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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금> 시집에 들어간 이기철 시인의 '시작노트'
서울셀렉션 ・ 2024. 5. 1. 17:13
이기철 시인의 신작 시집 <오늘 햇살은 순금>에는 시 말고도 시인의 '시작노트'가 시집 여기 저기 별도의 페이지에 편집돼 있다. 이 시작노트는 시인이 이 시집에 수록된 시와 관련된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적은 짧은 글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일반적인 다른 시집들처럼 시가 있고, 이 시와 관련된 짧은 글들이 있으므로 마치 두 권의 책을 읽는 느낌이다. 시작노트는 산문 형식으로 쓰여져 있긴 하지만, 산문적인 느낌보다는 운문적인 느낌이 더욱 강해서 시집 두 권을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시도 읽고, 시와 관련이 있는 시인의 감성도 엿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일반적인 시집과 달리 이렇게 시작노트가 덧붙여진 이유는 시인과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다. 또한 시어의 내면 내지는 내연(코노테이션, connotation)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함으로써 시를 감상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기철 시인은 지난 반세기 이상 지속적으로 2~3년에 한 권씩의 시집을 출간해서 이번 시집까지 22권의 시집을 낸 중진급 시인이어서 이와같은 다소 파격적인 형태의 시집을 내는 것이 기존 시집의 오랜 틀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나 본인은 "독자층을 넓힐 수 있는 재밌고 유익한 시도"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래는 이 시집에 들어간 시인의 시작노트를 모은 것이다. 시작노트뿐만 아니라 시의 일부분을 떼어내 다른 페이지에 독립적으로 편집한 '부분 시'도 함께 모아놓았다. 부분 시'를 굳이 시집내에 편집한 이유는 독자들이 시를 읽고난 뒤 핵심 시구를 다시 읽도록 유도함으로써 시에서 느낀 감흥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각 시작노트와 '부분 시' 마다 해시태그(#)로 시의 제목을 밝혀놓았다.
한 냇물이 다른 냇물을 만나러 갈 때, 한 바람이 다른 바람을 만나러 갈 때, 당신은 마음속에 피어 있는 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 그리움의 먼 길을 걸어온 이여, 염려하지 마라. 그리움은 마셔도 마셔도 남는 마음의 샘물이다. 그를 만나면 별에게서 배운 말을 옷깃에 걸어 주어라.
#이기철노트그리움의색동옷
#오늘햇살은순금
바람이 불어오면 내 안의 상처가 낫는다.
오래 지닌 상처가 보석이 된다.
#이기철노트근심을지펴밥을짓는다
바람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몸보다 더 큰 나의 근심을 저에게 나누어 달라고 바람이 불어온다. 일어서라고, 나아가라고 바람이 옷소매를 흔든다. 악의가 유순해지고 증오가 키를 낮춘다. 바람이 불어오면 내 안의 상처가 낫는다. 오래 지닌 상처가 보석이 된다.
#이기철노트근심을지펴밥을짓는다
#오늘햇살은순금
강가 모래밭에 점점이 찍힌 두 사람의 발자국, 가끔 모래톱을 씻고 가는 찰싹이는 은빛 물살, 강 저쪽에서 들리는 어린 물새의울음, 바람에 파란 손을 흔드는 포플러 잎사귀, 떨어지는 햇빛은 순금. 가난해서 깨끗했던 한 사람의 생애, 그가 남긴 몇 줄의 시, 마음에 묻어 오는 옛날의 그림자.
#이기철노트풀밭나라에서안부를
#오늘햇살은순금
밤하늘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걸어온 하루를 온돌에뉘어 놓고 따뜻한 목소리로 어떤 이름을 불러 본다. 너무 멀리와 지친 발을 대얏물로 씻어 주고 나를 따라온 하루를 데리고 깃털같이 포근한 잠으로 간다. 순은이 되지 못해도 오늘의 삶은 정직했다. 어루만져 줄수록 삶은 키가 큰다. 가슴에 불을 담은 사람이여, 함께 가자, 물을 건너 산을 넘어, 내일 또 내일로.
#이기철노트하루에한번만이라도너의삶을칭찬해주어라
#오늘햇살은순금
너를 찾아온 삶에게
리본 같은 예쁜 말로 칭찬해 주어라
#이기철하루에한번만이라도너의삶을칭찬해주어라
#오늘햇살은순금
오늘은 그대를 만나기보다 그대를 생각하며 들길을 걷는다. 만나서 듣는 목소리보다 마음의 귀를 열어 그대 목소리를 생각하는 일이 더 오래 그대를 지니는 일이기에
#이기철노트등불같은이름
#오늘햇살은순금
차마 그 말에 때 묻을까 봐 참고 참았던 사랑이라는 말
#이기철등불같은이름
#오늘햇살은순금
이 밝고 환한 대낮만으로도 더없이 고마운데
산에 들에 붉은 꽃을 피워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이기철어제오늘내일
#오늘햇살은순금
이마를 짚어 주는 너의 손같이
섬돌에 내리는 빗방울
#이기철섬돌에빗방울
#오늘햇살은순금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본다. 밤이 만들어 놓은 보석이다. 어느 손이, 어느 마음이 저리도 맑고 정교한 보석을 만들었을까, 그렇게 고요하고 맑은 한 방울이 땅으로 떨어질 때 흙은 재빨리 그 보석을 받아 제 안에 품는다. 오래 유리컵에 담아 놓고 싶은 햇빛.
#이기철노트첫햇살
#오늘햇살은순금
햇살 몇 말 꾸어 강물에 던진다
빛나는 것이 이것 말고 또 있는가
#이기철오월이온다는것
#오늘햇살은순금
사과꽃을 보면 누군가에게 편지 쓰고 싶다. 사과꽃은 살구꽃이나 벚꽃처럼 화사하지 않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대 집 담장 위로 사과꽃 돋거든 다섯 자 사연 적은 엽서 한 장 보내주오, 그러면 나는 긴긴 편지 다섯 장을 그대에게 보내리니.
#이기철노트기다림은초록
#오늘햇살은순금
기다림이라고 쓰고 나니 사랑이 가까워진다. 그립다고 쓰고 나니
기다림의 키가 큰다.
#이기철노 트기다림이있을때가 살아있는것이다
기다림이라고 쓰고 나니 사랑이 가까워진다. 그립다고 쓰고 나니 기다림의 키가 큰다. 책을 만지던 손으로 꽃잎을 만진다. 내 안에 남아 있던 지식의 부스러기를 밀어내고 서정시 한 포기를 옮겨 심는다. 내를 건너가자. 산을 넘어가자. 거기엔 그리움이 작약꽃처럼 피어 있을 것이니.
#이기철노 트기다림이있을때가 살아있는것이다
#오늘햇살은순금
그리움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온다
나는 이 말을 하기까지 예순 해가 걸렸다
#이기철기다림이있을때가살아있는것이다
#오늘햇살은순금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이랍니다. 읽으면 첫 줄에서부터 깊은 감동으로 빠져들지요. 그러나 나는 아직도 신을 찬양하는 시를 쓴 적이 없습니다. 내 맘에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는 신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가는 눈빛, 마음, 사랑,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마음들, 그래서 나는 사람을 향해 시를
씁니다.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샤머니즘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이기철노트가슴이백짓장같은사람
#오늘햇살은순금
봄산을 바라보라. 봄산이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할까? 아마도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내일은 세상의 가장 순한 딸들, 제비꽃, 할미꽃, 산수유, 개나리, 명자꽃, 아기진달래를 피워 놓을게, 햇살 따스하거든 사양 말고 놀러와 도시락은 안 가지고 와도 돼, 내가 꽃 식탁, 열매 반찬을 준비해 놓을게.
#이기철노트봄날은백겹
#오늘햇살은순금
햇살 명주옷이 찢겨 살내음 물씬 풍기는 들길은 드는 문도 나는 문도 없다 내려놓아라 팔 부러지겠다
#이기철봄날은백겹
#오늘햇살은순금
구름이 흘러가고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날도, 꽃빛이 어제보다 붉고 새 노래가 목청을 갈아 끼운 듯 예쁘고, 안 보이던 길가의 돌멩이가 제 얼굴을 반짝이는 날도,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아 마음 허수한 날도, 어깨에 내려앉는 나뭇잎 소리, 햇빛 속으로 시가 걸어오는 소리. 아, 나는 왜 움 돋는 풀, 붉은 꽃, 작은 새가 날개를 저어 내를 건너는 걸 보면 슬퍼지는가?
#이기철노트행복
#오늘햇살은순금
꽃말처럼 예쁜 말다발이 또 있을까? 꽃말을 외우다가 시인이 된 사람도 있다. 흙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모르는 새 노란 옷 빨간 옷 흰옷을 갈아입고 햇볕 아래 소풍 나온 아씨들, 저 사랑스런 입술들 곁에서 어찌 꽃물 들지 않을 수 있느냐.
#이기철노트꽃
#오늘햇살은순금
꽃이 피면 마음 바빠진다. 들과 산에 피는 꽃은 그 수를 셀 수 없다. 올해 처음 나온 풀꽃의 이름을 몰라 짐짓 이름을 지어서 부른다. 세 번 네 번 거푸 부르면 풀꽃들이 금세 제 이름인 줄 알고 얼굴을 든다. 배시시 웃는다. 그때 숨겨 둔 마음 한 다발 들고 그대에게 간다. 그대가 풀꽃이듯이, 그대가 풀꽃의 이름이듯이.
#이기철노트라일락이피면오세요
#오늘햇살은순금
오늘 안 아픈 것은 얼마 만한 행복인가, 하루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은 몸도 마음도 안 아픈 일이다, 산기슭에 싸리꽃 필 때 나는 내 아는 이들이 아프지 말라고 마음으로
빌다가 마침내는 연필을 들고 시를 쓴다. 그대여, 내일 우리 전화 없이 만나자, 만나서 사랑하자, 열흘을 참고 견디는 가을꽃처럼.
#이기철노트가을에는새옷을입고싶다
#오늘햇살은순금
냉이꽃 돋는 것 보면 슬퍼진다. 앉은뱅이꽃 피는 것 보면 눈물겨워진다. 저 작고 여린 목숨들의 가쁜 숨소리,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 같아서 오늘도 작은 풀꽃들 곁에 오래 앉아 있다.
#이기철노트단추꽃
#오늘햇살은순금
오늘 안 아픈 것은 얼마 만한 행복인가, 하루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은 몸도 마음도 안 아픈 일이다
들길 걸으며 없는 풀꽃 이름을 불러 보아라. 강가에 혼자 나와 없는 새 이름을 불러 보아라. 아무도 부른 적 없는 이름을 처음으로 부르는 것, 그것이 시다. 그렇게 부르고 나면 그 이름만큼 반짝이는 얼굴이 있다. 시는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 각시꽃 손톱풀 골무꽃 댕기풀 구름할미새 병아리꽃, 없는 사물의 이름들같이.
#이기철노트개나리꽃
#오늘햇살은순금
산뜻한 시 한 편을 일상에 얹는 일은 자신의 하루를 갱신하는 일입니다. 한 번 읽고 던져두었다가 길을 걸을 때 문득 생각나는
시가 있다면 당신은 시와 친구가 된 것입니다. 유독 그 구절이 좋아서 읽다 읽다 그만 외워 버린 시, 나무 이파리같이 흔들리며 새바람을 일으키는 시, 수평선 끝의 파란 기폭 같은 시가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때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지나갔다, 오늘은 잘 살았다,고.
#이기철노트시가아장아장걸어올때
#오늘햇살은순금
오실 땐 풀밭을 지나오세요
입술연지 얼굴화장은 안 해도 됩니다
#이기철기다림은초록
#오늘햇살은순금
시인은 특수한 감수성 하나에 의지하여 시를 쓴다. 언어의 배치나 말의 운용은 그다음 일이다. 바람이 불 때, 나뭇잎이 떨어질 때, 새로 핀 꽃이 들판을 물들일 때 그때의 감각이 감수성을 데리고 온다. 촉감은 매우 즉시적이고 즉물적이어서 그 때를 놓치면 시를 놓친다. 시인의 촉수는 쉼이 없다. 시는 그 촉수를 벼리고 다듬을 때 비로소 태어난다. 오늘을 다한 저녁노을이 목련꽃 하날 떨어뜨리며 말한다. 시를 쓰라고, 잊지 말고 시를 쓰라고.
#이기철노트목련질때
#오늘햇살은순금
나는 정신의 높이를 생각할 때마다 폭포 절벽 단애를 생각했는데 목련 앞에 서니 그 넓고 흰 꽃이 정신의 높이다
#이기철목련질때
#오늘햇살은순금
숲은 신성하다, 숲은 나무의 동네다. 숲에는 사람 수보다 더 많은 나무가 산다. 숲의 나무들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서로 손잡고 팔 겯고 부둥켜안아 준다. 부둥키고 일어서서 끝내 꽃을 피운다. 나무는 지혜롭고 나무는 성스럽다.
#이기철노트숲
#오늘햇살은순금
봄나무들은 제 몸 어디에 저 많은 물감을 숨겨 두었다가 4월이 되면 한꺼번에 꽃송이로 터뜨리는 걸까요? 겨울나무들은 저렇게 많은 말을 얼마나 오래 참고 견뎠을까요? 그 단단한 껍질 속에서
참고 견딘 꽃망을, 시도 그렇게 태어납니다. 겨울을 이기지 않았으면 꽃이 피겠습니까? 그처럼 기다림이 시를 탄생시킵니다. 온종일 화장에 바쁜 꽃나무여, 아름답게 피어라. 오래 참은 말이여, 아름다운 시로 태어나라,고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기원합니다.
#이기철노트나무의본적
#오늘햇살은순금
붉게 물든 저녁놀 아래 서면 마음은 옛날로 돌아간다. 뒷동산에 올라 서쪽으로 떨어지는 놀을 바라보며 해가 지는 줄을 몰랐던 소년 시절과 맨발로 풀밭을 쫓아다니며 저녁 이슬에 베잠방이를 적시던 때, 그래서 나는 지금도 비슬산에 내리는 복숭아빛 황혼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시간을 맞곤 한다. 저녁놀은 옷을
물들이고 마음을 물들인다. 마음을 물들인 놀빛의 언어, 그것이 내가 쓰는 시다.
#이기철노트하늘이라는제목으로시를쓰고싶었다
#오늘햇살은순금
햇살 낭떠러지 끝에 서서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이기철하늘이라는제목으로시를쓰고싶었다
#오늘햇살은순금
나비는 천진하고 나비는 유유하다. 곧 소낙비가 온다 해 나비는 서두르지 않는다. 민들레 꽃술에 앉아서도 날개를 접었다 편다. 그래서 나는 나비에게 ‘잠들지 말아라, 생이 길지 않다’고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고요와 천연함을 역설적으로 나비를 ‘침략자’ 라고 말했지만, 나비는 내 고요를 함께 즐기는 아름다운 침략자, 아름다운 길동무다. 나는 더도 말고 나비만큼만, 저 하염없이 고요한 세상으로 날아가는 노랑나비만큼만 지순하게 살고 싶다.
#이기철노트나비는침략자
#오늘햇살은순금
그에게 네 어디가 예쁘냐고 물으면 금세 토라져
아지랑이를 타고 내를 건너 가 버린다
#이기철나비는침략자
#오늘햇살은순금
볼록하게 움 돋는 풀잎, 이제 막 붉어지려고 입술을 내미는 꽃봉지, 있는 힘을 다해 날개를 저으며 내를 건너는 잠자리, 꽃술에 잠든 노랑나비는 나를 슬프게 한다. 슬픔에는 가식이
없다. 슬픔은 진실이다. 시는 가식 없는 마음, 어쩌면 슬픔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마음을 적시는 언어이다.
#이기철노트갠날아침
#오늘햇살은순금
아침 햇빛에 손가락을 대면 음악 소리가 난다
#이기철기쁨
#오늘햇살은순금
마음은 스스로 장벽을 세우지 않는다. 산을 뛰어넘고 바다를 건넌다. 계절을 편애하지 않는 마음은 한랭 겨울에도 살구꽃을 피운다. 천 리 밖 그의 문간에 핀 살구꽃을 그보다 내가 먼저 보는 일이 사랑이다.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붙이고 편지를 보내면 늦는다. 꽃 지기 전에 마음 전하는 길이 있다. 하얀 종이에 시를 써서 바람에 부치는 길.
#이기철노트마음은천리
#오늘햇살은순금
시를 쓰는 이유: 아직 아무도 쓴 적 없는 깨끗한 말을 골라 병을 이기고 일어선 사람의 단추 끝에 달아 주기 위함이다
1악장이 끝나는 동안
바람은 흰옷을 입고 프라하 쪽으로 불어 가는데
#이기철멘델스존듣는아침
#오늘햇살은순금
맑은 날은 햇빛 아래 길을 나선다. 나비가 날아온다. 피하지 않는다. 나비와 내가 이렇게 가까워질 때가 있다니, 그럴 때는 외롭다는 말을 목 안에 잠근다. 발아래에는 어제 못 보았던
단추꽃이 핀다. 그러므로 오늘은 나 혼자가 아니다. 시가 오는 길목에 서서 손차양을 하고 기다린다. 이름 부를 수 없는 무엇이 가슴을 두드린다. 그의 두드림을 받아쓴다. 종이가 없으면
손바닥에 쓴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구절을.
#이기철노트시간은누구의편도아니다
#오늘햇살은순금
저녁이라는 말은 사람에게서 배운 말이다
나는 사람에게서 배운 말로 사람 사랑하는 시를 쓴다
#이기철저녁에게지붕을맡겼다
#오늘햇살은순금
아직 아무도 쓴 적 없는 깨끗한 말을 골라 병을 이기고 일어선 사람의 단추 끝에 달아 주기 위함이다
#이기철시를쓰는이유
#오늘햇살은순금
당신이 데리고 온 하루가 피곤하다고 말할 때, 당신의 신발에 묻은 삶의 세목들이 그만 가자고 조를 때, 당신은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 있는가?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 있는가?
슬픔이 다시 아름다움으로 태어날 때.
#이기철노트너무아름다운것은슬픔입니다
#오늘햇살은순금
그대가 빛나면 나도 빛납니다. 발아래 초록이 돋고 나뭇가지에 새 노래하고 흐르는 물에 구름이 내려올 때 어디에 숨어 있던 마음이 발자국 소리도 없이 내게로 걸어올 때, 그것이 사랑 아닌가요?
색깔도 향기도 모를 마음 한 가닥, 그대를 향한 길 없는 길.
#이기철노트기다림은왜이렇게잘자랄까요
#오늘햇살은순금
쌀, 연탄, 부엌, 밥상, 숟가락, 접시, 쟁반, 보시기, 문 열면 들리는 실바람 소리, 눈을 씻으며 흐르는 도랑물, 그리고 귀에 익은 너의 이름, 불러도 싫증나지 않는 조그만 명사,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부르고 또 부를 이름들.
#이기철노트쌀한톨
#오늘햇살은순금
나는 지금껏 글자 한 자보다
쌀 한 톨을 가벼이 여기는 죄를 지었다
#이기철쌀한톨
#오늘햇살은순금
꿈꾸는 사람이 시를 쓴다. 꿈꾸는 사람의 가슴에 핀 꽃은 제 빛깔의 말을 전한다. 사랑의 빛깔은 아마도 진홍일 것이다.
사랑을 너무 흔한 말이라 폄하하지 말자, 신라인이 쓰고 고려인이 썼던 그 말이 지금 우리의 말이다. 그리움의 옷을 입고 숨 쉬는 사랑. 높고 순하고 고결한 말 한마디, 그 말이 나를 등 두드려
오늘에게 인사를 드리라 한다. 나의 말인 나의 시로.
#이기철노트오늘에게드리는인사
#오늘햇살은순금
[출처] <오순금> 시집에 들어간 이기철 시인의 '시작노트'|작성자 서울셀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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