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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벼랑
조 정 래
수술이 끝나고 사흘 만에야 혜주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서 제일 먼저 찾은 것이 남편 진섭이었다.
“여보, 어딨어요, 여보…….”
흡사 죽은 것처럼 사흘째를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던 혜주가 갑자기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 다급하게 소리친 것이다.
정맥이 파랗게 드러난 그녀의 가늘고 긴 팔은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엉? 뭐야…….”
창가의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진섭은 벌떡 일어서며 이런 두서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이내 아내가 사흘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음을 백 촉 전등이 켜지는 밝음으로 깨달았다.
“여보오오·…….”
진섭은 흡사 몸집 큰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를 지르며 아내의 침대로 내달았다.
“여보, 나야. 나 여깄어.”
진섭은 가슴에 수만 개의 촛불이, 수만 개의 별빛이, 수만 개의 꽃송이가…… 아니 그 누구에겐지도 모를 감사함과 고마움에 벅차면서 아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 여기가…… 여기가…….”
아내는 파르르파르르 떨고 있었다.
“여보, 당신은 살아난 거야. 여긴 병원이야. 안심해, 당신은 살아났어.”
진섭은 자신의 이 말이 마음에 안 들면서도 어떻게 다르게 나타낼 말이 없었다.
한마디 말로 아내를 안심시켜야 했고, 여태껏 끝도 없이 긴 구렁이처럼 자신을 친친 감고 있던 죽음의 공포를 떼쳐내는 데는 이 말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보, 트럭이, 큰 트럭이…….”
아내는 부르르 떨며 진섭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내는 사고 순간의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진섭은 한 바가지쯤 괸 고마운 울음을 꿀꺽 삼키고는 아내를 얼른 끌어안았다.
“여보, 안심해. 이젠 그때 생각하지 말어, 이렇게 무사하잖아”
“……”
혜주는 항시 먼 기적 소리 같은 여운을 남기는 남편의 목소리를, 언제나 솔잎 내음을 간직한 남편의 진초록 체취를 맡으며 분명 한 자신의 생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온 바다와 하늘을 불사르며 솟아오르던 태양의 그 현란하고 숨막히던 광경이 전혀 탈색됨이 없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건 살아 있음의 기쁨이었고, 살아감의 희망이었다.
신혼여행의 첫날밤을 보내고 남편과 나란히 서서 맞은 그 일출(目出)의 광경은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위한 축복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그 일출 광경은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있었고, 아홉 번째 결혼 날을 맞기까지 세 차례 그곳으로 여행을 갔었지만 태양은 다시는 옛날 같은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진정한 축복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듯이.
“불 좀 켜봐요.”
눈을 수십 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혜주는 말했다.
눈을 분명히 떴는데도 남편의 얼굴이 안 보이고 그때마다 눈을 깜박이면 전신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아픔이 손톱 끝, 발톱 끝까지 점을 찍듯이 번져나가는 것이었다.
“……!”
진섭은 섬뜩 긴장했다. 그러나 수십 번 연습해 두었던 대로 침착을 잃지 않았다.
“여보, 지금은 밤이 아니라 당신 머리를 좀 다쳐서 붕대를 감고 있는 거야. 갑갑하더라도 당분간 참아야 해.”
진섭은 나긋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얼굴은 이미 울고 있었다.
“머릴 다쳤는데 왜 눈에까지 봉댈 감지요? 눈도 다쳤나요? 뜨거나 깜박거리니까 못 견디게 아파요.”
진섭은 당황했다.
그리고 금방 마음이 허물어져버릴 것 같은 절망감이 덮쳐왔다. 금이 간 독에 철사줄을 동이듯 진섭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냐, 머리 때문에 그래. 같은 신경 계통이라서 영향을 받아 약간 통증이 생길 거라고 의사가 말하더구먼.”
진섭은 자신의 능란한 거짓말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약간이 아녜요. 너무 심하게 아파요.”
“여보, 조금만 참아 당신 깨났다구 의사 선생한테 얼른 알리고 올 테니까 좀 쉬고 있어. 말 많이 하면 피곤해서 해로워:”
진섭은 우선 자리를 피해야 했다. 더 거짓말을 꾸며대야 하는 마음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아내가 자신의 병세를 눈치 챌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사고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며 이 세상이 문을 닫아버리는 것 같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끌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비오니 끝이 아니기를, 제발 끝이 아니기를…… 살펴주소서 끝이 아니기를……. ‘끝’이라는 말이 말이 아니라 독사로, 지네로, 귀신으로 변하면서 쉴 새 없이 덤벼들고 있었다.
절대로 ‘죽음’이라는 말만은 떠올려서는 안 된다고 의식을 강제로 틀어잡으며 찾아낸 말, ‘끝.’ 그 말마저 흉물스런 것들로 변하여 정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말이 그대로 흉측한 것들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생전 처음의 무서운 경험이었다.
그 무서운 경험에 괴롭게 시달리며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내는 이미 수술실에 들어가 있었다.
긴 복도의 그 끝, 초여름의 익기 시작한 더위를 비웃으며 꽁꽁 얼어붙어 있는 네모난 콘크리트 터널 속에 서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우선은 그 누구에겐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고 싶은 심정 이었다.
이곳이 아닌, 드높은 병동을 돌고 돌아 후미진 곳에 자리잡게 마련인 그 음산한 단층집으로 향하게 될까 봐 얼마나 가슴이 재가 되었던가 울음마저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싸늘한 그 단층집의 촉수 낮은 전등 아래서 밤을 지키게 될까봐·…… 생각만으로도 전신이 좁쌀만 하게 오그라드는 공포였던 것이다.
아내는 ‘수술실’이라는 빨간 글씨의 아크릴 명찰이 붙은 문 저쪽 세상에 다섯 시간 20분이나 갇혀 있었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한 금씩 옮겨감에 따라 몸속의 피도 한 방울씩 말라가고 있음을 진섭은 보고 있었다 잔인한 무표정으로 초침은 어느 일순간도 돌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초침이 둥근 얼굴을 서너 바퀴씩 도는 것을 지켜보다가 숨이 가빠지면 진섭은 눈을 수술실로 돌리곤 했다. 빨간 색깔이 차갑다는 것은 전에 없었던˙ 느낌이다.
아내― 자신에게 있어서 그녀는 태양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지극히 짧디짧은 일순간, 1초의 몇백 분의 1처럼 짧은 순간 그는 유치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정색을 하고 생각했다.
‘나의 태양’이라는 생각이 유치하면 다른 적당한 표현은 없을까…… 그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서 생각해 보았지만 더 이상 적절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골똘히 생각하면 할수록 그 표현이 새롭게 느껴졌고, 그 이상 정확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당신 없는 세상은 물 없는 사막이요, 등대 없는 밤바다요…… 이렇게 시작해서 앙꼬(팥) 없는 찐빵이요로 이어지는 세속화 때문에 ‘나의 태양’이라는 생각이 언뜻 유치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의 입장에서 그 심정이 ‘물 없는 사막’이 되고 ‘등대 없는 밤바다’가 되는 것은 그 얼마나 절박하고 절실한 것이랴.
이런 깨달음은, 평소에 넌덜머리 나 하던 케케묵은 유행가가 어느 경우에 더없이 새롭고 신선하게 가슴에 부딪혀오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진섭은 평소에 예사롭게 지나쳐왔던 아내라는 존재를 이런 막다른 상황에 몰려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그녀가 진정한 자신의 ‘태양’이라고 밖에는 다른 표현이 없음을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태양― 그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아내는 스스로의 몸을 태워가며 그 빛으로 시집의 가난한 추위를 녹였고, 남편인 자신의 오늘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녀는 한 마리 새처럼 포르륵 날개를 치며 자신의 곁에 날아와 앉은 다음부터는 갑자기 삼손처럼 억센 기운을 발휘하여 줄기차게 생활을 엮어내는 마술 이상의 능력을 보여 왔던 것이다.
아내는 다섯 시간 20분 만에 수술실에서 놓여났다.
이동 침대에 반듯이 누워 수술실에서 놓여난 아내는 아내가 아니었다. 커다란 붕대 뭉치였다.
다섯 시간 20분, 그건 1만 9천 2백 초. 1만 9천 2백 방울의 피가 말라버린 탓인지 진섭은 자신이 창호지로 만든 허깨비처럼 느껴졌다.
“어디를…….”
수술 가운을 걸친 주치의 앞에 서게 되자 더 이상의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의사는 동문서답이었다. 아니, 그만큼 위태로웠다는 뜻일 것이었다.
“어디가…….”
“어느 한군데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으레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면 온몸이 멍든 과일처럼 되는 법이니까요. 헌데 특히 치명적인 데가 눈입니다.”
“눈이……?”
“그러니까…… 유리 파편들이 눈을 파고들었어요:”
“그럼 눈이!”
진섭 의 목소리가 뜨거워졌다.
“어렵습니다.”
의사는 진섭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자, 장……님.”
진섭은 주먹 쥔 손으로 입을 황급하게 막았다.
“파편을 제거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의사는 선서라도 하듯 엄하고 강하게 말했다.
마침내 장모님이 통곡했고, 처제가 얼굴을 감싸고 벽 쪽으로 돌아서며 흐느꼈고, 처남은 석고처럼 우뚝 선 채 긴 복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섭은 그들을 남겨둔 채 돌아섰다. 복도가 출렁거리고, 발은 두꺼운 스펀지 위를 걷는 것처럼 어지럼을 타고 있었다.
끝이 아니기만을 그렇게 간절하게 빌었는데, 이건 끝인가 아닌가 끝이 아닌 건 분명하다. 끝이 아니면 그럼 뭔가, 시작……? 그렇다, 시작이다. 그런데 시작치고는 너무 잔인한 시작이다.
붕대 뭉치인 아내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혼수상태, 진섭은 침대를 붙들고 비로소 울기 시작했다.
소리 낼 수 없는 울음을 울며 진섭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게 쏟아지는 눈물은 생활이라는 거대한 산에 붉은 속살이 드러나는 사태를 일으키고 있었고, 강물이 범람할 지경으로 홍수가 나서 소망·설계·계획·내일 같은 삶의 가재도구들을 송두리째 쓸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죽음의 문을 지나 그 마당에 서 있는 것처럼 하루를 꼬박 이틀을 꼬박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진섭은 아내 심장의 근무 태만을 감독하는 감독관처럼 침대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이틀을 보냈다. 그러면서 주기적으로 아내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보고는 했다.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심성의를 다하여 예기치 못한 사고와 그것이 빚어낸 뜻하지 않은 불행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너무 상심 마십시오. 이만하기 천만다행 입니다.”
다행은, 이 바보야. 아내는 두 눈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지 뭐예요. 하마터면 어떡할 뻔했어요, 글쎄.”
어떡하긴, 이 멍청하 내 아내는, 두 눈이…….
“이건 정말 천운이라구 상대가 트럭이었다는데 말야. 기운내, 기운.”
천운은, 이 천치야. 내 아내는 두 눈이…….
진섭은 견디다 못해 그만 소리소리 질러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고,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남의 불행을 나눠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남의 불행을 보고는 잠깐 소홀히 했던 자기 행복을 확인하게 되고, 남의 불행의 불씨가 자기에게 튀어오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안도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었다.
남은 고사하고 남편인 자신으로서도 아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처해 있는 불행에 속수무책인 것이다. 진섭은 새삼스럽게, 그러나 사무치도록 인간은 영원히 고독한 동물이라는 그 흔해빠진 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두 눈을 잃고 아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앞을 못 보는 아내의 손을 벗어난 집안은 어떤 꼴이 될 것인가.
상상조차 하기 끔찍한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암담한 생각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진섭을 괴롭히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빠른 속도로 의식은 하얗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막막하고 아득할 뿐이었다. 어떤 사람의 말이고 다 말이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일 뿐이었다.
장모의 말은 다 헐어빠진 자동차가 비탈길을 오르며 내는 것 같은 소리로 귀를 헤집고 들어서선 이내 하얗게 변해버렸다. 처남의 말은 성난 돼지의 꽥꽥거리는 소리로 귀를 파고들어선 이내 하얗게 변해버렸다. 처제의 말은 사탕 사달라고 졸라대는 철부지의 징징거리는 소리로 귀를 소란하게 하고는 이내 하얗게 변해버렸다. 누님의 말은 싸구려만 파는 시장 바닥의 왁자한 오리로 귀를 어지럽히고는 이내 하얗게 변해버렸다.
유일하게 말이 말로 들리는 것은 의사의 말뿐이었다.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1주일, 보름 한 달 이상 끌다가 깨어나도 이상 없습니다.”
“이런 템포로 회복되면 곧 깨날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의사의 말들도 이내 하얗게 변해버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말들이 하얗게 변하지 않으려면 아내가 눈을 다치지 말았든지, 다쳤더라도 의사의 힘으로 실명을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 의사는 이미 백기를 들고 말았다.
백기를 든 환자 앞의 의사는 도둑에게 잡힌 경찰의 꼴이고, 고해성사 하러 온 창부에게 유혹당한 신부의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의사가 도저히 신일 수는 없지만 인간이어서도 안 된다. 그들이 인간일 수 있는 경우는 가정에 돌아가서뿐이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그외의 시간에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드러낼 자격도 권리도 없다.
그들은 신과 인간과의 중간 모습을 한 존재여야 한다. 그건 그들의 직분이 갖는 사회적 책임인 것이다 그런데 의사는 이미 백기를 들고 말았디. 쥐들에게 포위당한 고양이처럼, 학생의 질문에 대답 못하고 야유당하는 선생처럼.
진섭은 하얗게 탈색된 의식 속을 끝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그 어떤 액체로도 해소시킬 수 없는 갈증에 허덕이면서. 이제 서른넷.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아직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우선, 죽음의 문전에 가 있는 것이 틀림없는 저 질긴 혼수상태에서 어서 깨어나야 하고, 그러나 그 다음엔…….
여기에 이르면 하얗게 탈색된 의식의 사막 한가운데서 갈증에 시달리다 못해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한 마리 짐승 같은 자신의 모습을 진섭은 참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로 어떻게, 하나도 아니고 두 눈 다 못쓰게 되었음을 알릴 것인가. 가지마다 총총히 박힌 가시들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늦가을의 탱자나무 숲을 알몸뚱이로 뚫고 지나가는 고통과 아픔이 이만할 수 있을 것인가 진섭의 가슴은 조각조각 금이 갔고, 조각조각 깨어져나갔고, 그 조각들이 다시 가루가 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앞에서 장모는 통곡해 마지않으며 딸의 신세 박복함을 줄줄이 엮어가며 산신령, 터주대감, 부처님, 하느님을 붙들고 늘어져 원망했다. 처제는 눈물 흔한 나이답게 연상 찔찔 짜가며 맞벌이로 부려먹은 것만도 너무한데 어쩌자고 시부모 병시중까지 들게 혹사시키다가 끝내 이런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마느냐고 제법 문자 써가며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누님은 누님대로 터무니없는 시집 우위의 악습을 상기시키고 역설해 가며 손끝만큼도 처가 쪽에 기죽거나 비실거리지 말라면서 뻔뻔스런 응원을 나서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아내는 기특하고 가륵하게도 죽음의 문을 박차고 나와 의식을 회복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 고마운 기쁨의 면전에 앞으로는 장님이어야 한다는 절망이, 아니 그 사실을 본인에게 알려야 하는 고문 같은 고통이 버티고 있었다.
병실을 나온 진섭은 담배부터 빼 물었다. 연기를 깊게 깊게 들이마셨다. 금방 가벼운 어지럼증과 함께 희뿌연 안개가 의식을 덮어왔다. 아무리 백기를 든 의사이긴 했지만 그래도 찾아갈 사람은 의사밖에 없었다.'
“아 그래요? 어서 가봅시다”
의사는 의외로 반가운 표정 속에 눈을 빛냈다. 의사의 그 따뜻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를 찾아오기 잘했다고 진섭은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환자한테 눈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순간 의사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까 급할 게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렇던가요. 그렇군요. 당신이 고칠 수 있는 만큼만 다쳐줬어야 하는 건데, 고칠 수 없도록 심하게 다친 건 순전히 이쪽 책임이군요. 맞아요, 당신은 당신이 말한 대로 ‘최선을 다한’ 것으로 책임을 완수한 거지요. 그래요, 어차피 장님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급할 게 없는 문제지요. 더구나 그 사실을 어떻게 환자에게 전하느냐는 전혀 당신이 알 바 없는 일이군요. 내가 실수했어요, 실수하구말구요.
처음 의사가 보의줬던 반가운 표정은 순수한 인간적 반응이 아니라 자기의 직무에 대한 지극히 사무적 반응이었다는 것을 진섭은 깨달아야 했다.
진섭은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에 싸였다. 그 외로움이란 곧 남자로서 느끼는 참담한 패배감이었다.
영원히 빛을 못 보게 된 아내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남편, 그런 자신의 무능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의 무능한 꼴은, 자기 아내가 서너 명의 괴한들에게 붙들려 윤간(輪姦)당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벌벌 떨고만 있는 남자의 꼴이나 뭐가 다를 게 있으랴 싶었다. 아내의 절망적 불행 앞에서 자신은 갈 데 없이 종이로 만든 허수아비인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사라는 직함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다른 피해자들보다 수월하게 피해 보상을 받는 것? 그렇다 고작 거기에 그치는 것이 현재 자신의 능력일 것이었다.
그러나 앞을 못 보게 된 이 암담한 불행 앞에서 몇 억, 몇 십억의 보상이 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지금 아내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똑같은 밀도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옛날처럼 건강한 눈을 갖는 것이었다.
“부인, 기분이 어떠십니까?”
의사가 아내의 맥을 짚어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고맙습니다.”
아내는 들릴락말락 인사말을 했다.
“이젠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맘 편히 갖고 안정만 하시면 됩니다.”
“저어……¨ 얼굴을 많이 다쳤나요?”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은 말이었다.
“아 아닙니다. 머리에 상처를 입었을 뿐 다행히도 얼굴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눈치 빠르게 대꾸했다.
진섭은 그만 창가로 돌아서고 말았다. 돌덩이로 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게 미어져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얼굴을 많이 다쳤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바로 아내의 남다른 섬세함이었다. 음악을 전공한 탓이었을까 아내는 바이올린 선율 같은 예민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예민성은 자신의 몸가짐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골고루 작용했다.
그런데 바이올린의 현이 그렇게 예민하고 섬세한 소리를 내면서도 질기기는 그 어떤 것도 당해낼 수 없듯이, 아내의 마음도 그 질기기를 어디에 비교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찰고무보다 더 질기고 강한 의지로 10년 가까운 세월을 직장과 가정이라는 두 개의 마차를 끄는 말 노릇을 줄기차게 해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장님 신세로 낙착된 것이다. 아니, 깨어나자마자 얼굴의 부상부터 걱정하는 아내가 자신이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 될 것인가.
진섭은 감당할 수 없는 죄의식에 몰렸다. 아내를 이렇게 만든 것은 순전히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솟구친 것이다.
그때 아내를 포기했었더라면…….
진섭의 눈앞에는 10년도 넘는 기억이 갓 물에서 건져낸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첫눈에 돈푼깨나 있는 집 자식으로 보였다. 색깔을 맞춰 입은 스포티한 차림하며, 살은 찌지 않았지만 윤기 흐르는 피부가 금방 그런 냄새를 풍겼다.
“당신이 최진섭이오?”
그 사내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진섭은 사내의 눈을 응시하며 맞받아 물었다
“그럼 남혜주 아시겠구먼?”
사내는 생김새와는 영 딴판으로 말이 거칠었고, 진섭은 순간적으로 이 친구가 혜주의 애인이 아니라 자신의 연적(戀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진섭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사내는 제법 거친 체하고 있었다.
“용건이 뭔데?”
진섭도 반말을 내던졌다. 이미 네깐 놈 정도는 샛밥거리밖에 안 된다 생각했던 것이다.
“이거, 제법 뻣뻣하신데? 결론부터 말해 두겠는데, 혜주한테서 손떼!”
사내는 눈에 힘을 모으며 사납게 말을 내던졌다.
“어설프게 유치하시군. 나더러 손떼라고 명령하지 마시고 당신도 혜주한테 손을 대보지 그래?”
“뭐라고? 이 새끼가!”
사내는 곧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진정하시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니 내 출신 성분도 알고 계시겠구먼. 나 이 세상 별로 무서운 것 없이 살고 있는 놈이야. 제발 유치하게 굴지 말라구. 우리 둘이는 일단 혜주한테 손을 내민 상태인 모양이니까 둘 중에 누구의 손을 잡느냐는 혜주의 선택에 달렸어. 우린 각자 그거나 확인하면 돼. 유치하게 날 찾아와 시비를 붙일 건 없는 일이야.”
진섭은 말을 마치자 그 사내의 앞을 지나쳐 교정의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내는 진섭의 서슬에 질렸는지 앞을 가로막지도, 더 무슨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여실한 패배의 표시였다.
역시 사내는 그 후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진섭은 혜주와 데이트를 계속하면서도 그 사내와 있었던 일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건 일부러 한 행동이 아니라 그 일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해야 옳았다.
그리고 1년인가 지나서였다.
“진섭 씨, 작년 이맘때 김경민이란 사람 만났었죠?”
혜주가 갑자기 물었다
“김경민……?”
진섭은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기억 못하세요? 나 땜에 학교로 찾아갔었다는데.”
그때서야 진섭은 윤기 도는 얼굴을 퍼뜩 떠올렸다.
“그 친구 이름이 김경민이던가?”
“어머, 그럼 진섭 씬 그 사람 이름도 모르고 있었어요?”
혜주는 너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이름을 안 밝혔으니까 모를 수밖에.”
“어머, 알고 싶지도 않았구요?”
“별로·…….”
“그 사람이 진섭 씨하고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 알았어요, 몰랐어요?”
“어떤 관계였나? 혜주를 가운데 놓고 싸우는 연적?”
“아이, 볼라요. 그런데도 이름이 뭔지도 알고 싶지 않았단 말예요?”
“사실인걸.”
“어머나, 그런 무관심은 나한테 그만큼 자신이 있어 생긴 건가요, 아니면 그 사람을 무시했기 때문인가요.”
“아마 둘 다겠지.”
“어머머, 요런 똥배짱!”
혜주가 눈을 홀기며 진섭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왜 갑자기 그 친구 이야기는 꺼냈어. 유서라도 써놓고 죽었나?”
“흉칙해요, 그런 말. 그 사람 며칠 전 미국으로 공부 떠났어요.”
“팔자 좋군:”
“떠나기 전에 꼭 한 번만 만나달래잖아요. 산 사람 소원 풀어주자 싶어 만났죠. 그랬더니 진섭 씰 찾아갔었다는 얘길 하잖아요. 진섭 씰 만나보고 그만 질려버렸었대요. 참 딱한 사람예요.”
“왜, 가슴 아픈가?”
“그래요.”
“그건 사랑인가, 모성인가?”
“몰라요, 잔인하기는.”
혜주는 아까보다 몇 갑절 아프게 진섭의 팔을 꼬집었다.
“아야야…….”
진섭은 아픔보다 몇 배 큰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7년인가가 지났다. 석간신문에 그가 공학박사 학위를 받아 귀국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1단 기사로 조그맣게 나와 있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진섭은 미안한 생각이 뭉클 솟는 것을 느꼈다.
“여보, 여기 당신 옛날 애인이 금의환향했구먼.”
진섭이 능청스럽게 말했고,
“진작 알고 있었어요. 받가워 미칠 것만 같네요.”
혜주도 진득하게 받아넘겼다.
“이 친구 그래도 독한 데는 있었구먼.”
“그럼 영 못 쓸 사람으로 알았었어요?”
“글쎄, 못 쓰게 보진 않았지만 어딘가 빈 데가 있는 것 같았어.”
“그게 그 사람의 장점예요. 악의가 없기 때문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당신이 이 친구하고 결혼을 했었더라면 당신도 굉장한 음악인이 돼서 귀국했을 톈데…….”
이렇게 말을 해놓코 보니 사실이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진섭은 언뜻 감정의 당황을 느꼈다. 그동안 아내는 너무나 심한 생활의 고생에 시달려왔고, 사회적 지위란 고등학교 음악선생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은 그 사람한테 끝까지 잔인하군요.”
아내의 무표정 한 대꾸였다.
“아니, 뭐 꼭 그런 뜻은 아니고…….”
진섭은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자신의 감정과 아내의 느낌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자신은 항상 아내에게 미안함과 죄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언뜻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고, 아내는 자기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다가 물러간 패배한 한 남자를 남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그 사람의 소식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신도 아내도 그를 까맣게 잊고 생활에 파묻혀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불행을 앞에 두고 갑자기 그 사람과의 옛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을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운명이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는 무척 편리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너무 잔인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어떤 경우에든 무표정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아내와 자신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데도 운명이라는 그 편리한 말을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번 지나가버린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만약’이라는 말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말은 더 필요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만약’ 자신과 만나게 되지 않았다면…… 공학박사가 되어 온 친구에게 갔었다면 아내는 오늘의 불행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터무니없고, 부질없는 생각인 줄을 다 알면서도 아내의 불행이 너무나 안타깝고 괴로워 진섭은 벌써 10년이 넘어버린 처음의 만남부터 아내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진섭의 심정은 검사가 되었을 때 아내에게 느꼈던 그 뜨거운 고마움과 똑같은 밀도의 것이었다. 아내가 벌어오는 돈이 아니면 속수무책 굶주려야 하는 실업자 신세로 두 번의 실패, 세 번째 만에 합격을 했을 때, 아내는 자신에게 있어 그대로 태양일 수밖에 없었다.
검사라는 직함을 가지고서도 자신이 아내에게 해준 일이 무엇이었던가. 그 선생질이라고 하는 고달픈 생활을 계속 시켜왔고, 끝내는 교통사고로 두 눈을 잃게 만들고 말지 않았는가.
자신은 남편이라는 이름만 붙이고 앉아 어느 때 한번 시원하고 흔쾌하게 남편 노릇을 했던 것인가. 아내의 일방적 희생만을 강요해 온 종이 허수아비―그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아내는 가엾게도 여자로서 보호받고 싶은 본능마저도 상실한 채 10년 가까운 세월을 노예처럼, 일소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아내가 느낀 여자로서의 슬픔이나 비애나 회의는 없었을까.
별 다섯을 어깨에 단 장군에게도 패배감은 있고 두려움은 있는 것이다. 아무런 저항 의식도 없는 죄수들을 제멋대로 다루는 검사라는 직책의 자리에 서서도 비참함과 한심스러움을 언뜻언뜻 느끼곤 했었다. 하물며 여자의 몸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의 살림살이를 도맡아야 했던 세월 동안 아내가 이겨내야 했을 슬픔이나 비애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결혼 생활이라는 것. 그건 분명 사회생활과는 반대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사회생활이 이성적 생활이라면 결혼 생활은 감정적 생활인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의 기준으로 보면 유치하고 하찮기 이를 데 없는 문제들이 결혼 생활에서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곤 하는 것이리라
아내는 가엾게도 그 감정으로 충만해야 할 결혼 생활을 마치 사회생활을 하듯 이성적으로 해낸 것이다. 결혼 생활을 해나가는 여자의 입장에서 가장 편리한 권리 주장의 무기인 그 ‘바가지’라는 것을 맘놓고 한번 긁어본 일이 없었다. 이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남편이 아무런 생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바가지조차 긁어볼 수 없는 불행, 아내는 그런 불행 속에서 오히려 남편의 감정을 다치게 할까 봐 신경까지 쓰는 이중의 불행을 겪으며 산 것이었다.
아무리 아는 게 많고 똑똑한 사람들이라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사회적 기준일 뿐 가정에 돌아가면 하나의 남자 하나의 여자가 되는 게 아닌가 아는 게 많은 부부라고 애정 행위를 하변서도 유식하게 할 수 있으며,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서 잠자리에서도 유명한 체를 할 수 있는가. 죽음 앞에서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듯이 부부의 애정 행위에는 바로 지위의 고하 유식의 유무가 문제 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아무리 배움을 많이 갖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일단 가정에 돌아오면 감정을 가진 여자인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그 여자의 자리를 잃고 살아온 것이다.
아내 된 여자들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남편의 사회적 지위, 윤택한 생활을 보장하는 경제력, 이런 것 말고도 또 있을 것이다. 지위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경제력이 미흡하더라도 그런 건 차츰 되리라고 뒤로 미뤄둘 수 있는 여유는 그날그날 확인되는 애정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백 마디의 말을 대신하는 남편의 따뜻한 포옹, 생일날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준 선물, 어느 날 갑자기 영화 구경이나 하자고 걸려온 전화 한 떨기 꽃송이거나 반짝이는 별처럼 귀여운 아이들의 끝없는 재롱…….
그런데 자신은 검사가 되기 전까지의 너무나 긴 시간 동안을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로서도 남편 노릇을 흔쾌하게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나서 변화가 있은 것도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못된 성격 탓으로 매사에 부드럽거나 다정하거나 따뜻한 감정 표현이 자연스럽지가 못했다.
돌이켜보면 아내는 자신을 만나 살아온 세월 동안 여자로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것에는 너무나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돌덩이로 남은 채로 아내는 두 눈을 잃고 만 것이다.
진섭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화단, 거기 아른거리는 대기 속에 나비 두 마리가 엉켰다가 떨어지고 다시 엉키고 하며 날고 있었다.
“……”
저 나비만도 못하게 살아오고는……. 진섭은 가슴 하나 가득 괴는 안개비 같은 울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하루에 한 차례씩 붕대를 바꿔 감기를 열두 번째 하고, 붕대는 더 감기지 않았다. 봉대가 감기지 않았는데도 감겼을 때와 마찬가지로 앞은 깊고 깊은 어둠이었다.
“간호사 솔직하게 말해 줘요. 내 눈에 무슨 이상이 있는 거죠.
혜주는 간호사의 손을 꼭 붙들며 물었다. 세 번째의 똑같은 물음인 것을 셈하면서.
“아녜요, 선생님. 봉대만 풀었지. 시신경이 회복되려면 좀더 있어야 되거든요.”
간호사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해 놓고는 이내 입술을 물었다. 그 입술에 연민의 빛이 가득했다.
“미스 강 그러지 말아요. 난 다 알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줘요. 미스 강도 알겠지만 여자의 직감이라는 거 있잖아요?”
혜주는 간호사의 손목을 더 꼭 잡았다.
“아니라니까요, 선생님. 신경과민이세요. 그렇게 신경 쓰시면 회복에 지장만 줘요. 안정하셔야 해요.
그러나 혜주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지극히 평정된 목소리로 지극히 간호사다운 말을 하면서 손은 왜 떨리고 있는 것인가.
“됐어요. 대답하기 힘들어하는 말, 다시는 묻지 않겠어요.”
“.……”
간호사는 직감했다.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절망적이라는 걸 알아차린 게 틀림없었다.
잡고 있던 손을 놀란 듯 놓아버리거나 갑자기 냉정해진 어조 같은 것을 그 이유로 들기에는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부정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어라고 말로 딱 꼬집을 수 없는, 굳이 말을 붙이자면 직업의식에서 비롯되는 직감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이 환자는 여자인 데다가 여학교 선생까지 하는 사람이었다.
간호사는 침대 머리맡에 붙은 환자 카드에 적힌 34란 나이 표시의 숫자가 유난히 커 보이는 걸 느끼며 말없이 돌아섰다.
이런 경우의 침묵이 환자에게 얼마나 잔인한 무기가 되는지 간호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의사의 함구령, 가족들의 안타까운 부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병명이나 상태를 알아야 할 환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침묵은 더 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혜주는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기절을 하고 말았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 수십 대의 차에 이리저리 떠받히고 있었다. 다리에서 강물로 곤두박이고 있었다. 펄펄 끓는 물에 불쑥 손을 담그고 있었다. 뱀을 만지고 있었다. 벽을 들이받아 나뒹굴어지고 있었다. 어머, 혜주야.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나 경미야 나 지선이야. 나 미숙이야 친구들의 놀란 목소리들만 귀청을 어지럽게 울리고 있었다. 엄마 세수하세요, 비누 여기 있어요, 엄마 반찬 놨어요, 어서 드세요, 엄마 성적표 가져왔어요, 어서 보…… 아니 아무것도 아네요. 엄마·…‥.
“안 돼, 안 돼, 안 돼……!”
끝없이 이어지는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혜주는 마구 소리쳤다.
“얘, 혜주야 왜 이러니, 정신차려라. 에미야, 에미.”
시름에 겨워 멍하니 앉아 있던 노인은 소스라쳐 일어나 버둥대는 딸을 붙들었다.
혜주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어둠뿐이었다. 또 눈을 번쩍 떴다. 마찬가지로 어둠뿐이었다.
“왜 그러니, 무슨 몹쓸 꿈 꾼 모양이구나. 에그, 온몸에 땀이 로구나. 쯧쯧쯧.”
혜주는 절망적으로 소리 없는 말을 부르짖었다.
“아니…… 너, 울고 있구나:”
노인의 가슴에 찬바람 한 줄기가 섬뜩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너 혹시 누구한테 이상한 소리 들은 거 아니냐?”
노인은 얼떨결에 쏟아놓고는 황급하게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요런 방정맞은 주둥아리, 무슨 이상한 소리냐고 따져 물으면 어찌할 것인가 겁에 질린 눈으로 딸의 입만 웅시하고 있었다.
“……”
혜주는 아까 간호사가 아무 대꾸 없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전신을 휘감아 돌리던 것 같은 현기증을 다시 느꼈다.
이빨을 앙다물었다 또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잃으면 또 그 무서운 기억들이 한 마리 한 마리 뱀이 되어 전신을 감아올 것이었다.
“엄마 아무것도 아네요. 무서운 꿈을 꿨어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으며 가라앉아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그래, 그래, 딴생각 말고 마음 단단하게 먹어라 그게 약이다.”
노인은 안심하며 딸의 창백한 이마에 맺혀 있는 식은땀을 자근자근 닦아냈다.
혜주는 이제 4면이 완전히 막힌 절망에 갇히고 말았다. 사흘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손톱 琶 발톱 끝까지 바늘로 마구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리며 실명(失明)의 공포를 느꼈었다. 그건 단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의식의 작용에 따라 전신으로 퍼져가는 그 예리한 아픔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자신은 택시 앞좌석에 앉아 있었고, 앞에서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갑자기 정면으로 달려든다 싶으면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후로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그 사고 직전의 상황이 눈을 못 쓰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떼치지 못하게 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의사한테 얼굴이 심하게 다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남편이나 의사의 말대로 머리의 충격에 의한 일시적 현상인지도 모른다고 믿었었다. 매일 봉대를 풀고 감으며 며칠이 지나는 동안 머리 치료는 별게 아니고 의사의 손은 눈에 오래도록 머무르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의사는 형식적이나마 좋아지고 있다거나, 곧 낫게 될 거라는 식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나 동생이 애써 만들어놓은 안온한 분위기가 의사가 들어오면 여지없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의사가 남겨놓고 가는 차가운 침묵에서 혜주는 실명의 공포를 여실하게 느껴야만 했었다.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억제하다 하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눈의 이상 유무를 간호사에게 물었을 때만 해도 간호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 말았었다.
눈의 이상을 부정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게 쾌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간호사에게 두 번째 확인을 필요로 했을 때는 그 상대를 누구로 할까를 여러 번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간호사를 선택하고 말았다.
만일 이상이 있다 해도 남편이 순순히 그 사실을 밝힐 리 없었고, 어머니가 어리숙하게 말할 리 없었고, 동생이 가볍게 입 놀릴 리 없었던 것이다. 결과가 그렇다면 괜히 그들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타인이니까 자꾸 물어보면 귀찮아서라도 사실대로 말을 해버릴 것 같았다
간호사는 두 번째까지도 쾌활한 목소리로 거짓말을 해주더니만, 세 번째에는 침묵함으로써 그 노력을 포기하고 눈에 이상이 있음을 분명히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잇달아 어머니는 모성의 단순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그 사실이 틀림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장님― 그건 곧 죽음이었다. 아니 죽음보다 더 암담한 종말이었다. 당해보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죽음이라는 게 뭐 그리 무서울 게 있는가. 잠을 자는 것, 잠을 자다가 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죽음이란 곧 영원한 잠이 아닌가.
다만 모든 죽음이 잠자는 동안에 오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다다르기까지 생존의 본능이 공포와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건강한 잠이 더없이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이 되는 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잠의 연장인 죽음을 가리켜 영원한 자유니 완벽한 자유니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은 죽음의 목전에 이르렀다가 두 눈만을 진상하고 목숨은 되돌려 받은 것이다. 느닷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차단된 암흑 속을 헤매며 죽을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못 보고, 사랑하는 애들의 얼굴을 못 보고, 남편의 와이셔츠가 구겨졌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철이 바뀌어도 애들의 옷 색깔을 골라 입힐 수가 없고, 식성 까다로운 남편의 반찬을 만들 수가 없고, 커가는 애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알 수가 없고, 아니 이런 건 다 그만두더라도 세수를 할 때마다 밥을 먹을 때마다…… 집안 식구들의 끝없는 짐일 뿐인 식물적 삶이 어찌 죽음보다 낫다 할 것인가. 그건 분명 죽음보파 더 암담한 종말일 것이 틀림없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왔다. 동생이 남편의 저녁을 가져왔고, 남편이 저녁을 마치자 어머니는 그릇을 챙겨가지고 동생과 함께 돌아갔다.
병실에는 남편과 둘이만 남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교대를 해서 남편은 벌써 보름 가까이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당신 몸이 형편없이 축났겠어요.”
혜주는 흩어지고 어지러워지는 마음을 간신히 다스리며 말했다.
“아냐, 여보. 곧 눈이 완쾌돼서 날 보게 되면 당신 놀랄 거야. 나 아주 씽씽해.”
남편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쾌활했다.
혜주는 감정의 숨바꼭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스무고개 재치문답 놀이가 아닌데 한 껍질 한 껍질 벗기는 식으로 고통스럽게 말을 끌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영영 당신 얼굴 못 보게 됐다고 그렇게 거짓말하심 안 돼요.”
혜주는 커다란 못으로 남편의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아픔을 견디며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여보, 그게 무슨 소리야!”
남편의 이 당황한 목소리에서 표정까지를 혜주는 환하게 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오늘 모든 거 다 알았어요.”
혜주는 이불 속에서 맨주먹을 꼭꼭 말아 쥐면서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 못나게, 교활한 척하지 마 그런 짓 당신답지 못해.”
높아진 언성에는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남편은 넘겨짚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여보, 나 지금 복잡해지고 싶지 않아요. 교활하게 넘겨짚고 어쩌고 할 여유도 기력도 없어요. 당신도 뻔한 사실 숨기고 감추느라고 더 이상 힘들어하실 것 없구요.”
무슨 알맹이처럼 엉켜오는 울음을 씹으며 혜주는 또박또박 말했다.
“도대체 누구야! 그따위 소리 씨부리고 앉았는 게 누구야!”
남편의 흥분은 순간적으로 도를 넘고 있었다.
“여보, 소리치지 말아요. 괴로워하지도 말구요. 어차피 나한테 알려야 될 일이잖아요:”
“여보'…….”
진섭은 아내를 끌어안았다.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 기적이 정말 기적처럼 아내의 눈에서 이루어지기를 밤낮없이 빌었다. 어린 날 읽고 들었던 동화 속에서 숱하게 일어났던 그런 기적이 아내의 눈에 나타나 아내의 눈이 다시 샛별처럼, 보석처럼, 꽃송이처럼 빛날 수 있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여보·… 절대 실망하지 말어. 옆에 내가 있잖아. 당신이 평생을 햇빛을 못 보고 살게 하진 않을 거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이 옛날처럼…… 옛날처럼 이 세상 모든 걸 보고 살게 할 거야. 절대 실망하지 말어.”
남편은 자신의 볼에 볼을 비벼대며 울었다.
볼에 번지는 남편의 눈물은 그대로 뜨거운 사랑의 즙이 되어 전신으로 퍼져나가면서 여태껏 쌓이고 쌓였던 고통과 괴로움의 쓰레기들을 말끔하게 태워 없애고 있었디. 그리고 남편의 한마디 한마디는 새빨간 혈서처럼 섬뜩하면서도 강렬하게 가슴을 파고들어 그대로 문신(文身)이 되고 있었다.
남편이 우는 것은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6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혜주는 남편의 그 모습만큼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혜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뜨겁게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는 남편이 다짐하는 데 따라 실망하지 않겠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참으로 신기하고도 간사스럽게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혜주는 새벽녘에 소스라쳐 잠을 깼다. 꿈에 쫓긴 것이었다.
꿈에서 남편은 사생결단 자기의 왼쪽 눈을 아내에게 줘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남편은 소리치며 수술실로 뛰어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들이 진을 치고 서서 남편을 제지하고 있었다.
이런 엉뚱한 꿈을 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혜주는 완강하게 부정하면서도 어젯밤 남편이 했던 말의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당신이 평생을 햇빛을 못 보고 살게 하진 않을 거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이 옛날처럼…… 옛날처럼 이 세상 모든 걸 보고 살게 할 거야.
만약 남편이 꿈에서처럼 생시에 그러기를 결정한다면…….
시집 식구 모두가 혈안이 되어 반대하고 나서기 전에 자신이 먼저 단호하게 반대하리라. 아니 시집 식구가 모두 남편처럼 결정을 내린다 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만으로도 자신은 이미 전보다 더 큰 밝음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남편은 자기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라 두 아이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불구를 나눌 수 있을 것인가.
혜주는 이렇게 마음을 작정하고는 또 그 현란하게 불붙던 일출을 보고 있었다.
최진섭이라는 남자ㅡ 그와의 10여 년 생활이 축축한 안개빛 서러움 위에 수십만 장의 사진으로 펼쳐지고 있었디. 상상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가난, 그리고 고생이 암벽에 부딪혀 오는 파도처럼 줄기차게도 이어진 세월이었다. 그래서 돌이킬 때마다 서러움이 바닥에 펼쳐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가을, 유독 서리가 일찍 내리고 차가운 안개가 자주 발목을 감던 어느 날, 그는 추운 플라타너스 낙엽처럼 불현 듯 자신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 추위 타는 한 잎 낙엽을 보는 순간 그때까지 태엽만 잔뜩 감겨 있던 자신의 운명의 시계는 작동을 하기 시작하고 말았던 것이디. 스스로도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이면서 운명의 시계가 재깍재깍 돌아가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현실의 시간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여자 판사가 되겠노라는 좀 괴팍한 꿈을 가지고 법대를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인 선미가 갑자기 찾아온 것은 밤 9시가 넘어서였다.
“내일 아침 8시 정각 청경원 문 앞에서야. 나도 얼굴을 모르는데, 그 시간이면 사람들이 없을 때니까 금방 알아볼 수가 있을 거야, 가방 든 학생이니까. 최진섭, 이름 잊지 말어. 나 그럼 갈게.”
선미는 두툼한 책 한 권을 괭개치다시피 하고선 자리에서 돌아갔다
혜주는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선미가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정리를 하고 보면 별로 복잡할 것이 없는 심부름이었다.
선미는 저희 교수의 심부름으로 M대학의 백 교수에게 책을 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백 교수의 연구실로 전화를 걸었더니 굳이 학교까지 오는 수고를 하지 말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 책을 전하기로 된 것이다. 백 교수를 돕고 있는 학생과 통화를 해서 장소와 시간을 약속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져 입원을 하게 되자 선미는 부랴부랴 혜주를 찾아와 심부름을 대신 부탁하고 간 것이었다.
혜주가 한동안 어리둥절했던 것은 선미의 지나치리만큼 철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까짓 책 한 권 전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아버지가 입원을 하는 경황 중에 밤 9시가 넘어서까지 이러고 다니나 싶었던 것이다. 선미의 이런 냉정함은 고등학교 단발머리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점이다. 법대를 다니며, 법전의 조문들처럼 차츰차츰 그 체질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11시까지만 학교에 가면 되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혜주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기집애, 아침 8시에 하는 미련한 약속이 어딨어. 두부 상자도 아닌데. 그것도 다방이라면 또 몰라. 창경원 정문 앞, 길 한복판에서…… 누가 법대생들 아니랠까 봐, 멋도 어지간히 없지.”
간단한 화장을 하며 혜주는 불평을 털어놨다.
버스를 내려 시계를 보니 8시 5분이 지나고 있었다. 저 앞 먼발치로 창경원 정문의 유연한 지붕 곡선이 시리도록 차갑게 맑은 가을 하늘에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왠지 싱그럽게 느끼며 혜주는 걸음을 빨리 했다.
한 남자가 청문 앞 꼭 중앙이 될 것 같은 지점에 우뚝 선 채 먼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직감으로 그 남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돌려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그 가방은 너무나 낡아 보였고 검정물을 들인 군인 작업복도 퇴색할 대로 퇴색해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혜주는 그 남자에게로 가까워질수록 난감한 심정이 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 피차 알아보기가 쉬울 텐데 그는 줄곧 당당한 모습의 동상처럼 고개를 곧게 들고 하늘만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상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러기는 싫었다. 만약 말을 꺼냈다가 그가 ‘최진섭’이가 아니면 그 무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못된 기집애, 이런 일을 다 시키고…….’
혜주는 자신도 모르게 선미를 원망했다.
혜주는 아주 천천히 그 남자의 앞을 지나쳤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창백한 느낌의 얼굴이었다.
코가 유난히 날카롭게 오뚝하다는 느낌이었다.
그의 앞을 지나쳐 두어 걸음을 옮기고는 예정했던 대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최진섭이를 찾습니까?”
굵은 목소리가 반쯤 돌아서고 있는 혜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네에, 그래요.”
혜주는 순간적으로 난감했던 감정이 확 풀리는 걸 느끼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일찍 나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최진섭 입니다.”
그 남자는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아주 무게를 지닌 정중함을 갖추고 있었다. 아니, 그의 태도보다도 목소리가 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굵은 그의 목소리는 이상한 울림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좀 늦은 것 같네요.”
혜주는 시계를 건성으로 보며 말했다. 그건 사과의 뜻이 아니라 마땅히 할 말이 없어 한 말이었다. 시간은 약속 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나 있었다.
“원래 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시간을 안 지키는 법이죠. 나처럼 시계가 없는 사람은 그런 실수는 안 합니다.”
그 남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농담인지 나무라는 건지 혜주는 얼른 가늠할 수가 없었다.
“됐습니다. 책 주시죠.”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어머!”
혜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쳤다.
왼쪽 팔에는 핸드백이 걸려 있고, 책은 오른쪽 팔에 끼고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전해줘야 할 바로 그 책이 없는 것이었다.
“이 일을 어쩌나, 그 책이…… 책이…….”
혜주의 머릿속은 마구 엉클어지고 있었다.
“버스에 두고 내리신 거 아닙니까?”
남자가 물었고, 혜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집에서 안 가지고 나왔단 말인가요?”
혜주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허 참 딱하시군요.”
혜주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있었다. 급히 나오느라고 집에 빠뜨린 것인지, 사람들에게 떠밀리다가 버스에서 잃어버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디.
“이걸 어쩌면 좋아요. 확실히 모르긴 해도 버스에서 잃어버린 건 아닐 거예요. 제가 금방 집엘 갔다 올 테니까 이 근방 다방에서 좀 기다려주시겠어요? 너무 죄송하지만…….”
“글쎄요,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 여유가 없는데요.”
남자는 무례할 정도로 잘라 거절을 했다. 혜주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럼 제가 학교로 가지고 가겠어요. 백 교수님 연구실을 가르쳐주세요.”
“그것도 곤란합니다. 교수님은 오늘 다른 대학 출강이시고, 저는 도서관에 들어가기 때문에 연구실은 오늘 문을 열지 않습니다.”
혜주는 그만 화가 치밀었다. 뭐 이런 건방진 녀석이 다 있어 하는 생각이 치민 것이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내일 아침 이 시간에 다시 만나도록 하는 겁 니다.”
남자가 제의했고, 혜주는 금방 마음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내일 뵙죠. 법관의 자리에 앉아 그런 실수를 하시면 무고한 생명 마구 잡게 될 겁니다.”
남자는 이 말을 남기고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멀어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혜주는 분한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여자가 건방지게 법대는 무슨 놈의 법대고, 법관은 또 뭐 말라빠진 것이냐 하는 식의 경멸이 들어 있었다.
나는 미안하지만 법대생 선미가 아니라고, 퀴퀴한 법조문 같은 건 딱 질색인 음악대학생인데 심부름을 나왔을 뿐이라고 변명 아닌 해명을 해대고 싶었지만 그 남자의 모습은 이미 한 개 점으로 시야를 벗어나고 있었다.
혜주는 그 길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남자의 말이 건방지고 주제넘은 것만은 아니었다.
책을 전해주러 나간 사람이 책을 안 가지고 나간 것, 이건 어느 누가 들어도 팔푼이 짓밖엔 안 되는 것이었다. 방앗간에 가면서 쌀을 안 가지고 가는 여자나 시장에 가면서 돈을 안 가지고 가는 여자와 뭐가 다를 게 있는가.
그런 여자가 법대를 다니고 그래서 법관이 된다면, 무죄가 될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사형을 시켜야 될 죄수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식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굵은 목소리― 법관의 제복을 입으면 더 우람하고 제격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 말고 혜주는 깜짝 놀랐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얄밉게도 책은 마루 끝에 놓여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혜주는 그 책 하나만을 오른쪽 팔로 꼭 감아잡고 집을 나섰다. 창경원 정문 앞에 다다른 것은 8시 5분 전이었고, 그 남자는 이미 나와 어제처럼 우뚝 선 자세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경원의 긴 담으로 이어지는 포도(鋪道)에는 손바닥보다 훨씬 큰 플라타너스 잎들이 무슨 슬픔의 덩어리처럼 뚝뚝 낙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늦지 않으셨군요.”
남자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시계가 없으시다며 정확하게 아시는군요.”
남자의 이마가 유난히 희다고 느끼며 혜주는 말했다.
“뭐 신통술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지요. 필요에 따라 시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죠.”
남자는 표정 없이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전 법대생 선미가 아네요. 그 앤 집안에 불상사가 생겨 제가 대신 심부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 그러셨군요. 그럼, 어제 제가 했던 말 취소하겠습니다. 제가 경솔한 결례를 했군요.’
남자는 난색이 되어 머리를 꾸벅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고 곱게 느껴졌다.
순간 혜주의 가슴에는 이상한 열기를 담은 물결이 꿈틀 일어나며 이 남자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사과, 말로만은 안 될 거예요.”
혜주는 책을 더 꼭 껴안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남자는 더욱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커피를 사세요.”
“커피요?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돈이 제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은 어느새 마술처럼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혜주는 언뜻 놀랐다 커피 살 돈이 없다고 말해 버리는 용기도 용기였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말을 하면서 저렇게 태연하다 못해 당당해 보일 수가 있을까, 참 묘한 남자가아닐 수 없었다.
“제가 빌려드릴 테니 가세요.”
이번에는 어떻게 나오나 보자 생각하며 혜주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밥값이라면 몰라도 커피값을 빚지고는 갚기 어려울 겁니다.”
남자는 혜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혜주는 그 말뜻이 무엇인지 얼핏 잡히지 않았다. 그건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의 눈 때문이었다. 그의 눈은 묘한 빛을 쏘아대고 있었고, 혜주는 그 눈빛이 무수한 화살이 되어 가슴으로 와 꽂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빚으로 남기지 마시고 사주시겠다면 달게 마시겠습니다.”
남자는 당당하게 말하며 창백한 웃음을 엾게 웃고 있었다.
“그러겠어요.”
혜주는 말하며, 이 남자는 나를 미치게 만들고 말 거야 하는 생각을 불현듯 했고, 그 생각에 너무 놀라 다리가 약간 흔들리는 현기증을 느꼈다
“어머머, 어쩜 좋으니. 내가 중매쟁이 노릇을 한 셈이 됐구나.”
선미는 그와의 관계를 다 듣고 나더니 이렇게 첫마디를 던졌다.
“근데, 너…… 그 남잔 어떻게 되는 거니?”
선미는 김경민과의 관계를 들춰내고 있었다.
“눈치 없는 기집애, 일처다부제가 아닌 세상에서 물으나 마나 한 얘기 아니니.”
“어머, 요런 뻔삔스럽고 정조 관념 제로인 기집애 봐라.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결혼을 했었더라면 넌 갈 데 없이 간통죄 감이야.”
“누가 법대생 아니랠까 봐. 그래서 그런 야만적인 법망에 걸려들기 전에 미리미리 대처하는 거다, 왜.”
“놀랬다 놀랬어. 거적이 씌워졌으니 그 눈에 뭐가 뵈겠니. 어쨌거나 가엾고 불쌍하게 된 건 김경민이뿐이구나.”
선미의 말마따나 자신에게는 거적이 씌워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2년 가까이 사귀어온 김경민에 대한 정이 어쩌면 그렇게도 하루아침에 싸늘하게 식어버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나 약간의 죄의식 같은 것조차도 느끼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랑의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사랑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킨 것일까 어쩌면 자신의 피 속에는 탕녀의 기질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기질이 발동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변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철저한 것인 줄은 예기치 못한 것이 아닌가. 만약 김경민이 쪽에서 이런 식의 변심을 해버린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역시 사랑의 상처라는 것은 일방적이고 잔인한 것이다. 아무런 보상도 치료 방법도 없는 것이 아닌가 잊는 것밖에는—.
“얘, 얘, 이건 진짜 농담이 아니고 진지하게 묻는 건데 말야. 너 김경민이하구 키스 정도는 한 사이 아니니?”
“……”
“그런 감정은 어떻게 처리되는 거니? 난 도대체 연애 경험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잖니.”
어느 날 선미가 정말 진지하게 물어온 말이었다.
“글쎄…… 너무 뻔뻔스럽고 잡스러운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말야. 그런 행위가 새 사람에게 전혀 죄가 된다는 느낌이 안 들어. 옛 사람한테는 더 말할 것도 없구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
“정말 그런 거 같구나. 근데 만약 말야. 새 남자가 뒤늦게 그런 사실을 알구 트집을 잡거나 끝내려고 하면 어쩌지?”
“글쎄, 그건 나도 잘 몰라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만약 김경민이 하구 해서는 안 될 일까지 저지른 상태라 해도 최진섭에게로 가는 건 주저하지 않겠다는 거야.”
“어머머, 그건 좀 너무했다. 어쩜 좋으니, 난 그런 감정은 도통 이해가 안 되니. 그래서 그게 들통나면?”
“몰라 그런 걸 따지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어. 만약 그런 경우가 되어 나중에 들통이 나서 버림을 받게 된다 해도 우선은 가고 보게 될 것 같애.”
“참 굉장하구나 역시 사랑은 좋긴 존 것인 모양이구나. 그 정도로 무모한 것이 사랑이라면 역시 간통죄는 악법이 틀림없고, 없애긴 빨리 없애야 되겠구나. 앞으로 많이 참작해 볼게.”
『육법전서』나 끼고 다니며 연애 같은 것엔 아예 거리가 먼 선미는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허탈한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일어섰다.
사랑은 어느 일순에 오고, 사랑의 개화는 불꽃처럼 맹렬하며, 그 불꽃에 타서 죽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더 아름다움이 있으랴 했던 낭만주의 어느 시인의 시를 읽었을 때 ‘어머 징그럽고 유치해라’ 하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은 어느새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경민한테서는 거의 느껴볼 수 없던 격렬함이 가슴에서 불로 타고 있었다. 김경민과는 전혀 다르게 진섭은 무서운 자력으로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진섭에게로 자꾸만 다가서며 그가 바짝 끌어당겨 주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해야 옳았다.
스스로 자제를 하기 위해서 냉정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김경민은 최진섭이라는 사람 앞에서 강렬한 태양 앞의 눈사람처럼 걷잡을 수 없이 녹아내리다간 끝내는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곤 했다.
최진섭에 비해 김경민이 객관적으로 모자라는 점은 결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흠집투성이인 쪽이 최진섭이었다. 김경민의 인물도 보통은 넘는 수준이었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답게 인간성도 맑은 편이었다. 집안의 경제력도 안정된 상태인데다가, 본인은 평생을 그런대로 순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최진섭은 흠이 많았다. 인물이나 사람 됨됨이는 일단 최상급이라고 덮어두고, 가정 형편을 들여다보면 말이 아니었다. 부친은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미장일을 해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형편이었고, 그는 손수 학비를 해결하지 않으면 당장 대학을 그만둬야 할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꿈은 법관이 되는 것이었지만, 이것처럼 불확실한 장래도 없을 것이었다. 몇 년이고 거듭해서 법관이 되면 좋지만 끝내 실패를 해서 신세 망치는 사람이 하나 둘이던가.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따질 줄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적 조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건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리석게 따지고 재보고 하는 조건들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객관에 반대되는 주관적 조건에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객관적 조건에 비해 주관적 조건이란 분명하고 명확하지를 못했다.
유행가 가사 속에 흔하게 나오는 ‘어쩐지’라거나 ‘내 마음 나도 몰라’라거나 하는 식의 표현으로만 주관적 조건은 객관적 조건과 맞서고 있었다.. 혜주는 이즈음부터 유행가 듣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음악대학생이 사랑을 주제로 한 유행가 듣기에 열중하는 것은 수녀가 춘화도(春畵圖)를 즐기는 것만큼이나 이율배반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대목대목이 안타깝게 절실한 동감을 주는데야 어쩌랴. 전에 유행가를 너무 혹독하게 쓰레기 취급했던 것을 과오로 뉘우쳤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제각기 존재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깨달음까지 얻게 된 것이다
별로 오랜 날이 지나지 않아 혜주는 김경민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앉아야 했다.
“그 남자도 우리 관계를 다 알고 있단 말야?”
김경민은 처음부터 남자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려 들었다.
혜주는 그의 ‘우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전신이 오싹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기왕 맞대고 앉은 자리니까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요. 내가 다 말했어.”
“뭐? 정말 우리 관계를 다 말했어?”
“그렇다니까요.”
“그런데도 그 친구는 정신없이……. 이봐 정말 우리 관계를 있는 그대로 다 말했단 말야?”
혜주는 그만 파르르 짜증이 타올랐다. 그는 무언가 선취권을 주장하려 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그렇게 비굴하고 역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경민 씬 지금 자꾸만 우리 관계, 우리 관계를 되풀이하고 있는데 거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뭐죠? 처음에 손을 잡고 그 다음에 키스까지 했다는 관계를 말하는 건가요?”
“……·!”
경민은 당황한 얼굴로 혜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당황한 침묵이 그 점을 시인하고 있었다.
“물론 다 말했어요. 숨겼다가 나중에 알게 되어 기분 나쁜 것보다는 미리 말하는 게 솔직하니까요.”
“요런 뻔뻔스런 계집애…….”
경민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손을 치켜들었다. 혜주는 눈을 감았다. 따귀 한 대쯤 맞을 각오를 하고 나온 자리였고 언행이 었다.
“한심한 것!”
이 말을 남기고 그는 자리를 떠났다 바로 여기까지가 김경민이란 남자였다. 손을 치켜들었으면 그 힘으로 내리쳤어야 했다 그런데 김경민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는 신중하고 자제력이 강해서 그러지 않은 게 아니라 그는 나약하고 가늘어서 ‘그러지를 못한 게’ 분명했다.
그의 이런 점이 2년 가까운 세월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최진섭의 출현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었다.
최진섭은 분명하게 커피 살 돈이 없다고 했고, 커피를 사주면 달게 마시겠다고 했다. 김경민이 그런 처지에 놓였더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물론 커피 살 돈이 없다는 말은 못했을 것이고, 커피를 얻어 마실 생각은 추호도 못하고, 여자에게 커피값을 빚으로 남겼을 게 분명했다.
진섭에게 경민과의 관계를 말했다는 것은 뻔한 거짓말이었다. 아직 그런 고백까지 해야 할 만큼 진섭은 달아오르지 않고 있었고, 만약 경민과의 관계를 말해야 될 필요가 있다 해도 병신스럽게 키스를 했다는 말까지 할 이유는 없는 것이리라. 아마 그 말을 하면 진섭은 “이 친구 영 엉터린데. 그래 그 기분이 어땠어, 나하고 하는 것보단 못했겠지” 하며 왈칵 입술을 덮어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김경민은 진섭을 학교로 찾아가기에 이르렀고, 그 사실마저도 진섭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장본인 경민에게 듣게 되었다. 그런데도 진섭은 전혀 경민을 개의치 않았다. 꼭 기차 화통처럼 크고 강한 심장을 가진 사내였다.
졸업과 거의 때를 같이해서 김경민이 갑자기 유학을 떠나게 되자 혜주와 진섭의 관계는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노출과 동시에 집안의 반대는 거세게 일어났다 집안에서는 김경민과 짝이 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섭에 대해서 알게 되면 될수록 부모들의 반대는 심해지기만 했다
“아빠 절 좀 도와주세요. 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아예 어머니는 말상대가 안 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도와주고 이해할 일이 따로 있지. 이눔아 철딱서니 없이 사랑 타령은 무슨 놈에 사랑 타령이냐, 다 듣기 싫다”
모든 것에 다 관대하고 이해의 폭이 넓었던 평소의 아버지도 그 문제에 있어서만은 냉정했다.
부모의 이런 얼어붙은 태도 앞에서 형제들의 도움이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이 아버지나 어머니 그 어느 쪽에도 먹혀들 리가 없었다.
“언니 심정은 이해할 수 있어. 그치만 반대가 너무 강하잖아 언니가 포기해야 할 거야.”
“포기?”
“저쪽에선 언제라도 좋대나 봐, 언니가 맘만 돌리면.”
“너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니? 너 당장 신분을 분명히 밝혀. 내 편이니, 엄마 편이니. 스파이질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난 몰라 저쪽 의사가 그렇다는 것만 알아둬.”
“비린내 나는 자식. 더럽게 못나고 병신 같아 보이는구나.”
혜주는 나오는 대로 쏴질러 버렸다. 그러면서 작정하고 있었다. 식구들을 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진섭의 짝이 되고야 말겠다고.
“참 답답한 분들이구먼. 지금까지는 내 인생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인생이었잖은가.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앞으로의 가능성에 점수를 주실 만도 한데.”
진섭이 약간 시무룩해서 한 말이었다
“우리 빨리 결혼해 버려요.”
혜주는 느닷없이 말했다.
“……”
진섭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혜주의 눈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서는 눈부신 빛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아버지의 벌이는 세 끼 먹기도 벅찬데…….
“진섭 씨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저도 벌겠어요. 4년 동안 배운 재산이 있잖아요.”
“후회하지 않을까……
“아니오.”
“가난 그리고 고생이라는 건 센티멘털이 아니야. 얼음판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은 고통, 그것이 가난인데.”
“이겨낼 수 있어요. 진섭 씨만 곁에 있어준다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은 그 올가미에 목이 걸린 것을 끝없이 환희하며 주위의 모든 것들을 무모하리만큼 단순하고 용감하게 외면해 버렸다. 말로만 들었던, 그야말로 무허가 판잣집에 사는 그를 얻기 위해서 끝내는 설득되지 않은 친족을 버려야 했다.
그때부터 엄동설한 같은 가난과 고생이 시작되었다. 눈만이 형형하게 살아 있는 남편 진섭은 법관이라는 드높은 탑을 가난의 빙판 저 끝에 세워놓고 세월을 정지시킨 사람이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작정했던 대로 자신이 돈벌이를 나서기로 했다. 막상 그 뜻을 밝히자 남편은 이빨 자리가 옆 턱에 드러나도록 입을 꽉 다문 채 그 빛으로 충만한 눈을 모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다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서 음악 선생으로 취직을 하고는 돈벌이를 시작했다.
혜주는 음악 선생으로서 돈을 만들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해냈다.
가난, 네까짓 게 뭔데, 누가 이기나 보자. 혜주는 이런 작심으로 대들고 있었다.
아귀처럼 돈을 벌어다가 시집 식구들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먼저 식생활에서 가난을 몰아내려 했고. 시부모의 옷매무새에서 가난을 떼쳐내려 했고, 시동생들의 등록금과 잡비를 때맞춰 줘서 가난을 항복시키려 했다.
학교가 끝나고 피아노 레슨 세 곳을 돌아 집에 오면 으레 밤 10시가 다 되곤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온몸은 물에 녹아내리는 각설탕처럼 흐물흐물해지는 것이었다. 잠은 잠이 아니라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늪이었다.
하루 종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책에 시달렸을 남편이 딱해서 무슨 이야기고 오래 하고 싶었지만, 가위늘리듯 덮쳐오는 잠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아침이면 온몸을 실컷 두들겨 맞은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리며 눈을 떴고, 몸을 추슬러 간신히 일어나 보면 얼굴이며 손발이 부어 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이런 고생의 옆에는 남편의 뜨거운 눈빛이 항상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시집 식구들의 따뜻하고 푸근한 정이 겨울 샘물처럼 김을 올리고 있었다. 친구들의 모임 같은 데는 나갈 만할 시간 여유도 없었고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생활의 재미라는 것은 흥미 있는 소설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 가는 것 같았다. 힘겹고 고달프기는 할지라도 노력을 바치는 만큼 변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1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느 날 동생이 예고도 없이 학교로 찾아왔다.
“왜, 집안에 무슨 일 생겼니?”
혜주는 대뜸 불길한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찾아올 친정 식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 언닌 생각보다 행복한가 부다.”
동생은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식구들은 다 안녕하시니?”
“다 아무 일 없어.”
“근데 너 왜 이렇게 맥 빠져 보이니? 무슨 일 있어?”
“별일은 아니구 행복한 언니 얼굴을 보니까 그때 내가 언니 편이 못 돼준 게 더 미안해. 난 이제 겨우 그때의 언니 심정을 알 것 같애.”
혜주는 직감적으로 동생의 신변에 변화가 있음을 느꼈다
“너 혹시 애인 생긴 거 아니니?”
“역시 언닌 빠르네.”
동생은 숨기지 않으며 멋쩍게 웃었다.
“어떤 사람인데?”
혜주는 갑자기 어른스런 동생을 느끼며 물었다.
“언니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난 언니처럼 부모 속 안 썩이려고 했거든. 근데 그게 뜻대로 잘 안 될 것 같애.”
동생은 눈자위가 빨갛게 되었다. 그 남자를 생각할 때마다 안쓰러워지는 안타까운 정의 아픔이리라.
“사랑은 당사자들의 선택의 권한이야. 서로가 서로를 같은 비중으로 필요로 하면 되는 거야 여건이고 조건이고 하는 것들은 다 액세서리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계속 사귀면서 시기를 기다려. 부모가 바라는 조건이 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이 되는 건 아니니끼. 그리고 부모의 자식 사랑은 맹목적이지 않니.”
“여자의 인생이 뭔지 어지러워 죽겠어. 난 지금 언니가 부러워.”
동생은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혜주는 그런 동생이 대견하기만 했다. 울적한 기분을 풀지 못한 채 동생이 돌아간 다음 혜주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행복이라는 정의만큼 모호하고 아리송한 것도 없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겪은 고생은 결혼하기 전의 24년 동안 겪은 것의 갑절도 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때 한시도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고, 동생의 눈에도 행복하게 보인 것이었다.
그려나 동생이 자신을 모델로 하여 사랑을, 남자를, 삶을 잘못 판단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남편은 시험에 두 번 실패하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대로 세 번째 시험 준비를 계속했다. 그런 남편의 야윈 어깨가 그때처럼 강하고 실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남편은 결국 세 번째 시험에서 법관의 문을 열고야 말았다. 대학 재학 중에 한 번 실패한 것까지 합하면 네 번째만의 승리였다.
“여보, 법관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남편이 꼭꼭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했을 때 혜주는 느껴 울고 말았다. 그동안 주저앉고 싶고 내던지고 싶었던 어느 순간들의 고통과 좌절이 말끔하게 씻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 기쁨이 그대로 남아 있던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전화가 학교로 걸려왔다. 선미에게서 였다.
“요런 못된 기지배야 트럭으로 하나 가득 축하를 보낸다.”
선미는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고마워.”
“어떠니, 이쯤 됐으니 나한테 중매턱이나 소개료를 톡톡히 내야 되지 않겠니?”
“물론 내고말고.”
“그럼 뒤로 미룰 것 없이 오늘 당장 만나자.”
“오늘? 글쎄, 시간이…….”
“그럴 줄 알았어. 오래 시간 뺏지 않을 테니까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커피나 한잔해. 내가 느네 학교 가까이 갈 테니까”
이렇게 전화를 끊었다. 선미는 중매턱을 뒤늦게 먹으려는 것이 아니고, 무슨 할 말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약속한 다방으로 서둘러 나갔다
“나, 시집가기로 했어.”
선미는 언제나 결론부터 말하기 좋아하는 성미대로 불쑥 말을 꺼냈다
“결혼?”
너무 의외의 말이라 혜주는 멍한 표정으로 선미를 건너다 보았다.
“왜, 나하곤 안 어울리니?”
“그런 건 아니지만, 법관의 꿈은 어떡하고?”
“집어치우기로 했어.”
“아니 왜?”
“삼세번. 그것으로 능력 평가는 충분하잖니? 난 한계야. 생각해 봐. 느네 남편 같은 찰거머리 남자들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덤벼드는데 나 같은 여자 주제에 어림이나 있겠니. 10년을 해봤자 도로 아미타불일 건 너무나 뻔하고, 그래서 이번으로 세 번 실패하면 그 기념으로 시집을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어.”
“그래, 잘했다. 근데 상대는 어떤 남자니?”
“돈푼깨나 만지는 집안 자식이야. 즈네 아버지 회사 맡으려고 지금 실습 중인 풋내기 사업가”
“어머, 잘됐다 얘.”
“실망하지 않고?”
“실망은 왜?”
“너처럼 뜨거운 선택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중매니?”
“그렇다니까. 서넛 중에서 조건 좋은 데루 고른 거야. 추하지?”
“추하긴, 얘는. 그래두 어딘가 좋으니까 결정을 했을 것 아니니.”
“나두 몰라.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세 번씩이나 안 될 시험 치르느라 진땀 빼지 말구 너처럼 화끈화끈한 연애나 해보고 나서 그 친구한테 시집을 가는 건데. 요새는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들구 심통이 나구 영 엉망이야.”
“죄받을 소리 그만둬라, 얘. 날짜는 잡았니?”
“보름 남았어.”
“한창 바쁘겠구나”
“바쁘기만 했지 실속은 하나도 없어.”
“여자에겐 그게 바로 실속 있는 일이야. 사실 법관이 되면 뭐 하겠니, 여자 일생인데.”
“여자 여자 하지 말어라 얘. 난 요즘처럼 여자로 태어난 것이 서러울 수가 없어.”
“어쨌든 축하한다. 나 레슨 갈 시간이야.”
“기집애, 대통령보다 더 바쁘구나”
“사는 것 같지 않아”
혜주는 일어섰다.
“난 니가 부러워, 고생스럽긴 하지만 얼마나 보람스럽니. 네 손으로 하나하나 성(城)을 쌓아가고 있으니.”
선미는 한동안 혜주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그런 얼굴에는 대학 시절의 패기 같은 것은 다 사라지고 50대로 떠밀리고 있는 여자의 적막이 서려 있었다.
선미가 중매결혼을 한다는 것도, 상대를 고르는 데 조건을 중요시했다는 것도 약간은 놀라운 일이었다. 다소 나이가 든 탓이었을까, 시험에 세 번쯤 실패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철이 들어버린 것일까 어쨌거나 제각기 다른 궤도를 따라가게 마련인 게 인생살이인 것이었다. 아무쪼록 선미가 행복하기를 빌었다.
남편의 꿈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혜주는 직장을 그만두진 않았다. 재산세를 내는 집 마련 등 해결해야 될 생활의 조건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무리한 생활의 부담을 넘겨 남편이 시궁창인지 진창인지 구분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걷는 법관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이런 자신의 뜻을 과분하리 만큼 고맙게 받아들였고, 주위의 빈축을 살 지경으로 남편은 곧고 바르게 법관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기도 남편의 뜻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가졌다. 집은 아기가 태어나기 넉 달 전에 마련되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를 무허가 집에서 자라게 할 수는 없었다.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이런 일들을 대하며 남편은 그저 놀라고 송구해 할 뿐이었다
친정 식구들을 결혼 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첫아들을 낳은 병원에서였다. 5년 만의 해후였다
“몹쓸 것, 이 에미 가슴에 그 큰 못을 박더니만…… 그래, 그간 고생이 얼마나 많았니.”
어머니는 손을 붙들고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서 계셨다.
5년이라는 세월을 단절하고 살아온 혈연, 내리사랑이라고 했었다. 가난한 집, 전혀 가능성을 알 수 없는 사내에게 딸을 보내놓고 어머니가 밤낮으로 종종거려야 했을 조바심이 어떠했을까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남편은 신뢰감을 더해가는 법관이 되고 있었고, 지난해부터는 직장 생활을 그만 하기를 권유하고 있었디. 그건 더없이 반가운 남편으로서의 책임과 권리의 선언이었다 물론 자신도 정년퇴직의 나이까지 교직 생활을 한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정년은 고사하고 10년 근속의 한 돈쭝 금반지를 받게 될까 봐 그전에 물러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는 ‘2년만 더’라는 유예를 받았고, 금년이 그 마지막 해가 된 것이다.
시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진 것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증세는 심상치 않았다. 보름 가까이 최선을 다했지만 병세는 누그러질 줄을 몰랐다. 혜주는 매일 학교가 끝나는 대로 병원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때부터 밤 10시경까지 간호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남편은 그 시간에 집을 출발해 병원으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밤을 새우고 아침 7시에 집으로 와서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10시가 조금 넘어 병원을 나왔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택시를 탔다 뒷자리에 앉았다가 운전사가 멋대로 술 취한 두 남자를 합승시키는 바람에 앞자리로 옮겨 타야 했다.
택시는 강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밤이 늦어 있었고, 모든 차는 팔매질당한 돌처럼 달리는 게 아니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창을 꿰뚫고 들어왔다. 순간 차가 출렁하는 걸 느끼며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눈을 뜨니·…… 앞은 어둠… ….
돌이켜보면 스스로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싸움닭처럼 맹렬하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생리일을 예고하는 우중충한 괴로움 같은 건 느낄 겨를도 없이 그것이 비쳐서야 수습을 하는 식으로 살아온 나날이었다. 안개빛 물보라로 피어오로던 피아니스트의 꿈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사랑이라는 형체도 틀도 없는 것을 쫓아 하루아침에 돌변해 버렸을 때 친정 식구들이 받은 충격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산다는 것의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평생을 곤충만 쫓아다니다가 생애를 마친 사람의 의미를, 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부부가 시골 벽촌에서 토담학교를 경영하는 의미를 깨닫게 된 것도 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쳤어, 언니는 미쳤어” 동생의 공박에 “그래 난 미쳤다."
담담하게 수긍해 버린 것도, 삶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제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그렇게도 생기 있게 이끌어온 건 남편이었고, 자신은 님편을 향해서 끝없이 방향을 바꿔가는 해바라기였다. 남편과 나란히 누워 있는 어떤 시간에 이 남자가 대체 무엇이길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었다. 알기 전까지는 완전한 타인이었던 남자였는데……. 그런 순간적 회의는 결국 끊임없이 분출하는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나서 나흘 동안은 불면 증세가 씻은 듯이 없어져 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낮이면 수시로 남편이 자기의 한쪽 눈을 이식하는 무모한 일은 저지르지 말아야 할 덴데 하는 불안감을 갖고는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그런 일 저지르지 말라고 남편한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날도 남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싱그런 사람으로 옆에 와 섰다. 남편은 손을 쥐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당신 모레 퇴원하게 되는데 오늘 그 일을 마쳤어. 마침 절친한 동창이 있어서 당신이 일착으로 접수된 거야. 기증자가 서너 명 있다니까 당신이 빛을 보게 되는 건 시간문제야.
혜주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자신은 눈은행에 첫 번째 등록이 되었고, 현재 살아 있는 서너 명의 기증자 중에서 누구든지 제일 먼저 죽는 사람의 눈을 자신이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들뜬 목소리가 술주정꾼의 게걸거리는 소리로, 시장 바닥의 잡다한 소음으로, 그러다가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남편의 최선을 다한 행위는 그날 밤부터 여지없이 불볕처럼 따가운 불면을 몰아왔다.
―당신이 평생을 햇빛을 못 보고 살게 하진 않을 거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이 옛날처럼…… 옛날처럼 이 세상 모든 걸 보고 살게 할 거야.
남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은행에 일착으로 접수시키는 게 아니어야 했다. 이건 친정아버지 정도가 고안해 낸 최선이어야 했고, 남편의 최선은 자기의 눈 하나를 이식시키겠다고 나서는 것이어야 했다.
“여보, 걱정 말어. 내 눈 하나를 줄게.”
거짓이어도 좋았다. 겉치레라도 좋았다. 이 말 한마디만 했었더라면 평생을 어둠 속을 더듬거려도 아픔이 없었을 것이다.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어서도 험악한 꿈에 시달려야 했다. 퇴원하기 전까지 이틀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넘기고 나면 그대로 토해지고 말았다.
“너 왜 이러니, 딴 병이 생긴 거 아니냐. 나 이러다 말라 죽겠다.”
친정 어머니는 애가 탔다.
혜주는 마음이 하얀 공백 상태가 되어 장님으로 퇴원을 했다.
“수면제 없이 잘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장복은 금물이니까”
의사의 당부였다.
일거일동이 타인의 것이어야 하는 장님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흘을 꼬박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혜주는 화장대 위를 더듬어 수면제병을 찾아 들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이 불쑥 다가들었다간 차츰차츰 멀어져가고 있었다. 억지 잠을 자기 위해 먹었던 양의 열 배나 스무 배쯤 먹고 영원한 잠을 자고 싶었다.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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