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시장엔 등산사 20여 곳, 지금은 J등산사 한 곳 뿐
전자상가, 주얼리 특구, 밀리터리숍으로 유명한 교동시장이 한때 유명한 등산사 골목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1990~2000년대 당시는 지금처럼 아웃도어브랜드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등산용품도 공구골목 등지에서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내던 시절이었다.
전성기 때 교동시장에는 20곳 이상의 등산사들이 있었다. 일부 업체는 텐트, 의류 등 등산장비를 직접 제조해서 팔았다.
2000년대 아웃도어 브랜드 열풍이 불면서 전국의 등산사들은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렸다. 거대 자본과 화려한 패션, 기능을 앞세운 아웃도어 브랜드들의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시장을 내주고 말았다.
대기업 아웃도어 대리점들이 세를 과시하는 한 편에서 등산사의 전통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는 곳이 있다. 대구시 교동의 J등산사 엄기원 대표를 만나 ‘등산사들의 수난사’ 얘기를 들어보았다.
◆교동 일대 20여곳 등산사 성업, 전국에 거래망=1990년대 송죽극장 입구에서 시청 옆 한전까지 이어진 교동시장엔 20여 곳의 등산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산꾼들은 각기 단골집이 있어 찻집처럼 드나들며 외상거래를 하기도 했다.
못 고치는 버너가 없다는 동아등산사, 뛰어난 봉제 기술을 기반으로 방풍·방수 자켓과 텐트를 제작했던 서울등산사, 등산용품 자체 제조라인을 갖추고 전국의 등산사들과 거래했던 국제등산사 등이 라인업을 형성했다.
교동길에 자리 잡은 J등산사는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전국 등산업체를 대상으로 도소매업을 펼쳤다. 경북, 울산, 경남 등 전국 도매 거래처와 거래선을 확보하며 전성기 때 직원이 다섯 명을 넘기도 했다.
오너였던 이창기 대표는 IMF 직전까지 등산사 두 곳을 운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아웃도어 브랜드 열풍과 외환위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10년 전 후배들에게 점포를 넘겨주었다.
타고난 산꾼이요, 호방한 성격의 이 대표는 지역의 산꾼들과 선후배들을 잘 챙기며 지역 산악회 맏형 노릇을 해왔다.
◆암벽 등반 전문용품·등산 액세서리 주로 취급=등산 의류브랜드의 등장과 IMF 사태로 교동의 등산사들은 2000년대 이후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2005년 이창기 대표가 J등산사를 내놓았을 때 선뜻 인수에 나선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현재 대표인 엄기원 씨다.
엄 대표는 전문산악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산을 좋아해 주말이면 산악회 선후배들과 전국의 산을 오르내렸다. 특히 취미로 시작한 암벽타기는 상당한 경지에 올라 지금도 선후배들에게 실전(實戰) 조언을 해 주고 있다.
현재 J등산사의 고객층은 전문산악인, 일반인을 망라하고 있다. 취급품도 암벽타기 전문용품과 배낭, 악세사리, 수통, 파우치 등 일반용품들이 주류.
◆약초꾼, 심마니, 고소 작업기술자들도 단골=15년 넘게 교동시장에서 등산사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엄 대표. 오랜 기간 이 업(業)을 유지하다 보니 이런저런 단골들이 하나둘씩 생겼다. 특히 엄 대표가 암벽타기 쪽에 워낙 해박하다 보니 암벽 관련 단골들이 많이 드나든다.
재밌는 것은 암벽전문가, 동호회원 외 특수업계 직업계층의 손님들이 많다는 것. 이 중 눈길을 끄는 건 대구경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심마니, 약초꾼들. 이들 상당수가 암벽 장비 구입을 위해 이곳에 들른다는 사실.
약초꾼들은 전문적인 산악 훈련을 받지 않은 경우가 많아 ‘현장’에 약할 수밖에 없는데 엄 대표가 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로 현지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실전 팁들을 많이 알려 준다. 한두 번 등산사를 거쳐 간 약초꾼들이 동료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재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철탑이나 건물 외벽청소 등 고소(高所)작업 기술자들도 주 고객층이다. 특히 최근 고소작업 시 안전장비 착용이 의무화되면서 이들의 출입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엄 대표는 이들에게 안전과 관련된 장비 소개나 고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실전팁을 소개하면서 신뢰를 쌓았다.
◆점포 유지 힘들지만 달라질 세상 꿈꾸며 버티기=사양화로 접어들던 시기였지만 엄 대표는 2005년 가게를 인수할 당시만 해도 장사가 그런대로 잘 됐다고 한다. 전문용품이라는 틈새시장이 아직 살아 있고, 단골들이 그런대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브랜드 아웃도어 업체들도 고전하고 있는 현실에서 등산사들이 전문용품, 액세서리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이 엄 대표의 설명이다.
더구나 코로나19 사태 이후 등산 행사, 산악회 모임이 스톱 되면서 등산, 아웃도어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안팎으로 경제 사정이 힘들고 점포를 꾸려가기도 벅차지만 엄 대표는 굿네이버스나 적십자 회비를 빼먹지 않고 있다. 큰돈은 아니지만 생활 속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선(善)순환’ 구조를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