된 데에는 이 영화가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루 월리스 장군의 소설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만든 작품이다. 원작은 그 부제가 보여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초점을 두었는데 이와 달리 영화 〈벤허〉는 개인 유다 벤허의 삶을 따라간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테마를 직설적으로 관객에게 강조하기보다 한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뇌를 통해 에둘러 그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드라마틱한 재미를 충분히 즐긴 다음에 그 뒤에 숨어 있는 메시지를 찬찬히 음미해 볼 수 있는데 와일러 감독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벤허의 인생역정을 좇아 이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 보자.
때는 서기 26년, 예루살렘의 제일가는 부호이자 귀족인 유다 벤허는 어머니 미리엄 여동생 티르자와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다. 충직한 하인 시모니데스는 집사로서 벤허 가의 살림을 도와주고 그의 딸 에스더는 남몰래 벤허를 사모하고 있다. 그러던 중 옛 친구인 로마인 메살라가 수 년 만에 주둔 지휘관(천부장: tribunus militum)이 되어 돌아오자 반갑게 그를 찾아간다. 전과는 달리 로마의 영광과 황제의 권력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변한 메살라는 벤허에게 로마에 반기를 드는 유대인을 알려줄 것을 요구하며 함께 일하자고 한다. 그러나 벤허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적과 협력자 중 하나를 택하라는 메살라의 강요에 민족을 배신할 바에는 기꺼이 적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얼마 후 유대에 새로 부임하여 입성하는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가 벤허의 집 앞을 행진하게 된다. 이때 옥상에서 이를 구경하던 여동생 티르자의 실수로 기왓장이 흘러내려 총독 옆에 떨어진다. 말이 놀라 뛰어올라 총독은 땅에 떨어지고 호위 병사들은 벤허의 집에 쳐들어와 벤허와 그의 가족을 체포한다. 벤허는 단순한 사고였고 총독을 해칠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메살라에게 선처를 호소하나 그는 냉정히 거부한다. 메살라는 그들의 무고함을 알았지만 유대 백성들에게 로마에 대한 두려움을 확실히 심어주기 위해 본보기로 엄벌에 처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지하감옥에 갇히고, 사형수 신분으로 갤리선으로 끌려가는 벤허는 메살라에게 반드시 살아 돌아와 복수하겠다고 맹세한다.
결박되어 이송되던 죄수 행렬이 사막을 거쳐 작은 마을에 들렀을 때, 병사들과 다른 죄수들은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으나 반역죄가 붙은 벤허에게는 물을 마시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던 벤허에게 동네 목공소에서 나온 한 청년이 다가와 얼굴을 씻기고 물을 먹여준다. 로마 군인이 물을 주지 말라고 외쳤으나 청년의 얼굴을 보고 압도되어 그대로 내버려 둔다. 벤허는 그의 도움으로 물을 마신 뒤 기운을 차리지만 이름도 듣지 못하고 다시 끌려간다.
이후 벤허는 로마 해군의 갤리선에서 노를 저으며 고된 노예 생활을 하게 되는데 퀸투스 아리우스의 선단에 배치된다. 보통 갤리선의 노 젓는 노예는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는데, 벤허는 복수심으로 견디며 무려 3년이 넘게 살아남는다. 오히려 배를 젓는 고된 노동 속에서 강철 같은 육체와 고통을 참는 인내력, 감정을 조절하는 절제력을 익힌다. 로마 황제로부터 마케도니아 해적들을 소탕하라는 명을 받은 아리우스는 노예들의 상태를 점검하던 중 벤허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간파하고 그에게 자신의 검투사나 전차수가 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벤허는 자기는 남의 노예로 살다 죽을 운명이 아니기에 하느님이 자신을 살려 놓았다고 하면서 아리우스의 제안을 거절한다. 해적과의 전투 직전 아리우스는 죄수들에게 채우는 발목의 쇠사슬을 벤허에게는 채우지 않도록 지시한다. 해적들은 아리우스가 탄 기함에 투석무기를 쏘아 불을 지르고 뱃머리로 들이받아 가라앉힌다. 벤허는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해적 공격수들을 쓰러뜨리고 다른 노예들의 결박을 모두 풀어준 뒤 바다에 떨어진 아리우스 제독을 구출한다. 아리우스 제독은 함선이 가라앉는 걸 보고는 함대가 대패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벤허가 이를 막는다.
다른 로마 제국 배에 구출된 후 아리우스 제독은 자기 함대가 실제로는 대승을 거두었음을 알게 된다. 아리우스는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 제국으로 귀환하고, 벤허가 자신을 살려준 보답으로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청원하여 벤허를 국가 소속 노예에서 자기 직속 노예로 바꿔준다. 이후 벤허는 로마의 전차경주에서 다섯 번이나 승리하여 유명인사가 되었고, 아리우스 제독은 벤허를 노예에서 해방시킨 다음 죽은 친아들 대신 아들로 입양하여 자신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상속할 자격을 준다. 노예에서 권세가의 아들로 신분이 상승되었으나 벤허는 여전히 유대로 돌아가 가족을 구출하겠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아리우스는 벤허에게 아리따운 신붓감까지 마련해주었으나 벤허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계속 만류하던 아리우스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그를 보내준다.
유대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벤허는 자기 나이 정도 되는 나자렛 사람을 찾는다는 발타자르 노인을 만나는데 그 노인은 훌륭한 말들을 소유한 아랍 족장 일데림을 벤허에게 소개해준다. 일데림은 벤허가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남을 알아채고 자신의 말로 전차경주에 나가 로마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달라고 적극 제안하지만 벤허는 자신은 할 일이 따로 있다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떠나는 벤허에게 일데림은 이 전차경주기장에는 규칙이 없어 많은 전차수들이 죽어나간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벤허는 황폐해진 자신의 집에 돌아와 집사였던 시모니데스와 그의 딸 에스더와 다시 만난다. 시모니데스는 메살라를 찾아갔다가 심한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되었고, 에스더는 결혼도 않고 그런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으며 여전히 벤허를 사모하고 있었다. 다음날 벤허는 메살라를 찾아가 보도(寶刀)를 선물하며 퀸투스 아리우스의 아들이 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그리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아내어 돌려보내준다면 자기가 한 복수의 맹세를 거둘 것이라며 메살라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메살라는 두 사람을 석방할 것을 지시하고 부관이 지하감옥으로 가 확인해보니 두 사람은 살아는 있으나 문둥병에 걸려 있어 전염을 두려워 로마법에 따라 이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한다. 둘은 한밤중애 길을 더듬어 옛 집을 찾아가 에스더를 만나 벤허가 살아 돌아왔음을 알게 되나,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일 수 없어 벤허에게는 자기들이 죽었다고 말하라고 부탁한 뒤 나환자 계곡으로 향한다. 에스더는 그들의 뜻을 존중하여 벤허에게 두 사람이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사망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죽었다고 믿은 벤허는 메살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랍 족장 일데림을 다시 찾아가 전차경주에 출전하겠다고 한다. 이에 일데림은 금은보화를 들고 로마 장교들을 찾아가 전차경주를 놓고 도박을 제안하고 메살라도 유대인과 로마인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며 4대 1로 배당률을 걸고 내기에 참여한다. 거래에 능한 일데림은 태연하게 1천 달란트나 되는 막대한 돈을 걸고 메살라 역시 지지 않고 1천 달란트를 건 뒤 경기에 나선다.
전차경주는 새로 부임한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 앞에서 거행된다. 규칙도 없어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이 전차경주에서 메살라는 바퀴에 칼날을 장착한 그리스 전차를 몰고 나와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모습을 보인다. 각지를 대표하는 전차수들의 전차경주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메살라의 곁에 붙었던 전차는 결국 칼날에 망가져 전복되고 전차수는 나가떨어진다. 몇 바퀴 진행되면서 네 마리의 근육질의 검정말이 이끄는 메살라의 전차와 평화스러운 백색 말이 이끄는 벤허의 전차가 수위를 다투게 된다. 메살라는 채찍질하며 말들을 재촉하고 벤허의 전차를 부수기 위해 자신의 전차를 접근시키며 나중에는 벤허에게 채찍을 가격하나 역으로 벤허에게 채찍을 붙잡히고 중심을 잃어 자신의 전차 바퀴가 이탈하게 된다. 이로써 메셀라의 전차는 대파되고 말에게 끌려가다가 다른 전차에 깔린 메살라는 치명상을 입는다. 벤허는 우승하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의 영웅으로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다. 의사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메살라를 살리기 위해 다리를 잘라내려고 하지만 그는 벤허가 자신을 찾아오리라 확신하며 “반쪽짜리 몸으로 그놈을 만날 순 없어!” 하고 한사코 수술을 거부한다. 정말로 벤허가 자신을 만나러 오자 메살라는 숨이 끊어져가면서도 벤허에게 네 어머니와 여동생은 죽은 게 아니라 문둥병자가 되었다고 털어놓고, “계속된다 유다, 경주는…. 아직 경주는 끝나지 않았다!”고 네가 증오할 사람은 아직 많다는 조롱을 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거처를 알게 된 벤허는 나환자 계곡으로 찾아갔지만 거기서 만난 에스더는 직접 보지 않는 것이 어머니와 여동생이 원하는 바라면서 벤허를 만류한다. 벤허는 극도의 분노와 절망에 빠져 메살라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은 로마 제국에 대한 증오로 확장되어 반 로마 독립운동을 하고자 한다. 이러한 벤허가 마치 메살라처럼 변해 버린 것 같아 걱정이 된 에스더는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벤허를 달래며 자신과 아버지도 군중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파하는 젊은 랍비의 말씀을 듣고 증오에서 풀려났으니 한번 찾아가 보자고 권한다. 에스더의 적극 권유로 예수의 설교 집회에 가는 도중 발타사르를 만나는데 그는 군중을 몰고 다니는 젊은 랍비가 바로 자신이 찾던 그분이니 그의 가르침을 듣자고 권유한다. 거의 다 가서는 벤허는 발길을 돌려 총독 필라투스에게로 간다. 벤허를 불러 낸 총독은 그가 유대 민족의 숭배를 받고 있어 로마제국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면서 유대 땅을 떠나라고 겁박한다. 그러나 벤허는 그에게 로마가 자신의 가족을 파괴했다며 자신은 유대인이고 로마인이 아니라고 선언하며 아리우스가 물려준 인장을 건네면서 그의 상속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한다.
벤허는 나환자 계곡을 다시 찾아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는데 여동생 티르자가 죽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고 벤허와 에스더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기적을 행한다는 그 젊은 랍비, 예수에게로 데려간다. 그러나 이미 예수는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의 길을 향하는 중이었다. 벤허는 만류하는 로마 병사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급히 물을 떠서 쓰러진 예수에게 건네주면서 예수가 바로 자신이 갤리 노예선으로 끌려갈 때 자기한테 물을 준 바로 그 사람이란 것을 깨닫지만 예수는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간다. 결국 예수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벤허는 발타자르와 함께 이 광경을 본다. 벤허가 무엇 때문에 예수가 죽는지 묻자 발타자르는 “바로 이것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라고 답한다. 다시 벤허가 “이렇게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냐?”고 묻자 발타자르는 “이것이 시작이오.” 하고 답한다. 예수가 끝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거센 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데,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에스더와 함께 근처 동굴에 들어가 비바람을 피하다가 갑작스럽게 나병이 치유되어 피부가 깨끗해진다. 집으로 돌아온 벤허는 에스더에게 “그분의 목소리가 내 손에서 칼을 놓게 했어.”라며 예수의 죽음을 계기로 큰 깨달음을 얻었음을 말한다. 마침내 자신을 괴롭히던 오랜 번뇌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안식을 찾게 된 것이다.
미국의 언론인 노먼 커즌스가 ‘인생은 용서를 전제로 한 모험’이라고 했다는데, 이 영화에서 벤허가 겪은 오랜 고난의 인생항로는 결국 용서에 이르고자 라는 긴 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이러한 용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장대한 스토리와 스펙터클한 장면 속에 깔려 있는 깊은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냥 멋진 복수극 정도로만 보았던 것이다. ‘착한 우리 편’인 벤허가 ‘나쁜 놈’인 메살라의 음모에 빠져 억울하게 노예선에 끌려갈 때는 내 어린 가슴 속에서도 증오심이 불타올랐으며, 나중에 전차경주에서 벤허가 메살라의 채찍을 낚아채고 그의 전차가 이탈되며 뒤따라오는 다른 전차가 땅에 끌려가는 메살라를 깔아뭉갤 때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변신한 에드몽 단테스가 무고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원수 3인방’을 멋지게 해치울 때처럼 짜릿한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다. 영화 <벤허>를 처음 보고 나오면서 나는 묘한 기시감(旣視感) 같은 것이 들었다. 그것이 중학교 시절에 읽은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두세 번 더 보고 나서다. 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주인공이 억울하게 반역죄의 누명을 쓴다. ② 그의 친한 친구 등 가까운 사람이 출세나 영달을 위해 꾸민 짓이다. ③ 살아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유배당한다. ④ 유배지에서 귀인을 돕고 그 귀인 덕택으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얻는다. 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특기를 잘 살려 통쾌하게 복수한다. … 이러한 서사구조가 너무나 흡사하여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내가 처음부터 이 영화에 쉽게 빨려 들어간 것은 벤허의 복수가 멋지게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이 영화를 몇 차례 더 보고 나서 부조리한 현실에 직면하기도 하고 부당한 처우를 받아 보기도 하는 등 사회 경험도 쌓이고 또 지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장해 가면서 ‘복수’라는 주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성찰을 해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복수에 열광하는가? 복수가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의 주제로서 우리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아 온 것은 아마도 세상이 불의와 부정, 불공정과 속임수, 좌절과 고통, 절망과 비탄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복수의 심리학』의 저자인 영국의 심리학자 스티븐 파인먼은 ‘복수는 원래 우리 인간의 생물사회적 기질이며, 슬픔이나 비탄, 굴욕감, 분노와 같은 격한 감정으로 촉발되는 원초적 본능’이라면서 ‘날 것 그대로의 정의’라고도 했다. 그렇다! 누구나 삶의 어떤 순간에 다른 누군가에 의하여 소중한 모든 것을 잃고 삶이 망가지게 되면 이때 원한을 품게 된다. 아니, 내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어도 그렇게 당하는 것을 목도하거나 문학작품 등을 통하여 간접체험을 하게 되면 하나의 방어기전이 발동하여 직접 당한 사람처럼 증오와 복수심이 생기게 된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모두 일종의 ‘잠재적 복수자’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벤허처럼 당하면 벤허처럼 복수를 꼭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영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벤허의 복수를 확인하고는 나 나름대로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복수에는 반드시 배신, 음모, 착취, 불공정, 폭력 등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선행한다. 그리고 이 분노는 복수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도록 만든다. 비록 복수가 빼앗긴 것들을 되돌려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내가 겪은 것과 똑같은 고통을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것, 그것만이 내가 빼앗긴 것들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그리하여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복수가 이루어지면 정말로 안식이 찾아오는 것일까? 내가 생각했던 ‘정의’가 실현되고 나면 그 동안 쌓였던 모든 분노가 눈 녹듯이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이 찾아오는 것일까? “복수를 원한다면 두 개의 무덤을 파라.”고 미국 속담이 경고하듯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복수의 순환이 이어지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복수를 다짐하는 에드몽 단테스에게 파리아 신부가 말했듯이 복수심은 분노로 자신을 망칠 뿐 답이 될 수 없음이 큰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파리아 신부는 죽기 전 몬테크리스토 섬의 보물지도를 건네며 에드몽에게 “세상을 용서하라,”고 당부한다. 그보다 훨씬 전 예수도 자신을 추종하는 군중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파하였다. 여기서 ‘원수’란 바로 복수의 대상을 지칭한다고 할 것이고, ‘사랑’이란 용서를 하고 나서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일 것이다. 영화 <벤허>에서 에스더는 자신과 아버지는 젊은 랍비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고문하여 불구로 만든 메살라와 로마 군인에 대한 증오를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었다고 벤허에게 말한다.
복수의 가장 무서운 점은 복수하려는 사람을 스스로 또 한 번 망치게 한다는 것이다. 유대로 돌아와 증오에 불타 복수를 결행하려는 벤허를 보고 에스더는 “당신의 모습이 메살라와 똑같아졌어요.”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한다. 자신이 복수의 대상과 똑같아진다는 것, 이 얼마나 무서운 무너짐인가?
전차경주에서 멋지게 우승을 하고 패배한 메살라가 비참하게 죽음으로써 벤허의 복수극은 성공리에 끝났지만 벤허의 마음은 평안을 찾지 못한다. 복수를 마쳤지만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는 없었다. 벤허는 방황 끝에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처형을 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하게 된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극형을 당하여 죽어가면서도 예수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용서를 비는 것을 보고 벤허는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칼을 거두게 된다.
분노와 증오에 의하여 이루어진 복수는 죄악을 저지른 자에 대한 응징으로서 나름 ‘정의’의 실현은 될지 몰라도 복수를 한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화,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그토록 원했던 과거의 행복한 순간은 되돌려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큰 고통과 상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복수의 대상마저 없어진 지금 그는 모든 것을 상실한 채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 앞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을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서가 답인가?
“우리는 왜 용서를 해야만 해야 하는가?” ‘용서’를 먼저 당위로서 앞에 세워놓고 그 근거를 한번 찾아본다. 그러자 그 답이 그렇게 어렵지 않게 나왔다. 용서는 과거의 아픈 상처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독일의 저술가 스베냐 플라스펠러는 『조금 불편한 용서』에서 자신의 버림받았던 경험을 토대로 용서에 대하여 깊이 있는 분석과 방향 제시를 하였는데, “용서한다는 것은 나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일이 더 이상 나의 존재를 무너뜨릴 정도로 상처를 내지는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적극 공감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용서는 어렵다. 플라스펠러의 말대로 “논리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그렇다고 공정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용서를 해야만 하는가? 나는 이렇게 정리하였다. 먼저 복수는 결국 복수하는 사람을 복수의 대상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지만, 용서는 용서한 사람을 상처를 준 사람보다 우위에 위치하게 해준다. 또 복수를 이룬 사람은 상처받은 과거에 계속 머무르게 되지만 용서한 사람에게는 과거의 족쇄가 풀리고 미래가 활짝 열린다. 용서만이 우리를 더 이상 희생자에 머무르지 않고 당당한 주체로 변모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복수를 좇던 벤허는 에스더가 “당신이 메살라가 된 것 같아요.”라며 걱정했듯이 자신이 그렇게 거부했던 가치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복수를 이뤘음에도 계속 방황의 늪에서 헤매던 벤허는 예수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뒤늦게 용서의 깨우침을 얻고 마음속의 칼을 버리게 된다. 이러한 벤허에게 사랑과 미래의 약속이 펼쳐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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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