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의(Potsdam Conference)

포츠담 회의(Potsdam Conference) 또는 포츠담 회담, 포쓰담 회의, 포쓰담 회담은 나치 독일 항복 후 1945년 7월 17일 ~ 8월 2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정상이 모여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를 결정하기 위한 회담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3대국의 정상 회담이 열린 것은 이것으로 3번째이며, 마지막이었다. 회의 끝에는 포츠담 협정이 책정되었다.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이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한 선언이다.
이 회담에서는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고, 합의 내용은 "포츠담 선언"으로 공포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인 처칠,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회담에 참여하여 선언에 서명하였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서명하였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카이로 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
— 포츠담 선언, 제8항
제1~5항: 서문.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 인민과 일본 인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
제6항: 군국주의 배제.
제7항: 일본 영토의 보장 점령.
제8항: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제9항: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 전쟁 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 존중의 확립.
제11항: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제12항: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묵살해서, 이에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도 8월 8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참전하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8월 폭풍 작전)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 군부는 항복을 결의하여 10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였으나 지도부의 분열로 항복 결정을 번복하였다가 다시 항복 번복 결정을 번복하여 항복하였다. 결국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1945년 8월 10일 발표된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대하여 일본에 항복의사에 대한 수락을 통보하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다른글)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회담(1945. 7. 17~8. 2)
주요참석자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또는 회담 도중 총리가 된 클레멘트 애틀리), 요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이 회담에서는 유럽 평화협정의 내용과 절차를 논의했으나 평화조약을 서면화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 임무는 외무장관 회의로 넘어갔다. 3거두(巨頭)와 그들의 외무장관 및 참모들의 주요관심사는 패전국 독일의 즉각 통치, 폴란드 서부 국경, 오스트리아 점령, 동유럽에서의 러시아 역할, 배상금, 일본과의 전쟁 등이었다. 이 회담에서는 대체로 옛날 전시 회담에서 볼 수 있었던 우호와 친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각 나라는 오로지 자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다. 특히 처칠은 스탈린의 속셈과 완강한 태도를 의심했다.
포츠담 선언은 독일에 관해 "연합국은 독일 국민들에게 민주적·평화적 기반 위에서 궁극적인 생활 개선의 기회를 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얄타 회담에서 결의한 4개 지구가 설정되어 각각 소련·영국·미국·프랑스의 점령군 총사령관이 관할하기로 했다. 베를린·빈·오스트리아 역시 4개 점령지구로 나누어졌다. 4개 연합국 대표로 구성된 관리위원회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총괄하여 다루기로 했다. 그 정책은 얄타 회담에서 결정된 무장해제(demilitarization)·비(非)나치화(denazification)·민주화(democratization)·비중앙집권화(decentralization)·비공업화(deindustrialization) 등 '5D'를 지향했다. 배상금은 각국 점령지에서 걷기로 되어 있었으나, 러시아는 점령지에서 나는 농산물과 그밖의 천연자원 대신 서부 지구에 있는 공업설비 중 10~15%를 가져도 된다고 허용되었다. 폴란드의 서쪽 국경은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으로 결정되었으며 이전의 동프로이센 일부가 폴란드로 귀속되었다. 이때문에 그 지역에 살던 독일인 수백만 명이 독일로 옮겨가야 했다. 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 정부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며, 스탈린은 연합국이 발칸 제국에 간섭하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또한 그는 1921년 터키가 점령했던 땅을 되돌려 받을 것과 다르다넬스에 군사기지를 설치하려고 했지만 둘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신무기'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7월 26일 일본에 무조건 항복할 것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눈여겨볼 가치가 없다"며 거절당했다. 그러나 미국이 원자폭탄 2개를 투하하고 소련이 전쟁에 개입하자, 8월 10일 일본 정부는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