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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마5:7) [산상보훈 : 다섯째 복- 여덟째 복 ]
사람의 마음은 날 때부터, 냉랭[차겁고 싸늘]하고 어둡고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하게 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음이라.”(요일4:19).(MB 21.3)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롭”(출34:6)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가치에 의해 취급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해주기 위하여, 그분의 풍성한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원한을 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벌을 주려 하지 않으시고 구속하려 하신다. 그분의 섭리를 따라 나타내시는 엄격함도, 실은 완악한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고통을 씻어 주고 그들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 주고자 심히 갈망하신다. 하나님께서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출34:7)으심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죄는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신다.(MB 22.1)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벧후1:4)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일치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남을 교화[가르쳐 바름] 시키기 위해서는 힘을 쓰되, 남을 정죄[죄가 있다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영혼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분께서 거하시는 곳은 어디나, 자비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MB 22.2) 그리스도인은 잘못을 범하는 자들, 시험을 당하는 자들, 궁핍과 죄의 희생물이 된 가련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 그들을 도와 줄 가치가 있을까 하고 묻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그들을 도와 줄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그는 가장 가련[가엽고 불쌍]하고 가장 비천[비루하고 천박]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면서까지 구원하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시켜 화목[평화로운 관계]의 봉사를 하도록 하신, 영혼들을 본다.(MB 22.3)
긍휼히 여기는 자는 불쌍한 자들, 고난 중에 있는 자들, 압박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가난한 백성]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공정하신 품성의 의]는 도포[선비의 평상복장]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빈곤]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실재로 행]하여 주었으며”(욥29:12~16).(MB 22.4) 생애 [인생살이]자체가, 고통스런 투쟁[고난]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늘 부족[가난함]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불신을 나타낸다. 자신들에게는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투쟁하는 고독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친절한 말과 동정의 표정[행동표현]과 감사의 표시는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과 같을 것이다.
동정의 말 한 마디 친절한 행동 하나는, 피곤한 어깨에 무겁게 지워져 있는 짐을 치워 줄 것이다. 따라서 사심이 없는 모든 친절한 말과 행동은,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다.(MB 23.1)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구제[도와줌]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의 생애에는, 동정심을 가지는 데서 오는 만족스런 평안, 즉 즐거운 만족이 있다. 영혼 속에 거하시고 사람의 생애에 뚜렷하게 나타나시는, 성령은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동정심과 자비심을 불러일으켜 준다. 그대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질병치료 때]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시41:1~3).(MB 23.2)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봉사로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는 자는, 누구나 우주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분과 연결된다. 그의 생애는 변함없는 언약[약속]의 황금고리[황금같은 관계]로써, 하나님의 생애와 하나로 이어진다. 주님께서는 고통과 궁핍[빈궁하고 모든혜택이 끊어짐]의 시간에, 그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가장 어려운 시간에, 긍휼히 여기시는 구주의 자비 안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고, 영원한 거처로 영접 받게 될 것이다.(MB 24.1)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섯째 복]
‘유대인’들은 의식상 청결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였기 때문에, 규칙들이 대단히 번거로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규칙과 제약과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불결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기심과 악의에 의해 심령에 얼룩지는, 오점[더럽고 추한점]을 깨닫지 못하였다. (MB 24.2) 예수님은 이 의식상 청결이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들 중 하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마음의 청결[맑고 깨끗함]은, 필요하다고 지적하신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성스러운 거룩함]”(약3:17)이다.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곳 거민이 될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이 청결해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주의한 행동과, 무례한 말과 조잡[잡스럽고 품위없음]한 생각을 멀리 하는 경향이, 차츰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면, 말과 생각과 행동이 순결하고 고상하게 될 것이다.(MB 24.3)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8)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다만 항간(巷間:소문)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순결,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육욕[성욕]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목적과 동기가 진실하며, 교만과 자아 본위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사심[이기심]이 없고, 어린애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MB 25.1)
성질이 같아야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품성의 원칙이 되는 자아 희생적 사랑의 원칙을, 생애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사단에게 기만당한 마음은, 하나님을 포학[모질고 사납제]하고 잔인[인정없고 잔혹]한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의 이기적 특성은 물론, 심지어 사단의 이기적[악한] 특성까지도 자비하신, 창조자의 특성으로 간주[그렇게 이해하게]된다. 그분께서는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50:2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전체적이고 징벌적[죄의 형벌을 더한 벌칙]인 성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분의 충만한 은혜의 보고(寶庫"진리은혜 창고)인, 성경 역시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하늘처럼 높으며 영원[영생복락]에 이르게 하는, 성경 상 진리들의 영광을 분별[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비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사53:2)는 분으로 생각한다.
예수께서 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계시로 사람들 가운데 계셨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분에 대하여,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요8:48)고 주장했다.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완전히 눈이 어두워져서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오신, 그분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외로우신 마음]하게 다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분이 완전히 이해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하늘뿐이었다.(MB 25.2)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악한 자들은 그분을 바로 쳐다볼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의 임재의 빛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되지만, 불경한 자들에게는 죽음이 된다.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히10:27) 것이 된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분의 얼굴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절실하게 간구]하게 될 것이다.(MB 26.1)
그러나 성령이 거하심으로, 정결[성스럽고 깨끗]하게 된 마음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바위틈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때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나타나지 않을 때이다.(MB 26.2)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22:11).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믿음을 통해,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매일의 경험 가운데서, 그분의 섭리[창조주의 만물을 다스리시는 은혜]에 나타나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의 [온유하시고 거룩한]품성을 통하여, 그분을 이해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또 그분이 보내신 분에 대한 진리를, 잘 이해하고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개해 주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구속주로 받아들이되, 새롭고 절친[아주 친하고 다정]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렇게 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품성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을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이 자신들을 통해 반영[드러내어 표현]되기를 갈망[간절히 바라게]한다. 그들은 그분을, 회개한 아들을 포옹하고자 원하는 아버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늘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MB 26.3)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으로 창조된 업적[위대함]과, 우주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사물들을 통하여, 창조주를 식별[위대하신 능력으로 구별]한다. 그들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더욱 분명히 읽게 된다.
지혜 있고 현명한 자들에게 감추어진 진리들이,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된다. 진리의 아름다움과 귀함이 세상의 현자[현인, 학식높은 자]들에게는 식별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행하고자 하는, 믿음과 단순함이 깔린 열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끊임없이 펼쳐지고 이해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신의 성품에, 참예[믿음으로 참여]하는 자가 됨으로 진리를 분별한다.(MB 26.4)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주신 시간 동안, 마치 그분이 눈앞에 계신 것처럼 생애 한다. 그들은 또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고, 이야기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장차 불멸[영생의 존재]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13:12).(MB 27.1)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일곱째 복]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사9:6)이시다. 그러므로 죄가 깨뜨린 화평을 이 땅과 하늘에, 회복시키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누구든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마음을 여는 사람은 이 하늘의 화평의 참여자가 된다.(MB 27.2) 이외에는 평화의 기반[터전]이 달리 없다.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은혜는 적의[적대하는 마음씨]를 제거[없게]하여 준다.
왜냐하면 분쟁[다툼]을 완화[진정]시켜 주고, 심령을 사랑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없다. 질투가 마음속에 있을 수 없고, 좋지 못한 추측이 용납될 수 없으며, 증오[미운마음이 서로]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하늘의 평화에 참예한 자이며, 그 복된 감화를 사방[온 세상]으로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다. 화평의 정신이 세속적인 투쟁으로 피곤하고 거칠어진, 사람들의 마음에 이슬[촉촉함]과 같이 내릴 것이다.(MB 27.3)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평화의 기별[영생의 소식]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내진다. 자신도 몰래 조용히 거룩한 생애의 감화를 끼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것이다. 언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자는, 누구나 화평케 하는 자이다.(MB 28.1)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화의 정신은, 그들이 하늘과 연결[성령과 교제]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달콤한 향기가, 그들을 두르고 있다. 생애의 향기와 품성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요일4:7).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9,14).(MB 28.2)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꼭 필요할 때 내리는 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미5:7).(MB 28.3)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0).[여덟째 복]
예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의 영광과 부를 얻고, 시련이 없는 생애를 맞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시는 대신에, 세상이 그들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극기[자신을 다스리고]와 굴욕[업신여김 받고 모욕 당함]의 길을 걷는 특권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MB 29.1)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신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적[대적 마귀]인 원수들의 연합세력[정치권과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종교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은 단숨에 해치우려는 마음으로, 동맹을 맺고 평화의 왕을 대적하기 위하여 대오[군대의 편성된 열과 오]를 가다듬었다.
그분의 모든 언행[말씀과 행동]이 하나님의 자비심을 나타내었음에도 불구[그럼에도 상관없이]하고, 세상과 같지 않은 그분의 모습이 더할 수 없는 적의를 품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 악한 정욕이 발휘[떨쳐 드러내 범죄]되도록 방종[제멋대로 행함]을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가장 격렬[맹렬]한 반대와 적의[대적하는 마음과 적대]를 불러일으키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다. 의와 죄, 사랑과 증오, 참과 거짓 사이에는 억제[스스로 자제]할 수 없는 갈등[대립의 분쟁]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결의 미를 나타낼 때, 그것은 사단의 나라에 속한 백성을 빼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악[사단마귀]의 왕이, 그것을 대항[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박해[조직적 학대]와 치욕[수치심과 창피함]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어 있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원칙 곧 그 아래 깔려 있는 정신은, [사람중에 첫 죽음의]‘아벨’ 시대이후로, 지금껏 주님의 택한 자들을 살해해 온 바로 그것이다.(MB 29.2) 사람들이 하나님과 조화[잘 어울리는 상태]를 이루고자 애쓸 때, 그들은 "십자가"에 대한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하늘의 법칙에 순종하는 모든 자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대오(隊伍)를 벌이고 있다. 그러므로 핍박은 슬픔의 원인도 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MB 29.3)
주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시련[어려운 고난의 단련]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고는 약속하지 않으셨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주셨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힘]이 있으리로다.”(신33:25).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만일 그대가 예수님을 위하여 시뻘겋게 단 풀무 속을, 지나가도록 요구당한다면 그분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통과한 이적]‘바벨론’에서 진실한 세 사람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그대 곁에 계실 것이다.
구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굴욕과 치욕을 당할 때마다 기뻐할 것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위해 받는 고통을 달게 여긴다.(MB30.1)
각 시대를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해 왔다. 그는 그들을 고문하고 죽였으나, 그들은 죽음으로써 승리자가 되었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사단보다 더 강하신 분을 나타내었다. 사단은 고문하고 몸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은, 건드릴 수 없었다.
그는 감옥의 벽 속에 감금시킬 수는 있었으나, 정신은 속박[구속하여 박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둠[죄악세상] 저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경미]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특별히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MB 30.2)
하나님의 영광 곧 그분의 품성은, 그분께서 택하신 자들에 의해 시련과 핍박을 통해 나타난다.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게 된다. 그들은 세상의 좁은 길을 걸으며, 고난의 도가니[끓어 넘치는 고통]에서 정결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쓰라린 투쟁을 경험한다.
그들은 극기를 감내해야 하며, 처절한 실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죄의식을 일깨워 주고, 죄로 인한 비애[비통하게 느끼는 슬픈상태]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므로, 그들은 죄를 가증[가엽고 증오]하게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됨으로, 그들은 그분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 선지자는 거룩한 이상(異像:계시장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를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 하시 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 시도다.”(계15:2,3).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하나님의 성막]을 치시리니.”(계7:14,15).(MB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