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래의 글은 임승수의 인터넷집에서 퍼온글입니다.
진보네트워크에서 사회>연구>임승수인터넷집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자료가 무지 마나요.. 추천^^*.
저도 "빠리의 택시" 읽었는데... 여자분이 공동묘지에 꽃을 놔두는 그 부분은 묘하게 가슴이 찡하더군요. 홍세화님은 이 책을 읽고 제가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서론이 넘 길군요. 아래에 빠리꼬뮌에 대해 펀글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행복하세요..
1871년 3월 18∼5월 28일에 파리의 시민·노동자들의 봉기로 세워졌던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 정권.
〔성립과정〕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일어나 9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자, 4일 파리에서는 민중의 요구로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노동자 및 소시민은 자발적으로 국민군에 지원하여 프랑스 방위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런데 부르주아지를 대표한 국방 가(假)정부는 이러한 노동자의 무장을 극도로 경계하여, 국민군의 항전주장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 빨리 강화하는 편으로 기울어졌다. 적군의 엄중한 포위 속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애국적 파리 시민은 20구 중앙위원회·각 구 감시위원회 등의 프레(前) 코뮌조직을 결성,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정부와 대립, 10월 31일과 다음해인 71년 1월 22일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좌절되었다. 정부는 1월 28일 마침내 프로이센과 휴전조약을 맺고 2월 8일 강화 여부를 묻는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보수화된 농민의 지지를 얻은 왕당파·대지주세력이 다수를 차지한 국민의회가 보르도에서 개최되어 A.티에르를 행정장관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성립, 2월말 베르사유강화가조약이 체결되었다. 알자스·로렌지방의 할양을 포함한 조약의 굴욕적 내용에 분격한 파리 민중은 국민군연합과 그 중앙위원회를 결집해 격렬하게 정부에 맞섰다. 3월 18일 정부가 기습적으로 파리 민중지구의 국민군 진지를 탈취하고 국민군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파리 민중의 반격으로 정부는 베르사유로 쫓겨나고 파리의 실권을 민중이 장악, 파리 전시민의 보통선거로 파리 코뮌(평의회)이 3월 28일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코뮌의 성립과 소멸〕
코뮌평의회는 얼마 뒤 사임하는 프티부르주아 급진파 의원 외에는 주로 대혁명의 공포정치적 혁명 독재를 신봉하는 네오(新)자코뱅파, 파리 인민의 혁명 독재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을 부르짖는 블랑키파·제 1 인터내셔널파의 노동자와 이에 공명하는 지식인 등 시민이 선거한 의원으로 성립되었으며, 입법권과 집행권을 아울러 장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로, 모든 관공리의 공선제(公選制)와 리콜(recall)제 등 인민주권 원리에 바탕을 둔 직접민주주의적 체제원칙을 표명하였다. 또한 집세와 만기수표의 지불 유예령, 빵굽는 직공의 야근 금지, 여성노동자의 해방과 그 생산협동조합에의 조직화 등 노동권·생활권의 보장을 근간으로 하는 각종 사회정책을 입안하였다. 사회주의적 정책으로는 자본가가 내버린 공장시설의 접수 및 노동조직에 의한 민주관리와 집단적 소유에의 이행을 정한 <4월 16일 법령>, 그 밖에 교육의 민주적 개혁 등 진보적 계획이 차례로 세워졌으며, 4월 19일에는 인터내셔널 연합주의의 정신에 따른 분권적 사회건설을 호소하는 <프랑스 인민에게>의 강령선언이 발표되었다. 인터지구지부·민중클럽 등의 민중조직이 이들 정책 입안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4월 초의 내전 재개 후 코뮌평의회와 국민군 중앙위원회 사이에 군사 지휘를 둘러싼 대립이 표면화하고, 자유적인 연합주의를 신봉하는 소수파와 자코뱅파·블랑키파를 중심으로 공포정치적 혁명독재를 주장하는 다수파와의 내부 대립이 깊어져 5월초 <공안위원회> 설립을 계기로 이 갈등이 극대화되었다. 파리에 이어서 일어난 지방도시의 코뮌운동도 베르사유정부에 의해 차례로 진압되고, 베르사유군은 이 파리의 고립과 내분 및 군사 지휘의 혼란을 틈타 진격을 계속하여 마침내 5월 21일 파리로 침입, <피의 1주일>이라고 불리는 참혹한 시가전 끝에 28일 코뮌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그 동안 3만 명 가까운 파리 시민이 학살되고, 4만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만여 명이 사형·무기징역 및 그 밖의 유죄선고를 받았다.
〔코뮌의 의의〕
K.H.마르크스는 코뮌을 <그 안에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하기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라고 평가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자는 코뮌을 러시아혁명에 선행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정부로 규정하였다. 한편 소수파의 흐름을 잇는 무정부주의자는 코뮌을 <국가의 부정>으로 이해하였다.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실증주의적 역사학계에서는 코뮌의 애국주의와 민주주의를 강조, 그것이 제 3 공화정 확립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코뮌의 민중혁명으로서의 의미를 강조, 부르주아집단 국가를 아래로부터 해체하고 시정(市政) 완전자치권을 기초로 하는 자유로운 분권적 연합사회를 창출하려 한 현대적 의의를 새로이 묻는 H.르페브르들의 학설 및 파리 변두리 지역으로 밀려난 노동자 대중이 본래의 파리인 도심부를 탈환함으로써 소외되었던 시민사회의 부르주아국가로부터의 자기 회복을 실현하려 한 의미를 재평가하는 J.르쥘리의 학설 등 새로운 시각의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