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성적이었던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의 나찌즘에 열광하고 맹종하게 되었을까? 유대인 학살같은 반인륜적 범죄에 왜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을까?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독재체제를 구축한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 분석한 [독재자들]에서 리처드 오버리는, 독재체제가 어떻게 가능했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었으며 무엇이 독재자와 민중을 강력한 끈으로 묶어 놓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어느 체제의 국민도 그저 수동적이거나 무기력하지는 않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열렬하게 찬양할 때 다수의 대중들은 신중하고 기회주의적이며 합리적이고 현실 순응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저항은 예외적이었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쉽사리 꺾였다. 히틀러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대중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읽었고 그것을 채워줄 비전을 제시했으며 그렇게 획득한 정권을 빈틈없이 구축해서 독재체제로 전환시켰다.
히틀러 암살은 그가 집권 후 17번이나 시도되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1차대전의 패배 후유증으로 강한 독일을 꿈꾸던 대중들의 욕망을 히틀러는 자극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유럽 대륙을 파죽지세로 점령해 갔다. 독일군에게 패배의 징후가 나타난 것은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가 아니라, 동부전선에서 스탈린의 군대에 패배했을 때였다. 이때부터 독일 군부 내에서는 비밀스럽게 히틀러 암살이 계획된다. 히틀러 암살 시도는 1939년 목수였던 게오르크 엘저가 시한폭탄을 제작헤서 히틀러 연단에 설치했지만 예상보다 연설이 일찍 끝나면서 실패한 것을 비롯해서 수없이 많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가장 암살 성공에 근접한 것은 1944년 7월 20일 슈타펜버그 대령에 의해 시도된 것이었다.
[발키리]는 슈타펜버그 대령의 7.20 암살 미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은 백작 신분으로서 아프리카 전투에 참여해 한쪽 팔과 눈을 잃고 훈장을 받은 뒤 독일 군부 핵심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군부 내의 히틀러 암살 조직에 가담하게 되면서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암살 계획을 수립한다. 슈타펜버그 대령을 중심으로 한 7.20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은, 독일 군부의 기득권자인 전직 독일 육군 참모총장 루드비히 벡 장군과 올브리히 장군 등 독일 군부 핵심세력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발키리]는 히틀러 사후 예비군을 동원해서 국가를 지킨다는 비상작전계획 발키리를 슈타펜버그 대령이 입안하고 그것을 히틀러 암살에 역이용했다가 실패로 끝날 때까지의 과정이 긴박감 있게 펼쳐진다.
[유쥬얼 서스펙트]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브라이언 싱어 감독과 크리스토퍼 맥쿼리 작가는 세밀한 자료조사 끝에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스릴러적 긴장감을 갖춘 [발키리]를 완성했다. 우리는 히틀러가 독일 패망시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암살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 공개되어 있는 것이다. 대중들이 이미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결말이 공개된 상태에서 치뤄지는 게임이기 때문에 더욱 더 영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건을 바라보는 새로운 정치적 시각과 캐릭터의 세밀한 구축, 그리고 디테일하면서도 힘있게 전개되는 내러티브가 조화를 이뤄야만 비로소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다. 슈타펜버그 대령의 실패한 암살계획에 어떻게 구체성과 현장감을 부여하는가, 이 문제에 영화적 생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이 있다는 것을 히틀러는 알고 잇었기 때문에 그는 불규칙적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1944년 7월 20일, 슈타펜버그 대령은 폴란드 지역 깊은 숲 속 지하에 구축된 히틀러의 전쟁총사령부 늑대굴 속에 폭탄이 장착된 서류가바응 ㄹ들고 들어갔다. 근 ㅏㄹ은 히틀러가 무솔리니를 만나기로 계획된 날이었다. 그는 히틀러 곁에 서류가방을 놓고 빠져 나왔으나, 히틀러의 부관이 가방을 히틀러 반대편으로 치우는 바람에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만 입는데 그쳤다. 하지만 벙커 밖에서 폭발을 목격한 슈타펜버그 대령은 히틀러가 죽은 것으로 알고 베를린으로 돌아가 발키리 작전을 수행하다가 히틀러의 나찌대에 진압된다. 이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과 그 주변 인물들까지 약 200여명이 나찌친위대에 처형당했으며 수 천명이 검거되었다.
[발키리]는 히틀러 암살을 위해 모인 군부 내 지도자들이 어떻게 암살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가 하는 과정에만 집중되어 있다. 핵심 인물인 슈타펜버그 대령의 내적 고뇌 역시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그와 가족과의 관계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까지도 담보로 암살을 시도하는 내적 고뇌는 너무나 미흡하게 처리되어 있다. 예비군 사령관이었던 프롬 장군은 군부의 히틀러 암살계획인 발키리 작전을 알고 있었지만 저지도 하지 않았고 적극 가담도 하지 않은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보던 기회주의적 인물이었다. 또 올브리히 장군은 지나치게 신중한 처사로 폭탄이 터지고 난 직후의 천금같은 시간을 히틀러가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는데 허비해 버린다. 그러나 발키리 계획에 가담하고 있던 이런 캐릭터들이 깊이 있게 탐구되지는 못하고 있다. 모든 내러티브는 외적 사건 전개의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바쳐진다. 그것은 [발키리]의 지향점이 블록버스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뛰어난 각본에도 불구하고 연출이 과연 대본의 재미를 충분히 형성화했는가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그후 [엑스맨]과 [엑스맨2]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디테일한 심리묘사나 입체적인 사건 전개에는 약하다. 그는 세부를 지워버리고 큰 줄거리로 단순하게 승부한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고뇌는 수먼 아래 잠복해 있다. [엑스맨]이 그래도 성공한 이유는 그들의 태생적 결점과 그것이 갖는 슬픔이 디테일한 구축 없이도 관객들의 정서 속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발키리] 역시 실패한 암살 계획으로서의 비장미가 전편을 감돌고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슈타펜버그 대령이 폭탄을 장착한 서루가방을 들고 히틀러 곁으로 접근하는 마지막 부분에서도 긴장감이 크게 고조되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게 극을 끌고 가고 있다. 톰 크루즈 역시 슈타펜버그 대령의 내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발키리]는 암살을 성공시키려는 외적 긴장감이나 죽음을 각오한 암살자의 내적 동요 어는 것도 밀도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스크린 너머에 존재하는 역사적 현실이다. 독일을 구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독일 군부 핵심세력의 실패한 암살 계획은, 영화 밖에 존재하는 역사적 현실로서 우리를 사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