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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는
조선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사람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가
가득한 이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아멘”
-호레이스 H. 언더우드-
Underwood, Horace Grant
언더우드 (1859.7.19 ~1916 )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영국 런던 출생.
그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조선 말
고종 때,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아침.
언더우드(한국명 : 원 두 우)는 장로교 선교사.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와 같이
미지의 조선 땅을 밟았으니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는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였다.
1881년 뉴욕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884년 뉴브런즈윅신학교를 졸업.
1885년 H.G.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조선 말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1887년 벽지전도 후,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고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회장 역임, 성서 번역사업 주관.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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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현재:연세대학교)로 발전시켰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애틀랜틱시티에서 죽었다.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에 큰 공적을 남겼다.
저서 : 말본, 1890년 한국어 소사전, 1908년 한국 선교 23년 등.
1888년 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부부는
신혼여행 겸 서북지방 전도여행에 나섰다.
앞장선 언더우드 가마 옆 어린이가 큰아들.
앞의 가마 안에는 호튼 부인이
뒤의 가마에는 양반집 규수가 탔다.
언더우드보다 8살 연상인 여의사 호튼.
그의 아들 원한경(元漢慶 : 1890.9.6~1951.2.20)
서울 출생.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 원두우의 아들로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내한하여 평생 선교활동.
1912년 경신학교 교사, 조선신학교 교수 및 교장.
1933년 연희전문학교 제3대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조선지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동 학회지(學會誌)에 한국관계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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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에 의하여 미국으로 추방,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다시 와서 미(美)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전기 학회의 지부를 재발족시켜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장남 일한(一漢)은 연대 교수, 차남 요한(堯翰)은 복음전도
저서로는 《한국의 현대교육 Modern Education in Korea》
<A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등.
원일한(元一漢 : 1917.10.11 ~ 2004.1.15)
본명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일한, 1917년 10월 11일 서울 출생.
할아버지는 한국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설립자인.,원두우
아버지 역시 평생 한국 교육, 선교에 힘쓴 원한경
1939년 뉴욕 해밀턴대학교를 거쳐
1955년 뉴욕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수료.
1962년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
1939년 대학 졸업후 미국 북장로교회 파견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연희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42년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강제 추방당하였다.
1947년 다시 자원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와
백낙준(白樂濬)과 함께 연세대학교 복구사업
6·25전쟁 때는 미국 해군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 참전.
그당시 정보부에서 활동하였고, 1951년 7월 정전협정 때는
국제연합군 수석통역관을 맡아 정전협정을 이끌어내는데 공헌.
이후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1956~1978),
경신중고등학교 이사(1956), 연세대학교 총장서리(1960)·
중앙도서관장·재단이사, 부산 일신병원 이사(1977),
한미교육위원단 운영위원, 한미협회 부회장, 대천수양관 이사장,
대한성공회 이사, 광주기독병원 이사, 광주기독전문학교 이사 등을 지냈다.
잠시 미국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 한국에서 보낸 교육자
합정동 절두산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공원에 묻혔다.
국민훈장 모란장, 5·16민족상, 인촌문화상, 한미우호협회상
저서로는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2002).
언더우드 선교사 후손들.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 릴리아스는 명성황후.,시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회고록 <상투잡이와 함께 보낸 15년>에는
조선시대 궁중 왕실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언더우드에게는 천민부터 왕실까지 모든 계층이 선교 대상
고아원을 세웠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왕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왕실과 가까워진 동기는 1895년 콜레라 퇴치를 위해 헌신적인 봉사.
왕실은 처음에 선교사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죽어가는 환자들을 치료하자 남을 돕는 이들로 여기게 되었고
고종은 공개적으로 언더우드 선교사를 형제라 부를 정도가 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종의 통역으로도 활동했다.
기독교 발전, 국가 복지, 지방수령 동태에 대한 대화.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은.,Lillias H Underwood·1851∼1921.
그의 부인이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던 것도
왕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된 요인이었다.
명성황후는 릴리아스에게 외국의 풍습과
크리스마스에 대해 물어보고 선물을 보냈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하기도 히였다.
겨울에는 선교사들이 궁궐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그런 가운데 언더우드는 거의 모든 권력자들과도 친했다.
언더우드 부부가 이처럼 왕실과 친분 관계를 맺은 기본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리는 데에 있었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895년 전후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 등이 전개되면서
국내외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선교사들도 정치상황에 관여하게 된 것.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에 많은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명성황후가 배일친러 정책에 관여한다고 판단
1895년 10월 8일 저녁 일본 폭도들은 명성황후를 야만적으로 시해
고종은 궁궐에서도 공포와 불안을 느꼈다.
그러자 고종으로부터 많은 친절과 호의를 받아온
언더우드와 다른 선교사들이 온갖 방법으로 왕을 도우려 했다.
고종은 음식도 언더우드의 집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준비해간 것만 먹을 정도로 그들만 믿었고 음식 검역은
에비슨 선교사가 맡았고 언더우드는 미국공사 통역을 맡고
한밤중에 궁궐을 숙위(宿衛) 하고 밤낮으로 왕의 주변을 지켰다.
그러는 동안 윤웅렬 장군을 중심으로 일부 인사들이
고종을 궐밖으로 이어(移御)하려다 실패한 ‘춘생문사건.
얼마 후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머문 ‘아관파천’도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가장 신뢰를 얻었다.
그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1896년 9월 2일과 이듬해 8월 23일에 아펜젤러 등과 함께
고종황제 탄신을 축하하는 '만수절 행사' 개최를 주선했다.
1000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 만국기를 달고
무대시설을 갖추고 정부 관리들과 많은 사람을 초청.
‘그리스도 신문’에도 교회가 왕을 섬기기를
극진히 충성하라는 구절을 창간사에 실었다.
순서지도 미리 배포했고
여기에 실린., 찬양가 가사
‘높으신 상주님,
자비론 상주님 긍휼이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를 보우하소서.
우리 대군주폐하 만세 만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나리사
만수무강케 하여 주옵소서…’
1894년에 그가 간행한 ‘찬양가’에도
고종 탄생을 축하하는 곡들이 있었고,
애국충군적인 찬양가도 포함돼 있었다.
축하 모임은 찬송과 기도로 시작
설교와 축가, 주기도문으로 끝났다.
예배는 "기독교가 애국과 충성을 권하는 종교인 것이고
오직 하나 하나님을 섬김으로 나라가 번영한다."는., 내용.
하나님의 권능을 공개선포하면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아스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엄귀비 주치의로 계속 친분을 가졌고 이때는 하란사가 통역.
하란사는 인천 감리의 첩이었으나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을 졸업
그 이후에는 한국 최초의 여학사가 되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교육을 위해 함께 노력.
언더우드는 1897년 의화군의 유학을 추진했다.
의화군은 한때 언더우드의 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이때부터 일제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의화군이 미국 사관학교 교육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언더우드는 왕자가 미국에 가서 대학에 갈 준비를 몇년 하고
대학을 마치면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1년 정도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미국 해외선교부에 요청했지만 일제는 반대했다.
나중엔 언더우드가 왕자를 미국까지 모시지 못했고
가톨릭 신자가 수행하게 되었지만 언더우드는 그후로도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왕실과 우호적으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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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매우 총명해 선교사들에게 인기 많았다.
명성황후를 여러 차례 만났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은
명성황후가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보다 슬기롭다 말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1년 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미국이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
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명성황후는 거침없이 단호하게 답변했다.
“우리도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
언더우드 부인은 "그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하늘나라."
명성황후는 "상감과 우리 백성들이 다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
선교사들은 명성황후를 통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 것도 기대.
일본 해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한국주재 일본공사로 부임
명성황후 시해음모는 그 직전 공사인 이노우에가 다 꾸몄고
한국 정복을 위해서 후임자 미우라에게 실행을 맡겼던 것이다.
명성황후만 제거하면 한국 정복은 손쉬울 것이라는 판단.
명성황후는 그무렵 이노우에의 음모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공사관 대리공사 알렌이 명성황후를 안심시켰다.
알렌이 그만큼 순진했다는 뜻이다.
이노우에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여러 차례 만나
한국왕실은 일본이 꼭 지켜준다고 공문까지 써서 넘겨준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를 기만한 것이다.
1895년 4월 청국을 이긴 일본은 세계열강으로 급부상
동시에 한국침략 계획을 구체화했고 먼저 명성황후를 제거 음모.
일본 자객 20여명은 명성황후가 잠든 새벽 옥호루에 침입.
자객들은 궁녀들을 살해하다가 왜소한 명성황후를 찾아 도살
이 참혹했던 광경을 러시아 건축가 사바스틴이 현장에서 목격한다.
알렌은 어둠 속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뛰어가는 무리들을 우연히 멀리서 보았다.
일본 살인자들은 궁궐 뒤뜰의 우물에 사체를 던졌다가
다시 떠오르자 건져내 경복궁 뒷문 녹문 곁에 던져 놓고는
기름을 계속 부어 사흘 동안 태워 흔적은 뼈 몇 개만 남았을 뿐.
일국 왕비의 최후의 모습은 이토록 비참했다.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들은 고종은 몸을 떨면서
용상 위에 앉아 꼼짝 못하며 밤을 지새우고 난 고종.
새벽에야 “밖에 외국 선교사들이 없느냐”고 외쳤다.
'조선의 왕' 고종이 붙들고 울 기둥은 선교사들 뿐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간 알렌, 언더우드, 헐버트, 윤치호 부친.
고종은 알렌을 보고 반기며 안도했다.
이들은 총을 가지고 가서 고종을 지켰다.
이 가련한 임금을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들.
알렌과 미국 선교사들 뿐이었다.
조선의 정승들과 군인들은 없었다.
이들은 매일 당번을 정해 고종을 지켰다.
무려 7주 밤낮 동안.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핏기 하나 없이 떨었다.
알렌은 고종의 음식에 혹시 누가 독을 타넣을까 해서
미국공사관에서 만든 식사를 세끼 때마다 배달했다고 한다.
수개월후 평정을 찾은 고종 “당신들이 나를 지켜주었다. 감사하다”
고종은 자신을 지켜준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알렌은 명성황후가 일본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을 때
안심시킨 자책감이 남아 일본에 의한 배신감을 평생 가졌다.
이 난리통에 들어선 친일내각은
명성황후를 천한 신분으로 폐한다.
알렌은 구미 각국의 공사관들과 손잡고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을 성토하며 단죄한다.
알렌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명성황후 시해가 일본공사관 안에서
조직적으로 계획됐고, 그들이 살인자 인것을
워싱턴과 세계 언론에 지속적으로 타전해 알린다.
하지만 일본의 승승장구를 바라보던 미국 정부로서는
알렌이 손톱 밑의 가시였기에 알렌의 활동을 제지하며
공식석상에서 발언도 못하게 하고, 왕실 출입도 금지했다.
일본도 가세해 알렌을 본국으로 송환하라고 다그쳤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었고 조선은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
그후에도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은 3대를 이어 한국을 지켰다.
<조선견문록> 저자 :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호톤 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해 "국익을 위해 헌신하며
국민의 복지를 생각하는 여인으로 외국의 궁전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조선 사람이었으나 완벽한 귀부인이었다." 기억.
"도피와 은거,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기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명성황후."
"세계 강대국과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섬세한 감각의 유능한 외교관."으로 평가하였다.
명성왕후 주치의였던 호튼 언더우드 여사는
당시 미국에서도 의사가 귀하게 대접받던 시대에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와 헌신적으로 의료활동.
조선시대 남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호톤 여사.
그당시 남존여비 유교관에 의해 버림받고 있던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데 크게 일조한.,여성 선교사.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온 여자 선교사 2명.
모두 미혼여성이자 미국 여의사로서 조선에 내한.
엘리스는 '세브란스 병원의 모체' 제중의 부인과 의사.
또 한 분은 미혼여성 제중원 여의사였다가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된.,릴리어스 호튼.
호튼 여사는 '제중원' 첫번째 여의사로서
명성왕후 주치의였고 엄귀비 주치의도 역임.
엄귀비는 호튼 여사의 영향을 받아 학교 설립.
............엄귀비가 설립한 학교..........
1905년 양정의숙(현재, 양정고등학교),
1906년 진명여학교 (현재, 진명여자고등학교)
명신여학교(현재,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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