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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 4. 듣고 보는 것을 알리되 5. 보고, 걸으며 들은 것 6.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마 11: 4. 듣고 보는 것을 알리되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
예수께서 행하신 병 고침의 기적들은 그가 메시아이시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본 대로 그들의 선생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예수는 어떠한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변하셨다.
2]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1) 예수의 답변으로 간결하고도 권위에 차 있다.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변호(辯護)를 당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아적 실재(實在)를 입증하셨다.
* 사 29: 18-20 – 18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19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20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 사 35: 5-10 –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 사 61: 1-3 –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는 "마침 그 시(時)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눅 7: 21)고 기록하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고 계시던 때에 도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2)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답변하고 계셨다.
'듣고 보는 것'이란 당신의 관용구인 '경험한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즉
① 예수의 증거는 말과 행동이 완전 일치(一致)됨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② 듣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진리의 영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고,
보는 것은 영적 진리의 진실성과 권위에 대한 증거로서, 결국 예수의 증거는 완벽한 권위(權威)를 갖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③ 사실에 대한 역사성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같이 답변하신 배경을 살펴보아야겠다. 예수께서는 수감(收監)된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재고(再考)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나 기타 유대인들이 기대한 바와 같이 급작스럽고 난폭한 심판보다는 사랑과 구원과 회복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드러내놓고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발표할 수가 없다는 점을 요한에게 깨우치고자 하셨다.
3] 요한에게 알리되
예수의 답변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요한에게 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내세우신 이적들은 선지자들도 행한 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과 능력으로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으며, 요한은 이 사실을 듣고 보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어렵지 않게 추론(推論)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 11: 5. 보고, 걸으며 들은 것 -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네 권의 복음서들에 증거된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 한다.
1] 맹인이 보며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
* 사 29: 18 -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 사 35: 5-6 -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사 42: 7 -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 사 61: 1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새 세계(new world)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당시 팽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시아직을 적절히 선포하셨다(Jeremias).
예수께서는 당신의 메시아 이적 중 '시각장애인이 보는 것'을 육체적 회복의 시작으로 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영적 사역을 그 절정으로 보이셨다.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사 61: 1에 언급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인용치 않으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아 사역의 정치적 측면을 개인 회복 내지는 전인(全人)적인 해방으로 그 초점을 맞추게 하시려 했던 까닭이다.
2]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메시아의 이적이 주로 육체적인 질병을 고침 받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러한 이적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시각장애인(맹인) 된 자, 청각장애인, 못 걷는 사람,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할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예수께서는 여러 차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다.
* 마 9: 18-25 –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 눅 7: 11-16 –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메시아 사역 중 가장 탁월한 징표요 복음의 핵심이다.
메시아의 표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일 뿐만 아니라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은 모든 죄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 참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지 못했다.
이들은 의(義)의 길로 다니지 못하는 앉은뱅이이며, 죄로 오염된 문둥이로서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며 자기의 병을 전염(傳染)시킨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귀머거리)이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자들이다.
모든 질병과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외에는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회개하는 심령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요체(要諦)가 아닌가.
4]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복음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아름다운 소식'(사 61: 1)과 맥락을 이루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한다.
그가 소경의 눈을 보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부정(不淨)한 것으로 오염된 한센 병자를 깨끗하게 했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가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메시아가 임했다는 기별(奇別)이고 통보였다.
마 11: 6.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1]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기서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 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뜻이 있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른 메시아 사역을 행하고 계셨다.
그들은 예수를 거부하며 보이신 참 메시야 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결국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이라면 적어도 제한적 사고와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계시의 한 과정에 걸려 실족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조명(illumination)이나 그분의 능동적인 배려가 없이는 인간은 결단코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이다.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아 관으로 인해 참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다.
예수의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과 그의 탈(脫)유대적 인간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해 그를 오실 메시아로 믿고 따른 자는 그분의 나라에 속한 행복한 자이다.
예수는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진리의 한 측면이 아니다.
믿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과 형벌,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는 진리요 생존의 근거가 된다.
* 요 20: 31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 복 음
본문의 세례 요한은 잠시 절망에 잠긴 것 같다.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을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한때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요한은 의심과 나약함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불의한 자에 의하여 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있으며,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그의 의문을 제기 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본문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1) 시각장애인이 보며
사람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다. 오히려 그들은 선악과가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줄 것으로 착각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사람의 모습이 그러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했고,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매어 달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는 눈, 영원한 세계를 보는 눈이, 가까운 곳이 아닌 멀리 보는 눈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이제는 기뻐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 나아가기만 하면 모두 영적인 눈을 뜨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못 걷는 자가 걸으며
성한 다리를 갖고 있기에 죄를 범하는 자가 많은 세상이다. 그러기에 의롭고 선한 것에는 앉은뱅이요 절름발이인 것이 또한 인간 세상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그의 복음이 없었다면 오늘도 인류는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 있으며, 그곳의 소득에 만족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가나안을 향한 행군이 시작되었고 우리 안에서 천국이 이미 이루어졌다. 더 이상 우리는 불의와 죄를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의와 진리의 기수로 복음을 들고 분연히 일어서야 하며 힘차게 행군해야 한다.
(3) 한센병 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사람의 주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한센병 자이다. 모든 사회와 인간과 단절된 사람 또한 한센병 자다. 그뿐이 아니다. 거룩한 성전에 참여할 수 없으며, 신의 임재와 은총, 그리고 축복을 누릴 수 없는 자가 바로 한센병 자다.
어쩌면 인류가 처한 환경이 한센병 자와 그리도 똑같은가?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신의 은총과 그의 축복의 참여는커녕 저주 안에 놓여 있는 영원한 멸망이 우리의 종착역이 되어 버린 것이 바로 인간이 처한 환경이다.
그런데 메시야가 오셨다. 우리의 구세주가 오셔서 우리의 병을 치료해 주셨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며, 그의 풍성한 은혜와 자비는 우리의 소망과 힘이 되었다. 이것이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는가?
(4) 청각장애인이 들으며
이제는 모든 성도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말씀과 진리가 이해되고 그로 인한 기쁨이 충만하다. 주를 찬양하는 온 우주와 자연의 합창 소리를 우리는 날마다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결과요 그의 메시야 됨의 증거다. 우리는 예전엔 이 놀랍고 기쁜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탄의 유혹과 저주가 우리가 듣는 전부였다.
때문에 근심과 불안, 고뇌와 절망이 우리의 삶의 전부였고 이기심과 시기, 그리고 탐욕이 우리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되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주를 영접함으로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참 자유한 자요 하늘의 백성이 되었다.
(5)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가난한 자가 설 땅은 이 세상에 없다. 그들은 살기 위해 멸시하고 귀찮아하는 따가운 눈초리와 무시당함과 억눌림에 익숙해야 한다. 그들은 근거 없이 모든 부도덕과 사회악의 원인으로 부당하게 지탄받아도 항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 가난한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애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귀중한 자식을 생명을 걸고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빼앗겨야 했고 무거운 중노동과 난폭한 감독관 밑에서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복음의 소식을 애굽에서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해방자 모세 그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소식을 가지고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에게 말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라고'.
오늘 우리 또한 더 이상 가난하기에 설움 받고, 가난 때문에 소외당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에게 벅찬 소망과 기쁨이, 그리고 부요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권세 있는 자, 부요 한 자, 절대 필요한 것이 없는 자들에게가 아니라 가난하기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은총 앞에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하며 영광을 주께 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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