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중에서 │ 줌파 라히리
내가 구입한 첫 번째 이탈리아어 책은 영어 풀이가 들어간 포켓 사전이다. 1994년 나는 생애 처음으로 피렌체에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곤 보스턴에 있는 ‘리촐리’란 이탈리아어 이름의 서점에 들렀다.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되고 아름다운 서점이었다.
이탈리아는 난생처음인 데다 피렌체를 전혀 모르지만 여행 안내서를 사지는 않았다. 친구 덕분에 벌써 묵을 호텔 주소도 알아놓았다. 학생이라서 돈이 없었던 나는 그래도 사전이 가장 중요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선택한 사전의 겉표지는 찢어지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는 녹색 비닐 재질이다. 가볍고 내 손바닥보다 더 작다. 세숫비누 크기만 한 사전이다. 뒷면이 이탈리아 단어 약 4천개를 수록했다고 적혀 있다.
우피치 박물관의 한적한 갤러리를 돌아다니다가 여동생이 모자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난 그 사전을 펼쳤다. 영어 부분을 찾아서 이탈리아어로 모자가 어떤 단어인지 익혀뒀다. 분명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겠지만 이러저러해서 난 우리가 모자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박물관 경비원에게 말했다. 놀랍게도 경비원이 내 말을 알아들었고 우린 금방 모자를 되찾았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이탈리아에 갈 때마다 이 사전을 지니고 다녔다. 난 사전을 늘 가방 안에 넣고 다닌다. 길을 찾을 때나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갈 때, 신문 기사를 읽으려 할 때면 단어들을 찾는다. 사전이 날 안내해주고 보호해주고 모든 걸 설명해준다.
사전은 지도이자 나침반이 된다. 사전이 없다면 길을 잃을지 모른다. 몹시도 든든한 부모 같아서 난 사전 없이 외출할 수가 없다. 사전이 마치 비밀과 계시를 담은 성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전 첫 장 한쪽 구석에 난 이렇게 썼다.
“시도하다(provare a) = 노력하다(cercare di)"
이 조합, 이 어휘 방정식은 내가 이탈리아어에 대해 시도한 사랑의 은유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끈질긴 시도, 끊임없는 시험 이외에 다름 아니다.
사전을 처음 구입하고 난지 20년 후 나는 마침내 오랫동안 거주할 목적으로 로마로의 이주를 결심했다. 나는 떠나기 전 로마에 몇 년 살았던 친구에게 언제라도 단어를 찾아보려면 휴대폰 앱 같은 이탈리아어 전자사전이 필요한지 물었다.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머지않아 이탈리아어 사전 하나로도 충분할 거야.”
친구 말이 옳았다. 로마에 거주한 지 두 달이 지나자 그리 자주 사전을 참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점차 들었다. 외출해도 사전은 가방 안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결국 사전을 집에 두고 다니게 됐다. 그게 큰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해방감을 맛본 동시에 상실감도 느꼈다. 적어도 조금 내가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 출처 : 줌파 라히리 소설집, ☜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15~17쪽, 마음산책, 2015
줌파 라히리「사전」을 배달하며…
어릴 때 저는 ‘사전 중독자’였습니다. 종일 방에 틀어 박혀 혼자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 시간 대부분을 이런 저런 사전을 들여다보는 데에 사용했지요. 왜인지 하필이면 옥편을 가장 좋아해서 당시 꽤 많은 한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요. 그때 무엇이 저를 사전 속의 세계에 몰두하게 했는지 가끔 궁금해지곤 합니다. 아마 사전 바깥의 세계, 그러니까 진짜 현실 세계가 막막하고 두려웠던 것 같아요. 그러다 사전을 펼치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들과 언어들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얼마나 안정감이 느껴지고 편안했는지 모릅니다. 이탈리아어와 사랑에 빠진 작가 줌파 라히리가 ‘이 작은 책(사전)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고 하는 말이 마냥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 겨울에는 오랜만에, 그것이 어떤 외국어이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모국어에 다른 방법으로, 한발 더 가까이 가는 길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학집배원 소설가 정이현 2016-12-15 (목)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