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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官之交(다관지교)
多:많을 다, 官:벼슬 관, 之:어조사 지, 交:사귈 교.
어의: 사다함과 무관랑의 사귐이라는 말로, 사다함의 친구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친구인 사다함도 7일 만에 따
라 죽은 고사에서 유래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을 만큼의 깊은 우정을 이른다.
문헌: 삼국사기
신라의 사다함(斯多含)은 내물왕(奈勿王)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급찬(級湌) 구리지(仇梨知)이다. 본래 진골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 풍모가 수려하고 지기(志氣)가 분명하므로 주위 사람들이 화랑으로 천거하니 마지못해 응했다. 낭도(郎徒)가 된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에 달했으며 사다함은 그들 모두에게서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해 가락국(駕洛國:가야)을 정벌할 때 나이 15세의 사다함이 종군하기를 청했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지 않았으나 그 뜻이 확고하므로 귀당비장(貴幢裨將. 지방 단위 부대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출전하도록 했다.
사다함이 가락국 국경에 당도하여 먼저 원수(元帥)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앞장서 전단량(栴檀梁. 성문 이름, 양은 가락국 말로 문을 가리킴)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하였다. 그곳 주민들은 갑자기 신라 군사들이 쳐들어오므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그래서 쉽게 가락국을 점령하였으며 결국은 멸망시켰다.
군사들이 개선하여 돌아오자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을 인정하여 가락국 사람 3백 명을 하인으로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받는 즉시 모두 방면해주었다. 또 토지를 하사했는데 굳이 사양하므로 왕이 강권하니 알천(알천)의 불모지를 청해 받았다.
사다함은 무관랑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한 친구였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먼저 죽자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다가 7일 만에 그를 따라 죽었다. 당시 사다함의 나이 17세였다.
사람들은 사다함과 무관랑의 의로운 정을 기리며 사다함의‘다’와 무관랑의‘관’을 따 다관지교(多官之交)라 불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茶山之冊(다산지책)
茶:차 다, 山:뫼 산, 之:어조사 지, 冊:책 책.
어의: 다산의 책이라는 말로 정약용의 횔발한 저술 활동에서 유래했다.
자기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경우를 칭송하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다산선생(茶山先生)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영조 38년, 경기도 광주(廣州)의 마현(馬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기용되자 상경하여 열 살 때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수학하고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감명을 받아 민생(民生)을 위한 경세(經世)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다음은 그가 일곱 살 때 지은 글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운 차이를 알겠다.>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 예리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약용의 눈높이는 이미 산의 아름다움이 아닌 멀고 가까운 거리를 본 것이다. 어린 나이에 과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다산의 글을 보고 아들이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았다.
다산은 22세 때인 1789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1794년도에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나중에 형조참의를 지내고 규장각의 서지 편찬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실력을 갖추어 출세의 길로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이 전적으로 그의 편만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의 불행은 1791년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함께 시작되었다.
천주교인이었던 그는 같은 남인이었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으로 처남 이승훈(李承薰)과 함께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천주교와 함께 들어오는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는 당파 싸움의 와중에서 더욱 거세졌다. 그리하여 이른바 황사영(黃嗣永) 백서 사건이 일어나 다산은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겨우 목숨을 건져 전라남도 강진康津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고문을 당할 때 이렇게 말했다.
“법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형벌을 가하는 것은 백성을 잡을 목적으로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
그는 백성에 대한 박해와 가렴주구를 강력히 항의하였으며 평민의 인권 보호를 위해 힘썼다.
유배지 다산 산정에서 19여 년 동안의 귀양살이는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곳에서 백성들과 더불어 살며 현실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또 경서학(經書學)을 중심으로 한 학문을 깊게 연구하고 체계화하였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고 실학을 집대성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책 대부분이 귀양살이 때 쓰여졌다. 그는 훗날 귀양살이 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무 살 때 겨레와 나라를 위해서 전제・관제・군제 등을 바로잡고, 경전의 풀이도 다시 하려는 정열을 가졌었다.”
귀양살이는 다산을 대학자로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 셈이다.
그의 학문은 역경에 처했을 때 오히려 더 무르익었던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학문에만 머물지 않고 중국을 거쳐서 들어오는 서양 학문도 우리 실정에 맞게 접목시켰다.
그가 평생 집필한 책은 5백8권이나 되었으며, 70여 편의 다시(茶時)도 썼다. 이러한 엄청난 저술은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50년 동안 글을 썼다고 치면 해마다 10권의 책을 펴낸 셈이 된다.
다산은 인문과학 외에 자연과학과 산림경제(山林經濟), 어류(魚類)에 대한 해설을 써 조선의 자연과학 수준을 한 단계 높이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른한 살 때에는 수원성을 축성하게 되자 기중기(起重機)를 만들어 무거운 바윗돌을 쉽게 옮길 수 있게 하기도 했다.
그는 의학에도 관심이 깊어 천연두에 관한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펴내고 종두법(種痘法)도 소개하였다.
한평생을 실천적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바친 다산은 1836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斷腕不筆(단완불필)
斷:끊을 단, 腕:팔목 완, 不:아닐 불, 筆:붓 필.
어의: 손목이 잘린다고 해도 글을 쓰지 않겠다. 영조가 승지에게 폐세자 전지를 쓰게 하자 승지가 “내 팔이 끊
어지더라도 전지를 받아쓰지 못하겠다.” 고 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한국인물지(韓國人物誌)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도승지(都承旨) 이이장(李彛章. 1703~1764)은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하라는 전지를 받아쓰도록 명하자 꿇어 엎드려 말했다.
“신의 팔이 잘린다고 해도 차마 그것만은 쓰지 못하겠나이다.”
영조는 성이 나서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니,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완강히 거부하니 할 수 없이 다른 승지가 받아썼다.
도승지는 왕의 전지를 받아 써야 할 책임이 있는 직책인데, 이를 거절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이장은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낸 인재였다. 1748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도승지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答夫之策(답부지책)
答:대답 답, 夫:지아비 부, 之:어조사 지, 策:꾀 책.
어의: 답부라는 사람의 책략이라는 말로, 고구려 때의 국상 명림답부에게서 유래했다. 전투에서 시간을 끌어
상대가 지치게 한 후 싸우면 이긴다는 뜻이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5
고구려 제8대 신대왕(新大王. 재위165~179) 때 한(漢)나라 현토태수(玄菟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긴급 대책회의를 연 신대왕이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 유리한가를 물으니 대신들이 말했다.
“한나라가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얕보고 있으므로 만약 지금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더욱 깔보고 더 자주 쳐들어 올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산이 험하고 문이 좁으니 이를 잘 활용하면 한 사람이 적군 백 명도 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공격하십시오.”
그러자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 군사는 강병으로서 사기가 충천하오니 그 서슬을 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군이 많을 때는 싸워야 하고, 적을 때는 지켜야 하는 것이 병법입니다. 그리고 지금 한나라 군사는 천 리 밖에서 군량미를 운반해 와야 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호를 깊이 파고 성곽을 높이 쌓아 그들의 침공을 막으며 기다리면 저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지쳐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들이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대왕이 답부의 말에 수긍하여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과연 한나라 군사들이 지치고 굶주려 결국 퇴각했다. 이때 답부가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교전하니, 한나라 군사는 대패하여 단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어 격려했다.
그가113세로 죽자 왕이 7일간이나 정무를 쉬며 친히 조상(弔喪)하였다.
신대왕과 명림답부는 특별한 관계였다. 165년 신대왕의 형 차대왕(次大王)의 학정을 보다 못한 답부가 차대왕을 살해하고 차대왕의 아우 백고(伯固)를 왕위에 등극케 하니 그가 신대왕이다. 그리고 신대왕이 명림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當金如石(당금여석)
當:마땅 당, 金:쇠(돈) 금, 如:같을 여, 石:돌 석.
어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말로, 아버지의 유훈을 끝까지 지킨 고려의 충신 최영장군의 이야기에서 유
래했다.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뜻.
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한국명인전(韓國名人傳)
고려 말의 장군 최영(崔瑩. 1316~1388)은 본관은 동주(東州)요,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그는 1658년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적과 대적하여 왜선 400여 척을 격파했다. 또 1361년에는 홍건적 4만이 서경(西京. 평양)을 공격하여 개경(開京)에까지 이르자 이를 격퇴시켰으며, 1363년엔 흥왕사(興王寺)의 변을 진압하였다.
1376년 우왕2년에 왜적이 삼남지방(三南地方.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쳐들어와 양민을 괴롭히자 홍산(鴻山)에서 맞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패하여 쫓겨간 왜구들은 최영을 백수최만호(白首崔萬戶)라 하여 그의 옆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난을 모두 평정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가 이렇게 명장이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의 유언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최원직은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 있으면서 관리들을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는 일을 맡아 왔다.
최영이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하며 이렇게 유언했다.
“재물을 탐내지 말고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當金如石.당금여석)”
최영은 그 유언을 작은 나무쪽에 써서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평생토록 실천했다. 그는 일국의 제일가는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비좁은 집에서 불평 없이 살았다. 그리고 오직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몰두하여 싸움에 임하면 싸움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 그도 요승 신돈(辛旽)의 참소로 좌천되었다가 공민왕 20년에 신돈이 처형되자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최영은 명나라 철령위(鐵嶺衛) 문제를 계기로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그 계획이 서자 팔도도통사가 되어 우왕과 함께 평양에 진출하였는데, 이때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영은 이성계의 일파에 의해 고봉(고양)에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막강한 병권을 잡고 있었지만 사사로운 부탁은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오로지 옳은 것만을 가려서 받아들인 귀인이었다.
그는 신라의 백결(百結) 선생과 조선의 黃喜 정승과 더불어 3대의인(3大義人)으로 꼽힌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塗貌紙(도모지) 이르게 하는 형벌의 하나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는데 위의 글은 매천의 심정을 잘 나타낸 절명시 중의 삼편이다. 나라를 잃는 재변(災變)을 겪으면서 선비 매천의 선택은 자결의 길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이는 조선인의 꿋꿋한 기상과 정신의 표출이었다.
都彌之妻(도미지처)
倒屣下迎(도사하영) 다.
刀以逢父(도이봉부) 러진 칼을 증표로 만나게 된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물건을 근거로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 한다.
到整累卵(도정누란) 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낼 때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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