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의 이름은 반대로 두 고을의 뒷 글자인 '송(소나무 송)'과 '사(모래 사)'를 따서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 붙였다. 이는 무장현의 또 다른 풍류 어린 표현이기도 하다. 이후 영조 때 부임한 현감 최집은 '송사'라는 이름에 깊은 뜻을 더하고자 동헌의 이름을 '취백당(翠白堂)'으로 고치기도 했다. 푸를 취(翠)는 소나무(松)처럼 늘 푸른 기상을, 흰 백(白)은 모래(沙)처럼 청백하고 결백한 절조를 뜻하여, 지방관으로서 청렴하고 늠름하게 백성을 돌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중앙의 정청(正廳)은 왕의 패를 모시는 곳으로 지붕이 높고 앞으로 한 칸 돌출되어 있으며, 지붕 모양은 '사람 인(人)' 자 형태의 맞배지붕이다. 반면 좌우에서 관리들이 묵던 익헌(翼軒)은 지붕이 한 단계 낮으며 '여덟 팔(八)' 자 형태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계단 모양의 솟을지붕 형태를 띤다.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인조 27년(1649년)에 중건(다시 세움)된 기록이 남아 있다.
객사 기단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는 호랑이, 용, 구름무늬 등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고, 기단 모서리 돌에는 연꽃과 화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조선 초기 무장읍성과 객사를 지을 때, 인근 사찰을 철거하고 나온 석재들을 가져와 기단석으로 재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의 강력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고스란히 물리적인 흔적으로 남은 사례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관아 건물이 훼손되었듯, 송사지관 역시 1936년부터 1987년까지 무장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내부 벽체와 구조가 일부 변형되는 풍상을 겪었다. 이후 1990년에 이르러서야 면사무소를 이전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지금의 본래 명선(明鮮)한 모습으로 원형 복원되었다. 주변의 수령 오래된 고목들과 어우러져 지금도 무장읍성 내에서 가장 장관을 이루는 중심 공간이다.
첫댓글 무장읍성(사적) 내부의 핵심 관아 건축물인 '무장객사'인 송사지관은
왕권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지방관아의 가장 위엄 있는 건물로, 그 이름과 건축 기단에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품고 있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조정은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두 고을인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새로운 고을인 무장현(茂長縣)을 만들고 무장읍성을 쌓았다.
무장(茂長)은 두 고을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공식 행정구역 명칭이다.
객사의 이름은 반대로 두 고을의 뒷 글자인 '송(소나무 송)'과 '사(모래 사)'를 따서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 붙였다. 이는 무장현의 또 다른 풍류 어린 표현이기도 하다.
이후 영조 때 부임한 현감 최집은 '송사'라는 이름에 깊은 뜻을 더하고자 동헌의 이름을 '취백당(翠白堂)'으로 고치기도 했다. 푸를 취(翠)는 소나무(松)처럼 늘 푸른 기상을, 흰 백(白)은 모래(沙)처럼 청백하고 결백한 절조를 뜻하여, 지방관으로서 청렴하고 늠름하게 백성을 돌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객사는 고을의 동헌(집무실)보다 격식이 높은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망궐례) 공간이자,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숙소로 쓰였다.
중앙의 정청(正廳)은 왕의 패를 모시는 곳으로 지붕이 높고 앞으로 한 칸 돌출되어 있으며, 지붕 모양은 '사람 인(人)' 자 형태의 맞배지붕이다. 반면 좌우에서 관리들이 묵던 익헌(翼軒)은 지붕이 한 단계 낮으며 '여덟 팔(八)' 자 형태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계단 모양의 솟을지붕 형태를 띤다.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인조 27년(1649년)에 중건(다시 세움)된 기록이 남아 있다.
무장객사는 전국에서 객사의 석축 기단과 계단이 원형 그대로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기단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 시대의 독특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객사 기단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는 호랑이, 용, 구름무늬 등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고, 기단 모서리 돌에는 연꽃과 화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조선 초기 무장읍성과 객사를 지을 때, 인근 사찰을 철거하고 나온 석재들을 가져와 기단석으로 재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의 강력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고스란히 물리적인 흔적으로 남은 사례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관아 건물이 훼손되었듯, 송사지관 역시 1936년부터 1987년까지 무장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내부 벽체와 구조가 일부 변형되는 풍상을 겪었다. 이후 1990년에 이르러서야 면사무소를 이전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지금의 본래 명선(明鮮)한 모습으로 원형 복원되었다. 주변의 수령 오래된 고목들과 어우러져 지금도 무장읍성 내에서 가장 장관을 이루는 중심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