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마르코 10,17-30
우울증의 시작: 가질 수 있다는 착각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쉬며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 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걸. 10파운드라고 할걸….”
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를 용기는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을 때 우울해질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진 것이 많으면 우울해진다고 하십니다.
황창연 신부의 ‘화가 나십니까?’ 강의 중 이런 예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20년 전에 알던 분의 시동생이라고 합니다.
이 분이 성탄절 전날 불법 유턴을 하다가 전경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안 했다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물론 전경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희 경찰 서장이 누구야?”라고 소리쳤고, 경찰 서장의 이름을 들으니 자기 친구였고, 그걸 믿고 전경의 뺨을 강하게 쳤습니다.
그래서 전경은 그 사람을 공무집행 방해로 철창에 집어넣었고, 그 사람은 철창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분을 참지 못하다가 그 자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을까요? 바로 명예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명예를 가졌을까요? 인간은 무언가 가질 능력이 있는 존재일까요?
조선시대 때 쓰이던 동전을 길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누군가는 ‘이건 내 돈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렸을 때 명절 때 받은 돈을 어머니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빼앗겼다기보다는 어머니가 맡기라고 해서 맡겼지만, 되돌려 받은 건 없습니다.
그런데 매번 그랬지만, 지금 어머니께 맡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 앞에서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 아이는 슬플 일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어서 빼앗길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욥은 자녀들과 재산,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잃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주신 것,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니 하느님을 찬미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저도 군대에 갈 때 한 자매가 밤새 편지를 써서 출근도 안 하고 기차역까지 나왔습니다.
훈련소에 가서 시간 날 때마다 그 자매에게 편지를 썼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되었습니다.
7개월 만에 휴가를 나갔는데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자대에 복귀에서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나가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겨울에 뜨거운 목욕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밖에 있었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집착을 끊기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군대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품이나 군대와 같은 곳에 머물려면 머물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로 돈을 맡깁니다.
군대에서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머물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봉헌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십일조입니다.
도미노 피자를 만든 톰 모나한(Tom Monaghan)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그에게 돈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엄청난 부를 일궜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가진 것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고 돈을 사회와 종교에 환원합니다.
그제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께 속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기쁨은 십일조의 열매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복음: 마르 10,17-30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갖게 되는 확신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인생의 지혜로구나, 하는 확신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이 먹어서도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시하지, 정작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 영혼, 정신, 마음,
영원한 생명을 개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첫 번째 독서로 봉독되는 지혜서는 얼마나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는 지 모릅니다.
지혜서의 보다 완전한 이름은 ‘솔로몬의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의 본문 안에는 독자가 누구인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지칭하는 독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이지만, 내용상 독자층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로 확장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 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 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지혜 7, 8-10)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 말미에서 솔로몬은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없이 맑다는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인류역사상 지혜롭기로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고백하면서 겸손되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서 오는 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지혜 9,5-6)
요즘 정계나 학계에서 국민들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든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아주 고압적이고 교만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양, 따져대고 가르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참된 지혜의 덕이 겸비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주님의 성령 안에 살아가기에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합니다.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일 강론>
(2024. 10. 13.)(마르 10,17-30)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0-27)”
1) 24절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라는 말씀은, 27절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이라는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힘으로(권한으로) 하느님 나라에 데리고 들어가려고...
왜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 되었을까?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에 연결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3-24).”
하느님께서 쫓아내셨으니, 하느님께서 다시 들어오라고 허락하셔야만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에덴동산에(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27절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사람의 힘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예수님을 통하면, 즉 예수님을 따라가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권한을, 즉 사람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5,27).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2) 21절의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나를 따라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일’은 예수님을 잘 따르기 위한 준비일 뿐이고, 그 일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고 해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면서 떠나버렸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했는데, 그 사람은 많은 재물을 버릴 수도 없었고,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도 없어서 슬퍼한 것입니다.
<자신의 ‘딜레마’ 상황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슬퍼했습니다.>
21절의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생활과 믿음과 희망과 지향을 인정하셨다는 뜻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인정하시면서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부족한 것 하나’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 ‘부족한 것 하나’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3)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부족한 점이다.”가 일반적인 해석인데, 관점을 조금 바꿔서 다시 생각하면, 그에게 부족한 점은 바로 ‘간절함’입니다.
얻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냥 바라는 것’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좋다.
그것 하나를 얻을 수만 있다면.”이라는 ‘간절함’이 있다면, ‘버림’과 ‘비움’을 실천하는 것은 금방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 영원한 생명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얻지 못해도 좋고, 얻으면 더 좋고.”, 또는 “얻으면 좋겠지만, 얻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 같은 마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진심으로 간절하게’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기도’를 바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간절함 없이’ 그냥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 될 뿐이고, 시간낭비가 될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