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전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최용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유명우 사무총장이 한국권투위원회(KBC)에서 물러난 사실을 아느냐며, 형식은 사퇴지만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지인진을 비롯해 많은 권투인들이 유명우 전 사무총장의 사퇴와 관련해 신임 회장인 김주환 회장에게 절차를 밟아 공식 항의를 할 것이라며 자세한 내용을 취재해 달라는 부탁도 덧붙였습니다. 수년간 복싱을 취재했던 <일요신문> 유병철 스포츠 전문위원이 곧 취재에 들어갔고 유명우 전 사무총장과 김주환 회장의 입장을 제대로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신문이 나오기 직전에 유명우 전 총장의 사퇴 소식이 알려졌지만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기사를 게재합니다. - 이영미 기자
“싫다는 사람을 필요하다며 영입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다시 나가라고 하느냐?”(유명우 측) VS “할 말이 많지만 말을 아끼고 싶다. 조직의 수장으로 상식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예우를 갖춰 유명우 사무총장을 대했다”(김주환 회장)
한국 최고의 프로복싱 스타플레이어 출신으로 지난 7월 한국권투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유명우 씨가 최근 돌연 사퇴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0월23일 KBC의 새로운 수장이 된 김주환 회장의 인사 조치에 반발한 것으로 확인됐다. 4개월여의 짧은 단막극으로 끝난 유명우의 행정가 변신, 그리고 사퇴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풀어봤다.
사건의 실체는 ‘간단’, 하지만 해석은 ‘복잡’
지난 7월 9일 유명우는 프로복싱계 선후배들로부터 만장일치 형식으로 KBC 사무총장에 추대됐다. WBA 주니어플라이급에서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 36연승(통산 38승1패 14KO), 정상에서의 화려한 은퇴, WBA 올해의 복서 선정(1991년) 등 유명우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세계적인 선수였다. 또 은퇴 후에도 사업가(요식업)와 복싱 프로모터로 비교적 성실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대인관계도 좋아 복싱계 선후배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런 유명우였기에 KBC가 모시다시피 그를 영입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7월 당시 유명우 사무총장 영입의 ‘총대를 멘’ 사람이 바로 김주환 당시 KBC 수석부회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유명우 KBC 사무총장 발탁설(說)’은 지난해부터 나돌았다<일요신문 2008년 8월3일자 보도>. 하지만 당시 김철기 회장 휘하의 KBC사무국 내에서 이견이 많아 계속 미뤄져왔다. 결국 2009년 7월 김철기 회장이 출연금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진사퇴하고, 김주환 수석부회장이 회장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전격적으로 ‘유명우 사무총장’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런데 4개월여 만에 이번에는 김주환 회장과 유명우 사무총장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명우 사무총장은 지난 4개월여 동안 KBC의 행정업무를 총괄하면서 자기 사람 2명을 KBC 직원으로 고용했다. 그런데 지난 10월 23일 공식적으로 KBC회장으로 취임한 김주환 회장이 이 두 명을 사실상 해임조치했다. 이에 유명우 총장이 반발하고, 사표를 낸 것이다.
유명우 전 사무총장은 <일요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정말 잘해보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런데 (김주환)회장님과 기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수족(手足)과도 같은 직원들을 특별한 이유 없이 자르는 것은 나더러 나가라는 얘기가 아니냐?”며 사퇴이유를 밝혔다.
‘복싱의 간판’ 유명우 VS 행정가로는 자격미달
‘유명우 총장이 저렇게 처참하게 당하는데 전부 나 몰라라 지켜주지 못하는 우리 권투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어느 권투인이 그러더라고요, 자른 게 아니고 본인이 사표낸 거라고. 김주환 씨도 그렇게 주장하는 모양이던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지 맙시다. <중략> 권투인들이 바보입니까? 저는 똑똑하지 못하지만 회장 인사권이라는 것이 열심히 근무 잘하는 직원들을 이유없이 자르는 것은 아니지요. 특별히 비리가 있거나 잘못을 했다면 정당한 인사권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이유없이 직원을 자르는 것이 권투위원회 회장에게 주어진 인사권한의 목적이 아니겠지요.’
이상은 풍산체육관의 마방렬 관장이 실명을 밝히며 KBC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유명우 사무총장 낙마(落馬)에 대해 반발하는 권투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유명우 전 사무총장도 “답답하다. KBC 내에서 기존의 세력들, 그러니까 구시대적인 사람들의 입김이 여전히 작용한다. 원로들로 후원자 역할만 하면 되는데…”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한편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말을 아끼던 김주환 KBC 회장은 많은 내용을 털어놨다.
“취임하고 보니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할 정도로 KBC 통장에 잔고가 없었다. 취임 후 이것부터 해결했다. 두 달 동안 월급 밀리는 일이 없었다. 2011년 말까지, 2년2개월의 잔여임기 동안 정말이지 봉사하는 마음으로 KBC를 바로 세우고 싶었다. 그런데 직원들의 업무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건 인사권을 가진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사람은 A와 B 둘인데 한 사람은 수습기간이 끝나고 정식발령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한 사람은 사표를 받기로 했다. 유 총장에게 누가 될까봐 B 직원에게는 12월 말까지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내년 1월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물론 유명우 총장에게는 회장의 자존심도 버리고 수차례 함께 일하자는 제한을 했다.”
이어 김 회장은 다소 충격적인 에피소드도 몇 가지 더 소개했다.
“사무총장이 아니라면 다른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제안을 유 총장이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그러더니 ‘제가 못나서 그러니 이제 복싱계를 떠나겠다’며 정중하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KBC 사무실에 걸려있는 역대 챔피언의 사진 중에서 자기 사진을 떼어냈다. 선수로서의 유명우는 정말 대단하지만 행정가로는 좀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유명우 사무총장은 4개월여 동안 ‘봉사’를 했다고 강조한다. 즉 일부 판공비는 받았지만 급여는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김 회장은 해석이 달랐다. “유 총장은 제대로 상근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나오고 싶을 때 나와서 일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급여를 줄 테니 제대로 상근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자기 가게도 있고, 체육관도 있고 그런지 내 요구에 응할 형편이 안 됐던 것 같다.”
어쨌든 기대가 컸던 유명우 사무총장의 KBC호는 갑자기 항해를 중단했다. 이와 관련해 심지어 김주환 회장이 정관에 명기된 선거절차를 거치지 않고 회장이 됐다는 문제제기까지 나올 정도로 현재 반발이 거세기도 하다. 그래도 결론적으로 현 체제에서는 유명우가 다시 KBC에서 일을 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이게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영원히 권투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단은 좀 쉬겠지만 다시 좋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유명우의 말처럼 아쉬움만 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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