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5척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인접한 아크레와 자파로 도달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먼 해상에서 그 간악한 놈들이 깔아놓은 함정을 피해가면서 싸우느라 상당한 선원과 물자의 손실이 있었고, 그 보급을 위해 일단 다미에타로 돌아가야 할 상황입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함선이 이곳 티루스가 아닌 남쪽으로 쓸려내려가서 뿔뿔히 흩어져 통제할 도리도 없습니다."
바라카는 더욱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아이유브를 섬기던 항장 출신의 해군 제독에게 더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뻔뻔스럽게 잘도 지껄이는군. 10분의 1도 안되는 극소수의 해적들을 상대로 함대가 농락당하고 돌아와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지껄이고 있느냐!"
"사령관, 이미 출항 전 저는 이 작전의 무모함을 이미 고했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우리보다 열세고 예상 항로가 고정되어 포위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해도… 상대는 씨서펜트란 말입니다. 바다에 대해서라면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도 머리속에 그려놓고 적에 대해서라면 힘의 차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처구니 없는 공세를 펼치고 무사히 살아 도주하는 괴물중에서도 괴물이란 말입니다.
그런 자를 상대로 수만 많을 뿐 총톤수가 열세이고 오랜 내전으로 훈련과 장비가 부실한 함대를 데리고 무조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만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약을 대비해 럼의 해군의 협조도 의뢰하고, 해상 경로에만 집중시킨 군수물자를 육상 경로로도 일부 가지고 이동하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사령관께서는 시간을 지연시킨다고 거절하셨죠. 그 판단은 사령관이 내리셨고, 그로 인해 저를 책망하는 것은 알라께서도 무도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의 발언은 결국 바라카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실패의 책임을 나에게 물으려 하는구나. 패배한 개 주제에 수치도 모르고 감히 함부로 지껄이다니… 내 아버지는 자비로우셔서 네놈 같은 아이유브의 개를 거두워 주셨을지는 몰라도, 우리 맘루크에 너 같은 패배자는 필요하지 않다. 여봐라. 이 놈을 끌어내 목을 쳐라."
그러자 주변의 병사들이 황당해하는 제독과 부상당한 그의 부하들을 밖으로 끌어내었다. 제독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억울하오! 우리는 단지 명을 따른 것 뿐이오. 재판을 받게 해주시오. 당신에게 이런 권리는 없소!"
그러나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끌려나가고 바라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한손으로 이마를 부여쥐고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 이어졌다.
"상황이 안좋게 돌아가는 군요. 결국 해군을 활용할 방법은 없다고 봐야겠군요. 무모한 놈들… 아무리 죽을 지경에 처했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뱃머리를 먼 해상으로 돌려 아무리 작은 규모라지만 폭풍이 부는 권역으로 함대를 유인하다니… 다행히 휘말리기 전에 상당수의 함선이 이탈해서 피해는 저 정도로 그쳤지만, 함선들에 실린 물자로 보급하며 이동하려던 계획은 물건너갔군요.
그리고 우리가 놈들에게 낚였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구요. 미리 정찰부대를 배치해서 가도를 확보할 것을, 설마 그 병력이 사막으로 가리라는 생각은 못하고, 오로지 해안 가도만 신경쓰다 놈들을 놓쳐버린 것은 뼈아픈 실책입니다. 이제 별수없군요. 어떻게든 가장 단기전으로 난민들의 호위 병력을 제거하고 일부 쓸만한 소수의 노예만이라도 확보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을 듯 합니다."
하나하나 옳은 소리다. 하지만 그 말이 살라미슈에게서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바라카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자신에 대한 모욕과 질책으로 들렸다. 홧김에 씨서펜트에게 농락당한 해군 제독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이 작전이 처음부터 꼬여버린건 빼도박도 못할 자신의 불찰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살라미슈는 딱히 비난이라 할만한 발언없이 담담히 다음 행보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살라미슈를 바라보았다. 딱히 뛰어나지도, 딱히 모나지도 않는 튀지 않는 자신의 동생.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평범한 태도는 결론적으로 큰 실수도 없는 행보를 걷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보는 맘루크 내부에 있어서도 후계자로서는 좀 부족하지만, 후계자의 대안으로서는 가장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바라카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다행히 바이바르스는 장자 상속을 천명하여 현재 맘루크 내부의 상당한 실권을 바라카에게 준 상태고 맘루크의 2인자인 칼라운도 바라카의 장인이자 후견인으로서 뒤를 든든히 지켜주고 있기에 내부적인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지만, 자칫 잘못 내딛은 한발로 인해 후계에 대한 여론이 어떤 양상으로 흐를지는 알수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바라카는 예상치 못한 외부의 조언을 통해 이교도에게 강경책을 내세운 여론을 형성하였고, 거기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 이번 이교도 사냥을 정식으로 발의한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바라카 자신이 비상하려던 날개를 제 손으로 꺽은 모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엄청난 고생을 해서 겨우 포섭하여 아이유브 왕조의 반격의 희망을 저지시킨 해군을 바보짓에 내몰아서 기세를 꺽어버렸고, 부대 전체는 적에게 기만당해 엉뚱한 곳에서 해군을 믿고 별다른 보급도 충분히 챙겨오지 못하고 멀뚱이 주저앉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난민들은 느리지만 내륙 경로를 통해 착실히 북상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바이바르스가 알게 된다면 후계자에 대한 공식 입장에 대해 심각한 고려가 따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바라카는 살라미슈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별다른 말없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동생이지만, 속으로는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알수 없다. 행여나 자신의 실패가 더 확실하게 부각된다면… 그 속에 숨긴 독니를 드러낼것이다. 더 이상, 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전황을 판단하지 마라. 분명, 그들의 예상치 못한 황당한 경로 선택과 그로 인해 해군이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확실하게 상대 측에서 그나마 가장 위협이 되는, 씨서펜트를 전장에서 이탈시켰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위치는 이교도 난민들을 포위할수 있는 기동의 우위에 있는 지점이다.
보급이 부족한 것은 신경쓰지 마라.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우리 맘루크는 더 강대한 적들과의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고 싸워 승리를 쟁취하였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앞으로 적들을 완벽하게 포위하여 물리칠 방법을 찾아 그것을 실행하는 것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와 나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무슨… 방책이 있으신가요? 말씀하십시오, 형님. 무엇이든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라카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난민들은 거대한 군체와 같이 이동하고 있지. 그렇다 해도 그들이 이동하는 가장 핵심적인 경로.., 갈릴리 호수를 도는 경로에는 일시적으로 인원이 집중될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곳에서 놈들이 흩어져 도망치지 않도록 양쪽에서 들이쳐서 물리쳐야 한다. 나는 남쪽길로 그들의 뒤를 추격하도록 하겠다. 너는 북쪽길을 통해 녀석들의 머리위에서 도달해서 그들이 달아나지 않도록 가도를 봉쇄하고 포위하도록 해라."
"흐음… 형님이 몰고, 제가 잡는, 일종의 몰이 사냥의 방식을 사용하자는 말씀이시군요.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비무장 민간인이라고 해도 백만여명의 군중들입니다. 겨우 7천으로 몰이를 하시는게 만만치 않을 거라 사료됩니다만."
"걱정하지 마라. 놈들에게 우리와 대항할 병력은 살라딘의 병사 3천여명이 전부다. 나머지 난민들 중에 징발할 자원병들은 우리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민간인들에 불과하다. 우리 정예 7천이면 열배수의 병력과 격돌해도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안심하고 북상하여 놈들을 놓치지 않는데 전념하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신다면… 일단 알겠습니다. 조금 무리수가 따를지라도 적에게 끌려가는 것보다는 우리가 전역을 주도하는 것이 좋겠죠. 곧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보급이 바닥나서 회군이 불가피해질 시간까지 기다리지 않도록 서둘러 움직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알았다. 출병에 알라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그리고 바라카는 마음 속으로 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서 목이라도 꺽이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이어서 속으로 생각했다. 너에게 이 작전에서 넘겨줄 영광은 없을 것이다. 난민들은 모조리 갈릴리 호수가에서 순순히 잡히던가 죽을 지 택할것이고, 네놈이 건져갈수 있는 것은 정말로 추격당하다 일행에서 낙오하여 길을 잃고 흘러들어간 얼간이들뿐일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동생과 연계한 작전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강행 돌파를 통해 적의 방어선을 붕괴하고 자신을 기만한 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할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베냐민 그룹이 이제 막 관문을 통과하였습니다. 이로서 대부분의 난민이 하틴의 뿔을 지나 갈릴리 호수를 따라 두갈래로 갈라져서 북상하는 경로로 접어들었습니다."
라드의 전언이 끝나자 곧이어 살라딘이 그의 말을 받았다.
"인솔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제 곧 길을 봉쇄하고 병력을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 건설 조합… 아니, 공병대, 프리메이슨 연대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아이샤가 서류꾸러미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조금전부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장 감독님들은 대충 하루에서 하루 반나절 정도로 말씀하시더군요. 괜찮을까요?"
"충분해요. 아마도 적들이 강행군을 한다고 해도 이곳에 도달하는 시점은 3일후 정도… 그안에 모든 준비를 마칠수 있을겁니다."
살라딘은 그렇게 말한 후 전체적인 작전 개요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체크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우리 막사가 있는 배후를 한번 돌아보았다. 완만한 경사의 언덕이 양쪽에 서있고 그 사이에 난 길을 지나면 곧바로 갈릴리 호수로 연결되는 이곳이 바로 우리 작전 포인트 지점이었다. 다행히도 바라카가 이끄는 맘루크의 군단은 우리의 기만에 넘어가주었고, 덕분에 방향을 해안으로 가준 덕분에 우리는 난민들을 상당히 멀리 북상시키고 그들의 추격이 예상되는 지점에서 방어 준비를 갖출 시간을 벌었다.
두들겨 패고 기절시켜서 억지로 끌고 온 살라딘은 우리의 설득 이후 예전의 체념하고 담담히 죽음을 기다리던 모습보다 더 활기차게 열성적으로 우리 무리의 군사 책임자로서 방어준비에 전념하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조금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미끼로 적들에게 던져줘 버린 안젤모에 대한 걱정이 떠올랐다. 과연 무사히 살아 도망칠수 있었을까? 나의 그런 우려가 신경쓰였는지 아그네 공주는 위로처럼 말했다.
"씨서펜트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라면 차라리 난민들이 없는게 그에게는 더 안전한 상황이 될지도 몰라요. 눈앞에서 내버려두고 도망칠수 없는 난민들이 있다면 그의 발도 묶이겠지만, 그런 난민이 없이 자유 재량으로 전장을 선택할수 있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적을 유인해 적에게 혹독하게 시련을 안겨줄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시죠? 마치 눈으로 보신 것 처럼…"
"봤어요. 크레타 공방전에서 멀리서였기는 했지만. 갑자기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바람처럼 카락 한척만 몰고 나타나서는 적함에 심지에 불을 붙인 기름통들을 잔뜩 던져주고선 잔뜩 도발해버린 다음 분노해서 추격하는 수십척의 배들을 나룻배도 들어가기 힘든 해안 암초지대로 유인해서 요리조리 도망치면서 적들을 암초에 처박아 버린 다음, 지나가다 어떻게 봤는지 저랑 눈이 마주치고선 멋드러지게 키스까지 날린 뒤에 '잔금 받아갑니다!' 라고 소리치고 에게해 해상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세공선까지 털어서 날랐어요."
내 눈앞에 계신 공주님도 어째 평탄한 궁전 생활만 하신 분은 아니신듯 했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으셨길래 그걸 목격할 현장까지 다녀오신걸까?
"그러니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를 믿어요. 그리고 왕자님의 각료를 믿으세요. 저 아이들 저래뵈도 그렇게 비정하게 나가진 못할 아이들이니깐요. 나름 배려한 걸꺼예요."
난 여기저기 빨빨거리며 바쁘게 일하고 있는 멜리장드와 아이샤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조금전 대부분의 난민들이 이곳을 빠져나갔다. 이제 이곳 티베리어스에서 추격을 막아낼수만 있다면 직면한 맘루크의 위협에서는 피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건 우리의 전력이 여전히 열세이기 때문이다.
"괜찮을까요?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해도 전력의 열세를 보완할만큼 강력한 조건이 될련지… 혹시라도 잘못되면 난민들은 그대로 적들에게 유린당할텐데요."
나의 걱정에 살라딘은 담담히 말했다.
"물론,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장담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상황이 입지는 동일하지만 전력적으로 할아버님께서 수립한 작전과 일치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당시에 작전에서는 사막을 횡단해서 기갈에 시달린 구호기사단을 주축으로 한 전위 부대를 전장에 피워둔 불로 인해 발생된 연기로 시야를 가리고 아군 부대를 적의 양익에 우회하여 기병과 보병을 분리하고, 기갈에 시달려 호숫가로 성급하게 전진하는 선봉을 언덕과 그 사이의 가도에 집중되는 시점에 포위해서 우선 물리치고, 이어서 기병이 없는 후속 보병대를 경기병대를 우회시켜 후방으로 보내 전방위 포위로 붕괴시킨다는 계획이었죠.
그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적과 거의 유사하거나 혹은 규모 면에서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한데, 지금 우리에게는 그럴 상황이 안되죠. 그러니, 이전에 수립했던 계획의 불가피한 수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우리는 거의 마쳐가고 있어요. 적들이 정석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우리는 할아버님의 구상속에 있고 실현하지 못했던 그 작전을 구현하여 이 궁지를 빠져나갈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또다른 불패의 명장이 이미 검증해준 작전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불패의 명장이요? 그게 누구죠?"
"지금 바로 옆에 계시잖아요."
난 내옆을 돌아봤다. 내 왼쪽에는 에라드 형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양 한마리가 혀를 낼름거리고 지나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불패의 명장께서 건초가 모자라신 것 같은데 미리 준비하지 못한 불찰이…"
"아뇨. 양 말고 에라드경이요."
그 말에 놀란건 나보다 본인이 더한듯 했다.
"제가요? 아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절 보십시오. 다리 병신이라 군에는 얼굴 비칠 기회도 허락받지 못하고, 서기관으로 발령받아 온 서생한테 무슨 그런 터무니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나 살라딘은 진지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체스에서 저에게 그야말로 불패의 명장이셨잖아요. 언젠가 폰과 폰 사이로 전진해서 비숍을 노리던 퀸을 매복해둔 나이트로 잡으신 적이 있잖아요. 기억안나세요?"
"납니다. 그 대국의 기보까지 첨부터 끝까지 바로 그려 드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체스잖습니까. 그걸 현실에서도 통한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명장은 제 어머니였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제 아버지가 그 명예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시겠습니까? 명장은 현장에서 병사들과 함께 상황에 부딪치고 판단하며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자이지, 전장에서 저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체스판이나 끼고선 희희덕 거리며 하수들 가지고 노는 짓이나 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의 정색에 살라딘은 의외의 포인트에서 놀란 반응을 보였다.
"저… 그렇게 하수였어요? 그리고 나름 박빙의 승부였다고 생각했는데, 가지고 노신거라구요?"
"에… 아뇨, 제 말뜻은 그런게 아니고… 결론적으로 저한테 검증을 받으셨다느니 하는 말씀은 하시지 마시라는 겁니다. 저는 모자란 놈이지만 체스판에서 벌어지는 일을 현실로 치환할수 있다고 생각할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둔 기보를 실전에서 교훈이나 조언으로 삼는 무모한 짓은 삼가하시길 바랍니다."
"뭐… 좀전에 한말은 농담이긴 하지만 충격이네요. 나름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에게는 겨우 그 정도 수준으로 비춰졌다니… 그리고 실전과 체스가 다르다고는 해도, 아무런 교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치는 않아요. 저의 할아버지 살라딘도 체스를 통해 인간의 삼라만상이 펼쳐진다고 하셨죠. 그래서, 전 솔직히 실제 반란 진압 등의 실전보다는 에라드경과의 체스를 통해서 더 전장을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말인데… 왕자님, 에라드경을 저에게 붙여주십시오."
그녀의 말에 나는 좀 놀라서 에라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에라드도 놀란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깐 생각하고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시죠. 어차피 우리 일행의 군사 책임자는 당신이니 에라드형만 동의한다면 상관없습니다."
"죤… 그렇게 쉽게 결정을 해버리면…"
"좋은 기회 아니야? 늘 에라드 아저씨처럼 군인이 되고 싶어했잖아. 이것도 굳이 따지자면 군인으로 봐야 할만한 일이잖아."
"하지만…"
그의 망설임을 풀어준 것은 살라딘이었다.
"같이 가주세요. 저는 바라카를 비롯해서 그 누구도 두려워 본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체스판 너머에 적으로 만난 당신만을 제외하고요. 유일하게 저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신 당신이, 만약 같은 편일 때 얼마나 든든할지 당신은 상상하지 못하실겁니다. 저와 동행해 주세요. 당신의 모친께서 이 땅위에 왕좌의 체스를 두는 지존의 조언자였듯이 저에게 조언해 주시고, 당신의 부친이 그분을 지키는 강력한 방패였듯이 저를 지켜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하는수 없군요. 실전에서 현실도 모르고 건방지게 나불거릴 혓바닥이 얼마나 안잘리고 오래 버틸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최악의 상황에 당신에게 날아드는 화살과 창을 몸으로 받는 방패는 되어 드릴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같이 가시죠. 죽음이 우리를 멈출때까지."
뭐랄까나… 살라딘이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잠시 어색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다시 원만해진듯 보였다. 에라드는 그가 가진 살라딘에 대한 감정이 동경에서 애정으로 변화하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당황해하였으나 지금은 그런대로 순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살라딘이 그를 보는 눈빛도 이미 가까웠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주박이 풀린듯 바라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선 묘하게 활발해진 살라딘의 모습은 그런 생각에 생동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을 보면, 뭔가 희망을 가지고 싶어진다. 이 행보의 끝이 어떻게 될진 몰라도 꿈꾸고 싶다. 우리에게 펼쳐진 평화의 시간을… 그리고 3일후 예상대로 적들이 나타났다.
"갈릴리 호수에서 작업을 마친 공병연대는 대부분 현장 이탈을 완료하였습니다."
"병력 배치도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집입로에 명령하신 준비들도 완료하였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좌편 가도를 따라 움직이는 선발대에서도 멀리 정찰을 나가 있던 쪽에서 부대의 이동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살라미슈의 부대일 가능성이 높을 듯 합니다. 현재 그쪽 방면으로의 전진은 일단 보류하고 배후 산지로 난민들을 피난 유도하고 있습니다."
속속 관련 정보들이 사령부에 도착하고 있었다. 살라딘은 조용히 관련 정보들을 검토하며 한편으로는 적의 포진에 대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에라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보세요? 적들의 상태에 대해서?"
"흠… 몇일간의 강행군 덕분에 많이 지쳐 보이는군요. 그 거리를 3일만에 주파한걸 보니 보급도 휴대하고 있는 것만 가능하였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멀리서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굶주림과 기갈이 오는 것 같습니다."
"뭐, 그런건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알수 있는 판단이겠죠. 저는 전술적인 관점에서의 의견을 문의드리는 겁니다."
그녀의 말에 에라드는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냥 장기꾼이지 전술가가 아닙니다. 몇일간 저를 곁에다 두고 관련 전투에 대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틈틈히 관련 상식들을 알려주신건 감사드리지만… 제가 가진 식견으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 일인지 자각하는 계기만 되었을 뿐입니다. 부디 이 질문 거둬 주십시오."
그러나 살라딘은 조금 입맛을 다시며 난처한 투로 말했다.
"네… 그러면 요청을 조금 바꿔볼까요? 저 배치를 체스로 치환해서 한번 봐주실수 있을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말그래도 체스로 진형을 변환해서 한번 그려봐 주세요. 보병은 폰으로, 기병은 나이트로, 궁병은 비숍과 캐슬로, 친위대는 퀸, 그리고 지휘관을 킹으로 감안해서 저 필드를 거대한 체스판으로 생각하고 머리속에서 기보를 그려봐주세요. 가능하신가요?"
그녀의 말에 내가 어이가 없어 대답했다.
"살라딘님, 그거 사람이 가능하긴 한건가요? 체스에서 쓰는 16개의 말만 가지고도 머리가 복잡해질 지경인데 그렇게 말하면 저기 수천개의 체스말들이 깔린 체스판이 그려진다는 건데… 그걸 어떻게 상상하나요?"
그러나 에라드는 조금 기묘한 얼굴을 했다.
"아냐… 굳이 1인당 한 개의 말로 치지 않으면… 대충 가능해서 부대 단위로 묶을수만 있다면 원리는 마찬가지일지도… 하지만, 그게 그려진다고 해도 상대가 그렇게 체스안에서 움직이는 기동을 그대로 할리가…"
살라딘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금의 배치만 봐주시면 되요. 어차피 실전이 벌어진 상황에서는 그런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의미한 짓이 되겠죠. 하지만 배치에 있어서는, 디폴트 배치가 아닌 권역 내 임의 배치 룰로 하는 체스라고 생각하고 기보를 그려보면 상대의 첫수와 배치에서 오는 약점, 그리고 우리의 대응이 조금은 에상할수도 있겠죠. 전문가의 관점에서 한번 봐주세요. 아무리 사소한거라도 제게 알려주시면 큰 도움이 될꺼예요."
"참나… 아버지가 보면 안방에서 탁상공론이나 하는 한량질이라고 한소리 하셨을 상황이군요. 하지만, 그런 하찮은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에라드는 차분한 얼굴로 멀리 펼쳐진 광야와 그 너머에 배치를 끝나쳐가는 맘루크의 군단을 차분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금 복잡한 눈빛으로 상대의 움직임과 배치를 계산하고 다시 우리의 배치와 지형을 고려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후… 그가 입을 열었다.
"나이트 프론트 타입이군요. 체스피스의 배치 간격을 감안해보면 모든 나이트들의 센터 전진 후 종심 돌파, 백사이드로 우회해서 그때쯤 미들라인에 도착한 폰과 양면 포위, 사이드 어택은 견제 정도로만 쓸 생각이군요. 레프트의 폰들이 엉성하게 배치되긴 했지만 그건 의도적인인게 아닌 본의 아닌듯한 느낌… 그쪽의 부대는 자신의 정예가 아닌 최근에 편입했더나 징발된 신병인가 보죠? 아무튼 기보만 봤을때는 그렇군요."
나는 의외의 에라드의 분석에 입을 딱 벌렸다. 이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하지만 살라딘은 감탄한듯 말했다.
"저도 그렇게 봤어요. 역시 예상대로시군요. 파해법은요?"
"네? 그런걸 제가 어떻게…"
"다시 말씀드리죠. 체스로 생각하시라니깐요. 모든걸 체스피스와 체스보드로 치환해서 생각하시라구요. 현실은 잠시 잊으세요. 그냥 체스로 생각하시고 말씀해주시면 되요."
"하아… 이것참… 체스로 말씀해 달라시면… 흠… 어… 어라? 이거 이 기보대로라면…"
나는 당황하는 에라드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뭐야? 우리 불리한거야? 지는거야?"
"17수 후에 체크메이트. 아, 이건 실전이니깐 실제로 킹을 잡아야 끝나지? 19수면 끝나겠네. 어… 잠깐만… 이거 뭐야? 그럼 이거 우리가 이긴다는 말이잖아?"
본인이 말하고 본인이 놀라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살라딘이 흐믓하게 미소지었다.
"과연, 에라드경께서 확신을 주시니 이 작전에 자신감이 생기는군요. 할아버지께서도 이곳의 지형을 보고 작전을 수립하실 때 같은 기분이셨을까요? 뭐, 지금은 아무래도 좋을 듯 하군요. 불패의 명장께서 기보를 확인해주셨으니, 슬슬 적들을 끌어들여 볼까요?"
그녀는 대단히 유쾌한듯 표정이 밝아졌고, 그와 반대로 에라드의 표정은 어두워 졌다. 마치, 당장이라고 혀가 잘릴 헛소리를 내뱉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살라딘이 부하들을 시켜 예전에 일상에서도 애용하는 투구를 가져와 착용하는 사이 넌지시 황당하게 보고 있는 에라드에게 물었다.
"뭐 그렇게 까지 죽은 사람 본 표정으로 얼어 있을껀 없잖아. 나름 레반트에서 유능한 장수로 인정받는 분이 형의 실력을 인정한거 아니야? 좀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알아? 잘하면 형이 바랬지만 이룰수 없었던 무인으로서 명예를 떨칠 기회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게 될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나의 말에 에라드는 대단히 곤혹스럽게 말했다.
"죤, 그건 말이 안돼. 난 분명 체스에서라면 어머니 외에 두려운 상대가 없어. 그리고 나름 군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그곳의 세계를 동경해. 하지만, 그렇기에 둘이 결합될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알아. 체스판은 제한된 공간에 한정된 말로 두는 룰 게임이야. 게임 속에서는 모든 병사들이 충실히 플레이어의 명에 따라 움직이고, 정해진 지점에 정해진 장소에서 공방이 진행되지. 그것은 이상적인 전장이야.
하지만 현실은 달라. 거기에는 실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어. 그리고 그 공간은 시야가 아닌 상상을 동원해도 다 그릴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그안에 수많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과 의지를 통해서 움직여. 그 변화무쌍한 랜덤 포지셔닝은… 인간이 통제할수 있는 범위가 아니야.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전장에서 오랜시간 경험을 쌓고 사고와 육감이 곧 지휘로 이어지는 노련한 전문가라면 또 모를까… 그저 탁상위의 전쟁만 해본 서생은 감당할수 없어.
흔히들 유명한 명장들이 전쟁에서 유능하듯이 체스에도 유능한 사례가 많은 것을 보고선, 그 반대의 경우도 통용되지 않을까 하는 오해들을 많이 하는데… 그건 절대 그럴수 없어. 체스는 체스, 전쟁은 전쟁이야. 그 경계선이 무너지는 것은 불가능해."
나는 그의 말에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말이야… 혹시나 전장이 체스와 동일한 상황이 된다면 어떨까? 요컨데 실전 경험이 없는 사령관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그 명령이 순식간에 전장의 병사들에게 전달되고,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이의없이 정말 체스말처럼 정확하게 지휘대로 움직여 준다면?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쩌면 형도 체스판 위에서 뿐이 아니라 실제 전장에서도 명장이 될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럴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세상이 오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통신기술과 전략/전술, 임무 체계와 부대 구성이 지금과는 상상도 할수 없을 만큼 개선된다면 그럴수도 있을꺼야. 그 시간은 아마도 짧아도 수백년? 나 명장이 되려면 대단히 오래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아무튼, 사령관과 같이 뭉쳐 돌격하는 기병돌격이 아직도 전장을 지배하는 시대에서 나에게 준비된 자리는 없을 듯 하구나.
이번 일도 오해하지 말도록 해. 이건 모두 살라딘이 그린 그림이고, 그 그림에 작은 조언을 해서 그것이 도움이 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어. 명장은 내가 아닌 살라딘님이고, 내 의견은 제한된 전장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예시를 통해 판단된 팁일뿐, 체스의 기보를 전략/전술에, 그것도 우리의 목숨이 달린 일에 함부로 대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나는 한편으로는 그의 말에 이해를 하면서도 한면으로는 그를 동정했다. 어쩌면 세상이 좀더 발전되어 그가 말하는 것과 같이 전쟁이 기보대로 그려질수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을텐데… 나는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부대의 움직임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몇몇 중심에 위치한 기병들이 앞으로 나오고 있다. 살라딘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무도한 폭력을 행사하러 오는 주제에 나름 항복 권유의 관례는 지키겠다는 걸 보니 기도 안차는 군요. 하지만, 우리에게 좀더 유리하게 사용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에라드경은 이미 이해하시겠지만 이 작전의 요점은 적기병대의 빠른 돌격을 유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려면 상대를 좀 도발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한데… 큰 기대는 안하지만 바라카를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게 만들도록 저쪽의 항복 요구 사절에게 뭔가 전언을 고할 방법이 없을까요? "
그녀의 말에 나는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런게 뭐가 고민이시라고… 그냥 멜리장드 보내죠. 아마 적군이 제대로 열받을꺼라고 생각되는데요."
내 말에 조금 멀리서 불안하게 적진을 바라보고 있던 멜리장드가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지금 대체 저를 뭘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는 상식과 합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일을 추진 하는 것을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식으로 말하면 제가 무슨 왕자님처럼 여기저기 사고나 치고 다니는 애물단지처럼 들리잖습니까."
"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냥 그대로 가서 그렇게만 대하고 돌아와줘. 그럼 임무 완수야."
"왕자님!"
살라딘은 화를 벌컥내는 멜리장드를 보며 쓰게 웃으며 말했다.
"뭐, 왕자님 말은 좀 보류해 두고라도… 멜리장드, 당신이 우리 데네브 작전에서 케두스 왕자님과 같이 대외 실무진이니 다녀와 줬으면 좋겠어요. 굳이 도발까지는 아니더라도 불필요하게 허세를 부리는 언급만 하지 않고 상대가 우리를 얏보고 정석적으로 밀고 오게만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할꺼예요."
"알겠습니다. 그런거라면 제가 맡는게 맞겠죠. 케두스 왕자님 같이 가주세요."
"그러죠. 같이 얼른 다녀오도록 하죠."
땍땍거리는 꼬맹이 아가씨와 늘 온화하게 미소짓는 흑인 거인의 조합은 좀 기묘했지만, 그래도 내부적으로 두 사람이 우리 작전의 대외 업무 담당자라는 점은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것 같았다. 곧, 두 사람은 언덕위에 위치한 우리 진지에서 멀리 떨어진 적진과 아군의 중간지점에 멈춰서서 대기하고 우리보고 나오라는 듯이 기세좋게 기다리고 있는 적의 사절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멀어서 대화 내용이 들리지는 않지만, 한참동안 맘루크의 사절들이 뭐라뭐라 얘기를 했다. 그러자, 멜리장드가 뭐라고 따박따박 반박을 했고, 그러자 맘루크들이 삿대질을 하며 다시 뭐라뭐라 얘기를 하자… 멜리장드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뭐라뭐라 얘기를 하고, 한동안 맘루크가 뭔가 말을 하는 것과 무관하게 얘기를 쏟아내는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점점 맘루크의 사절들은 화가 난듯이 보였고…
급기야 그들중 한명이 칼을 뽑아 들고 멜리장드를 베려들었다. 당황한 케두스도 피난이 시작된 이후 늘 소지하고 다니던 힐트에 사자가 조각된 거대한 검을 들어 그들의 검을 막았고, 연이어 주변의 사절들도 검을 뽑아들자, 여전히 뭔가 화가 났는지 삿대질을 하며 뭔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는 멜리장드의 말고삐를 부여쥐고 우리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맘루크의 사절들도 그런 두사람을 쫓다 포기하고, 화가 단단히 난듯이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곧 두 사람이 우리 진지로 돌아오자, 나는 내가 목격한 광경을 황당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뭐라고 했길래 그런 상황이 벌어진거야."
그러나 그 말에 대답한건 케두스였다.
"듣지 않으시는게 좋습니다. 이미 그 정도의 경지면 수사학의 경지가 아니라, 해부학과 신학과 생물학의 경지에서 판단해봐야 할 수준이더군요. 옆에 있는 제가 맘루크 사절들이 불쌍하게 생각될 지경이었으니… 아참, 저 친구들 그 말 그대로 바라카한테 전하면 안될텐데… 이런, 이미 늦었군요."
우리의 시야에는 자신의 진지로 돌아간 사절이 보고를 받으려는 듯 앞으로 나온 바라카에게 뭐라뭐라 얘기를 하고, 곧이어 그 얘기를 들은 바라카가 뭔가 대노한듯 길길이 날뛰다, 칼을 뽑아 사절의 목을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대체 뭐라고 했길래 저 친구들이 저래? 그러나 멜리장드는 아직도 분이 안풀렸는지 씩씩거리며 뭔가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우와… 저 정도면 쌍욕으로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할아버지와 모든 봉신들을 굴복시켰다는 어머니에 대한 야사로만 전해지는 풍문 정도의 수준이네…
어찌되었건 멜리장드는 맡은바 임무를 완벽히 달성한듯 했다. 바라카는 길길이 날뛰며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서 우리 진형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고, 그에 발맞춰서 그들의 기병대도 말배를 걷어차고 일제 돌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개전에 당황한듯 후방의 보병대가 천천히 발을 마주처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장 앞에서 노도와 같은 기세로 전진하던 바라카는 어느새 후방에서 따라온 중기병대에 둘러쌓여 진형상으로는 중심에 위치하며 양익에 경기병대가 따라붙고 후위에 궁기병대가 붙은 전형적인 돌파 진형으로 우리 진형을 향해 돌격해 들어왔다.
우리의 진형은 상당히 방어적인 형태로 되어 있었다. 갈릴리 호수로 연결되는 가도의 양쪽에 위치한 언덕은 적진과 접한 곳에서는 올라가기 어려운 가파른 경사면이었고 배후의 갈릴리 호수에 접한 부분이 완만해져서 그쪽을 통해서만 올라갈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름 그대로 두개의 뿔과 같은 형상이었다. 우리 진형은 그 두개의 뿔 양쪽에 500명의 경보병대를 각각 배치하고, 호수로 연결되는 가도에 나머지 2천여명의 중보병대를 배치하였고, 중보병대 앞에서는 적의 돌격을 막을수 있게 각종 기물과 목재로 바리케이트를 쳐놓은 상태였다.
적들은 순식간에 천걸음도 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를 좁혔고, 상대적으로 좁은 길에 밀집하고 있는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진형을 방추형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각자 사정권에 들어오자 우리의 언덕 양쪽에 위치한 경보병대와 적의 궁기병대가 서로 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효율은 우리쪽이 좋았다. 아무리 정예 궁병이 아닌 본질적으로 보병대인 언덕위 병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이나 군기가 엄격했던지 적의 기병대에 착실하게 화살비를 쏟아 부었다. 그러나 적의 궁기병대는 정예임에도 불구하고 언덕위의 높은 지역에 대한 사격이라는 핸디캡에, 이미 진지를 구축하고 숨어서 사격을 가하는 우리 보병대와는 달리 노출된 광야에서 사격을 당하는 상황에 조금씩 진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궁기병대가 가진 특유의 기동성도 한몫했다.
후방의 궁기병대의 부진에 더 열받았던지 바라카는 칼을 뽑아들고 자신의 친위대로 보이는 중기병대에게 구호를 외치게 명령했다. 그러자 수많은 중기병대가 다함께 칼을 뽑아들고 바라카를 따라 소리쳤다.
"알라 후 아크바르!"
"알라 후 아크바르!"
그리고 곧이어 그들의 병력이 우리의 바리케이트에 접근하여 1차 돌격을 감행했다.
'콰과과강!!!'
수천의 병력이 바리케이트를 두고 서로 맞부딪쳤다. 초기 피해는 바라카의 병사들이 컸다. 견고하게 진형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던 살라딘의 병사들은 경보병대의 활약에 고무되었던지, 함성을 지르지 않고 차분하게 진형을 흐트리지 않으며 적의 공격에 바리케이트 너머에서 넘어오지 못하도록 창으로 견제하며 상당한 피해를 유발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적들의 병력은 상당히 많았다. 이미 기병만으로도 3천에 이르는 병력은 선봉대가 상당히 피해를 입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고 후진들이 연이어 바리케이트에 들이박으며 돌파 혹은 월담을 시도하려 하였다. 그리고 저 너머에서 보병들이 느리지만 이곳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살라딘은 차분하게 전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경보병대에게 사격후 진형을 재정비하라 명한 다음 곁에 있는 에라드에게 말을 건냈다.
"역시 에라드경의 예상대로 움직이는군요. 폰이 없이 나이트와 퀸만으로 움직이는 군요. 종심 방어가 완벽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병대의 투입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전술적인 관점에서 바라카는 확실히 하수로군요. 이 거대한 탈출극을 발생시킨 정치적 전략적 행보가 만만치 않아 우려했는데… 이 정도라면 희망이 보여요. 적어도 에라드경과 마주칠 때 만큼 상대가 거대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요."
"아직 전투 끝나지 않았습니다. 체크메이트 때까지는 절대 방심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정세 분석은 정확하신 것 같습니다. 폰의 사용을 저렇게 해서야 원… 각각의 말들이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는 역할을 가지고 있건만, 저렇게 쓰기 편한 말만 몰고 오다니 좀 딱하긴 하군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그가 사용하는 말들이 맘루크의 명성에 뒤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란 점은 무시 못할 듯 하군요. 저렇게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하며 피해가 속출하는데도 군명을 어기거나 사기가 떨어지지 않고 교전을 계속하다니… 지휘관과 무관하게 맘루크의 군기가 대단하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그것까지 감안을 한 작전이기에 어설프게 흐트러진 부대가 나오면 곤란하겠죠. 슬슬… 문을 열어서 킹을 향해 오도록 해도 좋을 것 같군요."
"그럴까요? 프리메이슨 연대에 신호를 보내죠. 그리고 중보병대에게 명령을 내려야 겠군요."
그녀가 주변의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곧 신호가 아래에 위치한 중보병대에 내려졌다. 그리고 조금씩 눈에 잘들어오진 않았지만 종심의 병력이 중앙을 느슨하게 하고 양익으로 살짝 이동하며 더 밀집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약화된 중앙에 적들은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중심의 방어가 약화되자 적들은 공세를 중심을 향해 집중시켰고, 지속적인 제파 공격들이 부딪쳐가며 바리케이트의 방어라인을 허물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살라딘은 투구의 목조임쇠를 조이고, 안면 마스크를 쓴 다음, 적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언덕 위 방패진형의 끝까지 걸어가서 소리쳤다.
"어리석은 종놈의 자식들… 고작 이 정도냐? 그런 어설픈 힘으로 주인을 겁박하고 결국 몰아냈다니 찬사를 보내주어야겠구나. 허나 너희들이 아무리 기세가 등등해도 나는 결코 굴복시키지 못할것이다. 바라카, 이 모자란 괴물의 자식아… 너는 이대로 말고삐를 돌려 아비에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살라딘이다!"
"살라딘이 오른쪽 언덕의 진형에 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적의 기병대들은 잇달아 소리쳤다. 그리고 바라카도 그 소리를 알아보고 위를 향해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 자식… 티루스에서 우리를 헛발질을 하게 만들더니 우리가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건방진 계집을 보내 나를 모욕하고, 이제는 우리를 우습게 봐? 내 기필코 네놈은 곱게 죽지 못하게 할것이다. 반드시 사로잡아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고 내게 죽여달라 자비를 청하게 만들어 줄것이다. 전 병력 방어가 약화되는 적의 종심을 향해 총공격을 가하라!"
그리고 잔인한 말을 내뱉은 그는 자신도 함성을 지르며 우리 방어진의 중앙에 달려들어가기 시작했다. 튼튼하게 보이던 바리케이트가 적의 총대장의 독려와 참전으로 인해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살라딘은 그런 바리케이트를 보며, 다른 한눈으로는 멀리서 다가오는 적의 보병대의 상황을 보며 조용히 되뇌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곧이어 기병대들의 수많은 희생으로 바리케이트가 무너지고 적들은 무너진 바리케이트를 보자 일단 한걸음 멈춰서고 화살과 낙석을 맞으면서도 바리케이트 앞에서 진열을 재정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살라딘과 에라드는 뚫어져라 관찰했다. 그리고… 바라카가 소리쳤다.
"나의 기병들이여 모두다 저 뚫린 성벽 사이로 진격하라! 전속력으로 돌격!"
"알라후 아크바르!"
그렇게 그들이 돌격을 감행하자 살라딘과 에라드는 다시 고개를 들어 보병대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병대도 바리케이트에서 수십걸음… 당장이라도 기병대와 합류해서 바리케이트로 난입할 기세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보병대의 기동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살라딘은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방어벽이 무너졌다. 중보병대 양쪽 사이드로 밀착방어! 기존 계획대로 등을 언덕에 붙이고 통로를 만들어라. 경보병대 낙석준비! 낙석준비! 신호와 동시에 투하하라!"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군은 적의 입장에서 보기에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지금까지 굳건하게 적을 막고 있던 중보병대는 양옆으로 흩어져서 가운데를 비워두고 양쪽으로 방패를 세워 마치 회랑처럼 보이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보병대는 언덕위의 방벽으로 숨겨둔 석재와 목재를 묶은 끈을 절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군은 그녀의 명령에 두 부대가 다른 행동을 유발했다.
우선 적의 보병대는 멈칫하는 상황이 되었다. 언덕위의 투석의 수준을 넘은 낙석을 준비하는 모습에 보병대는 당장 언덕 사이의 가도로 난입하는 것에 망설일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가도에 난입하여 바리케이트를 부숴버린 기병대는 그 말에 마찬가지로 당황하였으나, 이미 돌입하고 돌격준비를 마친 시점에서 되돌아 갈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친 무너진 바리케이트 사이로 아군이 열어준 길이 트이자 바라카는 소리쳤다.
"전군 저 사이의 공간으로 전속력으로 돌격하라!"
"안됩니다, 사령관! 함정입니다."
"함정이면, 이곳에서 얌전히 돌을 맞고 죽겠다는 거냐?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적에게 밀찰하여 이동하여 이곳에서 이탈하고 적을 앞뒤에서 보병대와 연계해 포위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전부대 전속력으로 저곳을 향해 돌격해!"
바라카를 말리던 참모도 현재의 상황에 바라카가 내놓은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듯, 얌점히 말고삐를 쥐고 돌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장관이 펼쳐졌다. 바리케이트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난입해 들어간 맘루크는 노도와 같은 기세로 가도의 중심에 마치 적을 추격하는 것 같은 빠른 속도로 돌진해 양옆의 중보병대를 무시하고 몇분만에 수천명의 기병대가 언덕 사이의 가도를 이탈해 빠져나가버렸다.
혀를 내두를 만한 신기에 달하는 기마술이었다. 이렇게 근접해서 보니 새삼 맘루크의 군단이 얼마나 강력한 자들인지, 그리고 그들이 몽고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자들을 물리친 전적이 허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감상과 무관하게 살라딘은 다음 명령을 내렸다.
"투석하라! 그리고 프리메이슨 연대는 개방 준비하라!"
곧이어 양쪽 언덕에 있던 경보병들은 미리 올려놓은 석재와 목재들을 아래로 투하하기 시작했다. 이미 대부분의 적 기병대가 우리 중보병대를 스쳐지나가 큰 의미가 없는 늦은 행동이라고 비웃는 적 보병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우리의 투석지점을 본 그들의 표정은 돌변했다. 경보병대의 1차 투석 지점은 무너진 바리케이트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목재와 널판지와 돌들이 부서진 바리케이트의 정면에 쌓이며 공간을 메우고 예전보다 더 튼튼하게 막았다. 그리고 두번째 투석 지점은… 바라카가 빠져나간 가도의 중심이었다. 쏟아진 돌은 쌓여서 작은 성벽처럼 가도의 중심에 위치한 중보병대의 뒤에 떨어졌고, 그것은 마치 앞에 미리 설치되었다 보강된 바리케이트와 더불어 중심의 보병대가 성벽에 둘러쌓인 것 처럼 만들어 주었다.
적들이 당황한 것은 그 포인트였다. 이미 배후로 빠져나간 바라카의 기병대가 돌아와서 중보병대의 등뒤를 칠 길을 막아버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각개격파! 우선 적 기병대를 정리하자. 프리메이슨 연대 개방하라!"
살라딘의 말처럼 적은 기병대와 보병대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버렸다. 그리고 기병대가 가도를 빠져나가 반전해서 중보병대를 노리려고 해도, 이미 투하된 낙석에 쌓인 돌벽은 기병의 진입을 한동안 막아줄 것이다. 결국 적의 기병대는 막힌 가도를 보며 이를 갈고 그곳을 공격하는 대신 호수에 접한 면에서는 다소 완만한 언덕으로 가는 지형을 통해 언덕위의 경보병들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예상치 못한 공세에 휘말렸다.
"관문 개방! 관문 개방! 모두 물러서라! 물이 쏟아진다."
프리메이슨 연대는 멀리서 신호를 보낸 살라딘의 명령을 듣고 거기 있던 아이샤가 소리치자 조금의 시간 낭비도 없이 호수가에 있는 제방의 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나는 엄청난 기세로 적의 기병대를 덮치는 호수의 물을 보며 세부 작전 계획을 세울 때 했던 살라딘의 설명을 떠올렸다.
"이곳이 건조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우기에는 어느 정도 강수량이 존재합니다. 갈릴리 호수에 사는 사람들은 호수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건기를 버티기 위해 그런 우기의 강수를 모을 수단으로 호수가에 제방을 쌓아 물을 관리하죠. 만약에 가도를 빠져나간 적의 주공을 배후라고 안심하고 있는 사이에 이 제방을 파손하거나 관문을 개방해서 물로 쓸어버릴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큰 수고 없이 적의 주력을 궤멸하고, 조공을 분리하여 추격전으로 피해를 줄수가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작전 개요에서는 적을 불과 연기로 시야를 가려 끌어들인 후 각개격파하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그 방법을 쓸수 없으니 물과 진창으로 유인하여 적을 물리치도록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한 이번 작전의 핵심입니다."
그때 나는 조금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과연 그게 잘 통할까요? 바라카측도 바보가 아닌데 그런 부대의 분리에 대해 우리 의도를 알아채고, 배후를 들이치는 대신, 호수를 끼고 측면으로 돌아 다시 보병대로 합류할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저들이 그러지 않을꺼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뇨, 그들은 그것을 상상할수 없을 것입니다."
"왜요?"
"그야, 그들 역시도 저처럼 사막의 백성이니깐요. 그들에게 있어서 제방을 붕괴시키고 저 많은 물을 그저 사람잡는데 쓰고 버린다는 것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지독한 일일겁니다. 저 역시도 에라드 경과의 체스를 통해 여러 번 그런 방식으로 뒷통수를 얻어맞지 않았다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이니깐요."
그녀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맘루크들은 강제 개방되어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갈릴리 호수의 물에 도망차기 보다는 도저히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어붙어 버렸고, 일부 정신을 차린 장교들이 길길이 소리치며 부대 회피를 명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파도는 병력을 덥쳐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버렸다. 말에서 나뒹굴어지고 말들도 놀라 여기저기 미친듯이 날뛰었으나 우기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습지를 유지하고 있는 호수가 주변의 밭과 진창에 더해진 홍수의 물은 부대를 옴짝달싹을 못하고 통제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살라딘이 소리쳤다.
"언덕위의 경보병대는 진창에서 헤매는 적들을 제압하라. 출격전에 각 부대 지휘관들은 병사들이 미리 준비해둔 진창에서 무난하게 활동할수 있는 갈댓닢으로 덧싼 군화의 여부를 확인하고 투입시켜라. 중보병대는 적의 보병대의 난입에 대비하라. 낙석을 활용해 바리케이트를 부수하고 진형을 재배치하라. 움직여라!"
그녀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곧바로 일사분란하게 진형을 재배치하고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다가 이미 가도 너머에 진창에 나뒹굴고 있는 지휘부를 구하기 위해 바리케이트로 축차투입되는 적들을 어렵지 않게 막아내었다. 경보병대도 이미 말이 너무 놀라 도망쳐버려, 진형이 붕괴되고 다들 진탕에서 헤매고 있는 적의 지휘부에 난입해 손쉽게 적들을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와 그녀의 부대의 활약에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이제 전황이 우리에게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마치 마법같은데요. 개전 직전까지만 해도 불안감이 멈추질 않았는데, 이런 엄청난 결과를 볼줄이야… 믿을 수가 없군요."
"뭘 이런걸 가지고요. 전 이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놀듯이 이겨버리는 에라드 경을 몇번이고 분하게 쳐다봤는걸요. 그리고… 굳이 요인을 찾자면 잘 숙련되고 정비된 병사와 효율적인 명령 체계 덕분일겁니다. 맘루크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적을 죽이는 일만 아는 살인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인권, 정의, 충성, 박애 등의 인간의 가치는 큰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예루살렘 왕국과의 평화 회담 이후 상비군을 정비할 때 이런 형태를 원하진 않으셨어요.
하지만 워낙에 맘루크에 익숙해진 관료들은 할아버지의 방식에 반발했고, 마지못해 그들을 상비군으로 채택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할아버지의 예상대로였죠. 저는 그 실패를 교훈 삼아 소수이기는 하지만 병사들을 상비군으로 정비하면서도 명예와 긍지를 가지고 각자 스스로의 의지로 전쟁을 수행할 동료로서 병사를 키워왔습니다. 덕분에 저의 부대는 채찍을 든 노예 감시인이 없어도 저런 안정된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로 성장하였죠. 그런 그들은 맘루크도 쉽게 이길수 없는 저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병사 뿐만 아니라, 명령체계도 효율적이었습니다. 다행히 이 곳은 좁은 가도를 중심으로 한 지형… 이곳에서라면 제가 내리는 명령이 제 목소리 만으로도 일사 분란하게 병사들에게 전달되죠. 만약 광야에서 넓게 펼쳐진 부대를 지휘했다면 이 정도로 효율적인 지휘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곳에서라면 제 목소리가 모두에게 전달되고, 모든 사람들이 명령에 따라 적을 효율적으로 공격할수 있고, 그래서 아까전에 복잡한 타이밍을 요구하는 투석도 성공할수 있었던 겁니다."
나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면서 그녀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응? 그러고 보니 이거 좀전에 에라드 형이 푸념하던 상황이랑 비슷하네. 이런 전장을 좀더 확대하고 그 명령을 형이 내릴수 있는 입장에 있다면… 그럼 정말로 재밌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전장을 다시 내려다 보았다. 에라드가 말했다.
"폰이 무너지고 있군요. 이제 마무리 하시죠."
살라딘은 적의 보병대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는 것을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해보였고, 병사중에 한명이 깃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잠시후 적의 보병대에서 엄청난 소요가 일어났다.
"적의 기병대가 나타났다. 우리 배후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보병대는 급속하게 사기가 떨어져갔다. 가도의 입구 저너머에서 미리 매복해둔 우리 기병대가 적의 보병대에게 멀리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적의 보병대는 서서히 개별 이탈을 시작했고, 몇몇 장교들이 애써 만류하거나 칼을 뽑아들었지만 이미 무너진 기세를 돌이킬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이 침착하지 않길 바랬다. 왜냐하면 저들이 예상조차 못한 그들의 배후에 나타난 그들은 바로…
"하핫! 형제들아! 우리가 활약할 시간이 되었다. 오오오… 이 긴장감… 풍차로 변장한 거인과 싸울때보다도 더 긴장을 고양시키고 피가 끓어오르는구나. 다들 싸울 준비는 되었느냐? 이 위대한 기사의 성전을 막을 용기있는 자가 누구더냐?"
…키호트경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오면 절대로 적들과 교전할일은 없을꺼라고 살라딘이 확약하였기에 나는 문득 떠오른 그들을 마치 우리가 제대로 된 기병대가 있는 것처럼 적을 기만할 수단으로 삼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고, 그것은 채택되었다. 어차피 추격전은 무리고,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적을 패닉에 빠뜨릴수 있다면 써먹을 가치는 충분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제발 적들이 우리 오합지졸들의 어처구니 없는 바보 같은 깃발을 알아보지 못하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맘루크의 정예들은 현명하게도 바리케이트를 돌파하는 것을 중단하고 퇴각을 시작했고, 그들의 퇴각을 우리 중보병대는 거리를 좁히며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밀어붙였고, 수많은 포로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너머 갈리리 호수의 전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바라카를 사로잡았다. 항복하라! 항복하라! 너희들에게 퇴로와 승산은 없다. 항복하라!"
결국 누군가가 바라카를 사로잡은 듯 한 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소리에 맞춰서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울려퍼졌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가장 우리를 위협하는 적의 공세를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막아낼수 있었다. 나는 이제 조금씩 해가 지는 갈릴리 호수를 바라보며 전황을 끝까지 묵묵하게 지켜보고 있는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조금 흐믓하게 웃어보이고 조용히 지휘 막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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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착을 하신 환호의 함성인가요?
이번에는 2등이다!
먼치킨의 가호로 작전은 순조롭군요. 하지만 결과는 어찌 될지...
항상, 뭔가 잘풀린다면 그건 이어질 끔찍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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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본 게임 시작한것에 불과합니다. 투수는 다른 운동하던 친구고 타자들은 맛이 갔고, 감독은 벤치에서 기타만 치고 있는 신생 야구단같은 모습... 그래도 여자 스탭들이 많으니 분위기는 화기애애... 골수팬도 백만명이나 된다나 뭐라나...
샬라미슈 저놈이 형제를 몰락시키는데 동참했으면 하네요.
실존 인물인지라 묘사하기가 조심스럽더군요. 뭐 큰 예상은 벗어나지 않는 행보를 보일겁니다.
크 멋지네요 에라드 살라딘 조합 ㅜㅜㅜㅜ 계솟 이런 식으로 가야될텐데 코멘틀 봐선ㅜㅜ
원래 크킹은 롤러코스터입니다!
저는 바리카에게 물뿌리지는 못하지만 그냥 방임하는것만으로도 엄청난 효과일거 같다고 생각됩니다
@Peter Von Petersburk-Hoi 실제 역사를 찾아보신다면 살짝 다음편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 추측이 되고 이해가 잘되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