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선____
사막의 대화, 그 우울한 속기록
김규성
그동안 지역감정이라는 지긋지긋한 고질병을 앓아왔다. 이제 그 위에 한 겹 고약한 악성 종양이 더해졌으니 곧 세대 차이다. 세대 차, 이것은 ‘통역이 불가능한 외국어’끼리의 대화다. 손짓 발짓을 총동원한 수화조차도 이질적 문화의 심화로 해석이 난감할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막이 있다. 아니 건너지 못할 강이 놓여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접어드는 과도기에도 이와 같은 홍역을 치뤘다. 그러나 그때는 정착이 몸체인 ‘하드에서 하드로의 전이’였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의 이전은 정착이 유목으로 탈각하는 것뿐 아니라 ‘하드에서 소프트로 비상’하는, ‘가벼움이 무거움을 누르는’ 문명의 지각변동이다. ‘해체와 파행을 먹이로 한 즉흥과 변덕이 판을 치는’ ‘문화의 상습적 과도기’이다. 그래서 하드와 소프트 사이의 벽은 사상 유례가 없는 단절이다.
운동권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도덕적으로 신선하고 오히려 더 진지한 젊은 세대들이 상대적으로 부패한 기성세대를 논리적으로 압박하며 대화를 유도하는 나름대로의 통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성이나 상식, 도덕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가상 광장 속의 아이들’이 인터넷이라는 신종 무기를 독점하고는, ‘딱딱하고 진지한 그러면서도 왜소한’ 산업사회의 유물(?)들을 외면하고 저희들만의 가볍고 요란한 세계에 탐닉하는 일방적 폐쇄와 소외가 있을 뿐이다.
정보화 사회의 물결에 무임승차하고도 그 원양어장을 독점한 채 ‘즉흥적이고 동시다발적’인 파도타기에 넋을 잃은 세대를 일컬어 신세대라고 부른다면, 산업사회의 역군이자 정보화 사회로의 다리를 놓은 주역이면서도 ‘정서적 괴리’와 ‘문화적 소외’의 분비물인 첨단 정보매체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세대를 구세대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세대 간의 완연한 분수령, 그 통화 불능을 경계로 신, 구세대가 흑백 분규처럼 갈라진다.
신세대에게는 말초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감각이 유행가처럼 명멸한다. 자연의 품안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 속의 유목민인 그들은 한번 뜯어먹고 난 유행을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는다.‘유행을 위하여 쓰레기처럼 유행을 버리는’ 속도전과 변덕이 그들의 현주소다. ‘일회용 가스라이터 같은 열광은 그들의 외형’이며 ‘편리한 망각은 그들의 내면’이다.
뿌리 깊은 텍스트가 무분별하고 몰가치한 다양성의 하위개념으로 전락한 해체의 식민지에서는 디지털 방점 위의 반짝 스타들만 춤춘다. 대개 만들어진 이벤트성 흥행의 꼭두각시들은 호기심에 굶주린 극성팬들의 헹가래 위에 오르기 바쁘게 추락하곤 한다. 유행의 특징은 반복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별은 반짝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상실한다. 스타는 한여름 밤 개똥벌레의 출몰인 것이다.
한 방의 부모 형제 눈치를 살펴가며, 스탠드를 도둑처럼 켜고 숙제를 하던 구세대에게는 조용한 혼자만의 공부방(동굴)을 갖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신세대는 그 복에 겨운 자기만의 공간을 외면하고 독서실이나 도서관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광장)에 가야만이 공부가 되는 ‘패거리적 습관’에 중독 돼 있다. 환상과 현실을 , 무질서와 자유를, 부도덕과 다양성을 혼동하며 창조를 빌미로 무책임하게 전통과 금기를 깨고 그 상처 속에다 변태의 종균을 배양하는 악동들. 그들에게는 일정한 텍스트가 없듯이 과거에 대한 반성도, 현재에 대한 냉정한 분석도, 미래에 대한 심사숙고도 없다. 그저 눈감고 몸으로 부딪칠 뿐이다.
한편 살벌한 경쟁구도 속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등주의에 젖어온 탓에, ‘가슴은 퇴화하고 머리만 진화한’ 그들은 어떤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정하고 이기적이다. 이제 신판 봉이 김선달은 프로게이머인 그들의 몫이다. 어쩌다가 기성세대는 경쟁만 있고 은혜는 없는, 결과만 남고 과정은 무시된, 권리만 있고 의무는 실종된 신종 인류를 사육한 것이다. 물론 그들의 폭넓고 신선한 의견, 그리고 충분한 토론을 통하여 농축된 합의는 기꺼이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연예인이나 스포츠맨 인기투표식 여론몰이는 삼갈수록 좋다. 홍수는, 적기에 내리는 적당량의 강우와 달리 가뭄에 못지않은 피해를 낳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순간적 이미지에의 몰입’ 대신 ‘신바람 나는 진정성’을 추구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이제 구세대는 노후에 대비한 생계 대책을 세워야 한다. 경제력을 상실했을 때 종전처럼 자식들로부터 부양 받을 꿈은 아예 접어야 한다. 오히려 노후에도 자식들의 얼굴이라도 가끔 보려면 그만큼의 미끼를 돗자리 밑에 감추고 있어야만 한다. 설사 자식들이 효도하고자 해도 바쁘고 변화무쌍한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종전의 주고받던 관계에서, ‘기껏 베풀고 가볍게 외면당하는’ 일방적 관계로 변질된 처지를 인정해야만 한다.
요즈음 신세대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구세대에게 일방적 의존 관계이면서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고 냉정하다. 그 의식의 바탕에는 자식들을 숨막히는 경쟁의 구렁 속으로 내몰아 온 부모들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이 자리잡고 있다. 구세대의 서글픈 자업자득이 신세대의 메마른 가슴에 앙금으로 깔려있다. 구세대는 신세대가 신 유목세대 임을 기억해야 한다. 신 유목은 철저한 이미지의 이동이다. 어지러운 과속에의 편승이다. 생산과 소비가 맞물려 이루어지는 동시다발의 현장이다. 편리한 현실주의이다. 자기중심적이다. 따라서 그 부유식물들의 유랑지에 파종과 수확의 인과율을 기대하기란 요원하다. 오염된 하늘의 변덕스런 날씨에 숙련된 그들의 배은은 부도덕이 아니라 관행이기 때문이다.
구세대는(자신들의) 투자만 있을 뿐 철저히 그 소득이 배제된, 사상 최악의 비경제를 신세대로부터 확인해야 하는 예비 미아들이다. 무연고 고령들이다. ‘자신을 스스로 고려장해야 하는’ 길 위의 풍찬 노숙자들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자신들이 저질러놓은 당연한 인과응보인 걸 어쩌랴. 구세대는, ‘스트레스가 주식’인 ‘출구 없는 우리 안의 맹수들’에게 사회적응과 자기성취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단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주입식 반복훈련만을 주문하고, 명분이나 가치보다 실리만을 따지고 자신을 위해서는 친소를 가리지 않고 남을 밟고 서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런 패륜만을 강요해온 것이다.
친구조차도 들러리나 적인 냉혹한 ‘정글의 전사들’에게서 얼마만큼의 인간미와 도덕성을 기대하겠는가? 신세대들에게 ‘은혜는 왕복이 불가능한 일방로’일 뿐이다. ‘많이 받고도 아예 줄 줄 모르는’ 뻔뻔스런 시침떼기 들이다. 희한하게 ‘염색한 머리털을 원색으로 착각하는 색맹’들이다. 제 그림자에도 못 미치는 겨우 발자국 하나의 사정거리 안에서 바람 따라 말초신경을 흔들 뿐인 근시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탓할 수 없다. 구세대는 어떤 참회로도 부족한 원죄를 오히려 사죄해야 한다. 신세대들도 희생자이다. 그들이 치르는 전 방위적 무차별 경쟁, 그리고 평생 치러야하는 맹목적 이기주의의 형벌은 차마 인간의 할 짓이 아니다. 그들의 도덕적 무감각은 구세대가 파놓은 함정이다. 후유증이다. 물질만능의 죄 값이다. 그토록 극성스럽고 무분별한 교육 투자가 결국 대책 없는 부메랑이 되어 신, 구세대를 동시에 옥죄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단절과 갈등은 두 세대가 동시에 풀어야 할 절박한 과제이다. 구세대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틈에 유목의 현장에 버려진 신세’를 직시해야 한다. 정착시대의 무제한적 소유와 집착을 과감히 떨치고, ‘냉장고와 쓰레기의 이중주’인 ’빠삐용의 무인도’를 벗어나야 한다.
‘경쟁의 발원지인 저금통장’의 비밀번호를 공개하고 그때그때 시의 적절한 생의 묘미를 찾아야 한다. 진정 누려야할 오늘이, 불확실한 내일의 포로이기에 급급한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소유의 감옥에서 존재의 비상구로 탈출한 신 유목시대의 실상을 깨달아야 한다. 일방통행의 독주에서 쌍방 소통의 합주로 연주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정보화 사회의 상대성을 익혀야 한다. 자전하면서 공전하는 지구의 생리를 사회화하는 것이 곧 새 세상을 접수하는 코드인 것이다.
결자해지의 죄책감으로 신세대를 아우르고, 그들에게서 일련의 가능성과 희망을 찾아 배우는 유연성과 시대감각이 필요하다. 그들을 따라가기가 숨차고 서글프더라도, 이미 별천지의 길 위에 놓여진 현실을 미래지향적으로 감내해야 한다. 이제 철저히 황야에 내던져진 피투적 실존을 깨쳐, 스스로의 여정을 책임지는 ‘경제적 문화적 자립’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세대는 아무리 시대가 급변해도 한결같이 세상의 길목을 지켜야 하는 ‘인간 본연의 질서’와 정감을 되찾아야 한다. ‘경쟁의 사슬’을, ‘은혜의 허리띠’로 승화하는 지혜를 처세의 수단으로 해야 한다. 맹목적 충동을 창조로 착각하지 말고, 상상력과 변화의 추구 또한 수단임을 기억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뿌리요 원인인 구세대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진 물심양면의 채무를 평생에 걸쳐 즐거이 상환해야 한다.
진흙엔 모래를 섞어야 배수와 환기가 잘 된다. 황량한 사막도 진흙을 섞으면 훌륭한 땅콩 농장이 된다. ‘정신적 공황에 빠진 삼천리강토를 인정의 꿀이 흐르는 기름진 옥토’로 가꾸기 위해서는 세대 간의 장점을 보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공동운명체의 합목적성’과 보편적 가치관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아직도 그 기회와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신, 구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이버 유목이 아닌, ‘대자연의 순리가 말과 수레인’ 진정한 유목성을 회복할 때만이 가능하다. 곧 ‘소유에서 존재’로의 대 전환을 꾀하는, 현재성의 실현인 것이다. 노자는 인위의 불편과 권력화를 제일 먼저 갈파했었다. 공자의 인과 예를 노자의 불인과 무위자연으로 대체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일대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슈마허는 일찍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갈파했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존재의 당위와 가치를 피력했었다. 진정한 복음은 무소유와 나눔의 미학이다. 필요 이상의 것들을 버려야 산다. 아니 나누어야 산다. 그것은 제 몫만큼만 먹고, 저장하지 않고, 미련 없이 훌쩍 떠나는 간편한 삶을 이른다. 어차피 인간은 허공에 뿌리를 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이나 저금통장은 불임시술을 한 듯 배가 부풀지 않고, 더 이상 통정의 대상을 찾지 못한 자본이 새끼를 치지 못하고 변칙의 거리를 배회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새로운 활로이다. 집보다 차에 치중하는, 핸드폰이 최고의 필수품인 오늘의 풍속도는 신 유목 시대의 이정표이자 코드이다. 정착의 수동태에서 유목의 능동태로의 변환은 새 세상의 문법인 것이다.
현대인은 소유의 과적을 헐어내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찾아 누리는 길만이 허용된 별천지에 비상착륙 해 있다. 가볍고 신나는 여행이 곧 일상의 삶인 유목을 위해서는 간편한 차림과 빠른 발과 최소한의 욕심만 소용된다. 어떤 삶의 형태보다 자연스럽게 생사가 공존하는, 자연의 일부인 죽음이 그만큼 가깝고 평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유목의 풍토 속에서는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주변과 동화하여 연주하는 산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신이 놓친 악보』, 산문집 『산들내 민들레』, 『ㅁㅘ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