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망을 꾸리며
내일이 해제일이다. 걸망을 꾸리며 방 안을 휘 한 번 둘러본다
한철 동안 나의 귀의처가 되어주고 아프거나 힘들 때 따뜻이 격려 해준 소중한 가사.
그리고 그 가사를 잘 모셔준 대나무 횟대
책상 위에서 항상 웃으며 나를 지켜주신 내가 그린 미소불
번뇌가 치성할 때 기운을 맑게 정화해준 향
절할 때나 포행 시 놓지 않았던, 도반이 준 백팔염주와 선배가 준 가야산 단주.
일기를 쓸 때나 법문집을 읽을 때 허리를 바르게 세위준 조그만 책상.
삐걱거리고 고장은 나 있었지만, 내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준 의자.
덜거덕거렸지만 화두를 다시 한 번 점검케 해준 문고리
방충망에 끼어 갈 곳을 잃었던 민들레 홀씨
내 신심을 푸르게 물들여 준 일인용 다기와 쌍봉차
물 끓이는 소리가 마치 오대산 금강연 폭포수 같았던 주전자
쓸모없었지만 밥통을 따뜻이 품어준 겨울 이불
내 발밑에서 가장 많이 밟히며 고생한 반 접힌 요
아픈 내 목을 참 잘도 받쳐주었던 베개.
더운 오후 절한 디음 땀에 젖은 몸을 시원하게 씻어준 샤워기
좁은 냉장고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준 조그만 선풍기.
며칠 몸살로 앓아누웠을 때 유일한 약이 되어주였던 아스피린이 담긴 비상약통
가끔 큰 소리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음식을 잘 보관해준 아기 냉장고
들어가기만 하면 무엇이든 뜨거운 몸이 되어 나오는 전자레인지
정진 중 신심이 퇴굴할 때마다 읽어보던 (몽산법어집).
-----이 모두가 방 안에서
내 공부길의 선지식이 되어줬던 물건들이다.
또 문살 밖에서 내 한 철 답답함과 적적함을 달래준,
제일 큰 위안이 되었던 마당가의 후박나무들
매일 열리고 닫히며 시간 가는 것을 일깨워준 강진만의 따뜻한 품
새벽녁, 청아한 노랫소리로 기운을 맑게 해준 숲 속의 새소리들
내 지친 영혼을 맑혀준 가끔 불어주던 문살 밖의 바람
빗소리와 함께 더운 여름을 식혀주던 지붕에서 떨어지던 낙숫물
소리 깊은 밤, 선실을 말없이 비취주던 푸른 달빛
앞마당의 이름 모를 들꽃들과 잡초들
방 앞 토끼풀 더미 속에서 한 철 내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네잎클로버 몇 개.
그리고 말없이 큰 의지처가 되어주었던 든든한 좌복에게 다시한번 감사한다.
이번 철 이 좌복 위에 홀린 뜨거운 눈물은
이 포단을 의지하여 구경성불하는 날까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정진이 잘될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기도 했고,
몸이 아파 괴로울 때는 하루가 한 철 가는 듯 지루하기도 했다.
이제 그 힘들었던 한 철을 정리하느라
걸망을 챙기다 보니 온갓 감회에 젖어 손끝이 떨려 온다.
건강한 몸이 되면 다시 한 번 살러 올지는 모르겠지만,
백련사 무문관 3호실, 그리고 1호실은
내 수좌 생활을 뒤돌아보고, 또 앞날을 점검해보는 좋은 한 철이었다.
8.22,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