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눈여겨 볼 것은 ‘부상략기’(扶桑略記, 14세기경)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에 기술된 비다쓰천황의 행적이다.
이 통사에는 “비다쓰 천황이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고 밝혀져 있다.
비다쓰천황 시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일본 천황 중에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하는 왕궁(王宮)을 지은 이는 비다쓰천황이 최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초의 백제인 지배자였던 정복왕 오진(應神, 4세기 말경)천황 이래 15대(代)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왜나라에 최초의 백제왕궁이 당당하게 선 것이었다.
비다쓰천황이 백제왕궁을 지었던 나라(奈良)땅 야마토의 대정(大井)은 백제인 왕족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던 지역이다.
그런 유서 깊은 곳이기에 백제인 왕족인 비다쓰천황은 그의 궁궐인 백제왕궁을 떳떳하게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나타나 있다.
즉 “비다쓰천황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백제대정궁을 지었다(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고 밝혀져 있다.
스이코여왕의 남편이었던 비다쓰천황만 백제왕궁을 지었던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백제인 천황도 ‘백제왕궁’을 지었다. 바로 비다쓰천황의 친손자인 죠메이(舒明, 629~641년 재위)천황이 그 주인공이다.
‘일본서기’는 “죠메이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고 전한다.
14세기 초의 ‘부상략기’에도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事實)은, ‘일본서기’가 “죠메이천황은 비다쓰천황의 친손자로 백제강(百濟川) 강변에다 백제궁을 짓고,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구중탑(九重塔)도 세웠다”고 기록한 일이다.
즉 백제인인 죠메이천황이 나라 지방 백제강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그 당시까지 엄연히 백제인의 식민지요, 백제왕부(百濟王府)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 옛날의 ‘백제강’은 오늘날 ‘소가강(曾我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제강의 명칭이 이렇게 바뀐 것은 메이지유신 때로 알려지고 있다.
1868년 메이지유신 때 유독 백제강의 이름만 없앤 것이 아니다.
지명 등 일본 각지에서 한국과 관련된 각종 명칭이 대부분 바뀌어버렸다
발굴로 증명되다 <8>
그러나 과연 명칭을 바꾼다고 역사 자체가 바뀌는 것일까. 역사의 사실(史實)은 끝내 밝혀진다.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의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
이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백제인 죠메이천황이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됐다.
그뿐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죠메이천황이 지은 구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금년 5월에는 드디어 ‘백제왕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쓰천황의 백제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井上正雄 ‘大阪村全志’ 卷四 1922).
비다쓰천황의 친손자인 죠메이천황이 백제왕궁을 세운 터전도 바로 친할아버지가 백제대정궁을 건설했던 곳과 똑같은 고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 641년 10월에 죠메이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그 당시의 구다라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강(曾我川)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이 있었다.” (‘大化改新の 眞相’ 1967)
한편 죠메이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과 관련해 ‘부상략기’에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기록도 나와 있다.
“642년 2월에 백제 사신이 내조(來朝)하여, 선제(先帝)의 상(喪)을 조문하였다.”(壬寅二月, 百濟使來朝, 弔先帝之喪).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백제사신이 왜왕실에 와서 ‘선제(先帝)의 상’을 조문했다는 것은, 현재의 백제 본국의 왕보다 승하한 왜나라의 왕(죠메이천황)의 서열이 백제왕 가계상 윗대라는 뜻이다.
이 당시의 백제왕은 의자왕(義慈王, 641~660년 재위)이므로, 죠메이천황은 의자왕보다 윗대의 일본땅 백제 왕족인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이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다.
“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이라고 부른다.”(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죠메이천황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
어째서 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을까. 바로 죠메이천황이 백제인 천황이기 때문에, 마땅히 모국인 백제국 왕실의 국장 절차를 따랐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다쓰천황과 아내 스이코여왕은 이복남매 <9>
스이코여왕의 남편이었던 비다쓰천황과 그의 손자 죠메이천황이 모두 백제인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비다쓰천황이 백제인이라고 해서 그의 아내이자 뒷날 천황의 자리에 오른 스이코여왕마저 백제인이라고 단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밝히자면 이 두 사람은 이복남매간이다. 즉 아버지가 똑같고 어머니가 다르다.
이 대목을 좀더 자세히 지적해보자.
비다쓰천황은 병환으로 585년에 서거했다.
그래서 그 뒤를 이은 것은 비다쓰천황의 이복동생인 요메이(用明, 585~587년 재위)천황이었다.
요메이천황은 다름아닌 스이코여왕의 친오빠였다.
그러나 요메이천황은 몹시 허약해서 병에 시달렸고, 불과 2년간 왕위에 있다가 세상을 등졌다.
그후 그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스슌(崇峻, 588~592년 재위)천황이었다.
스슌천황은 요메이천황의 이복동생이다.
즉 스이코여왕과는 이복남매간이며 비다쓰천황과도 이복형제간이다.
스?천황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스이코여왕이다.
따라서 이복 남매 4명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이렇듯 4명의 남매 천황을 둔 친아버지는 누구였던가. 바로 킨메이(欽明, 538~571년 재위)천황이다.
백제인 킨메이천황. 그는 본래 6명의 왕비를 거느렸으며, 슬하에 25명이나 되는 왕자와 공주를 두었던 인물이다.
킨메이천황의 황후인 석희(石姬, 이시히메)가 낳은 왕자가 비다쓰천황이다.
두 번째 왕비인 견염원(堅홸媛, 기타시히메)이 낳은 남매가 요메이천황과 스이코여왕이다.
스이코여왕의 공주 때 이름은 취옥희(炊玉姬, 가시키야히메)였다.
따라서 스이코여왕에게는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킨메이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523~554년 재위)과 같은 인물임을 밝히는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가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킨메이천황은 백제인이며 동시에 왜국왕이다. 그런데 킨메이천황이 백제인일 뿐 아니라, 그가 다름아닌 백제의 ‘성왕’이라고 한다면 얘기의 진폭이 커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