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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사과
이미숙
"숙아, 주소하나 보내 봐라. 언니가 사과 한 상자 보내줄게."
둘째 언니는 몇 해 전 청송으로 귀농해서 사과 농사를 짓고 있었다. 스크루지처럼 짠돌이 언니가 사과를 보낸다니? 언니의 전화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엊그제 도라지 캐는 날, 언니가 가져온 낙과를 큰 언니가 챙겨줬어. 안 보내도 돼.”
“아유 시끄럽다 마. 얼른 주소 보내 봐라.”
한사코 사양하는 내게 언니는 윽박지르듯 주소를 재촉했다.
9월 22일,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뽀얀 솜사탕 같은 화요일이었다. 이틀의 휴가를 내고 고향에 내려갔다. 큰 언니의 도라지를 캐기 위해서였다. 직장인에게 평일 이틀의 휴가는 꿀보다 달지만 결재를 얻기가 쉽지는 않았다. 사장님과 직원들 눈치를 살펴야 하고, 자리를 비웠을 때 대체 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라지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언니를 생각하면 휴가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라지는 한 곳에 3년 이상 있으면 원뿌리가 썩고 잔뿌리가 무성하게 난다. 큰 언니의 도라지는 올해로 4년째 되는 약 도라지다. 봄에 반 캐고 남은 도라지가 썩어 버릴까 봐 언니는 전전긍긍했다. 작년에 양쪽 무릎 수술을 한 언니는 농사일은 고사하고 일상생활도 버거운 상태였다. 그러니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봐가며 ‘도라지 캐야 하는데 언제 캐지?’라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언니의 정성이 갸륵했는지 하늘도 도라지 캐는 날을 잡는데 한몫했다. 장마철 이후 건기처럼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은 돌덩이처럼 굳어있었다. 호미 끝도 들어가지 않던 밭이 주말에 내린 비로 토라진 여인네처럼 폭신폭신해졌다. 그리고 힘께 일 할 둘째 형부도 화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날씨와 사람, 밭의 상태.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그날은 도라지 캐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의 일과가 시작된 새벽 6시, 검은색 조거 팬츠를 입고 집을 나섰다. 3시간을 달려 언니네 집에 도착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에 찐 호박잎을 적셔 보리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점심 식사 거리와 간식을 챙겨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밭으로 갔다.
“좋은 아침!” 자주 드나들어 익숙한 농작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침 햇살에 몸을 말리던 식물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털었다. 언니가 심어놓은 고구마, 배추, 가을 무, 엄지손톱만 한 무화과, 새색시 얼굴의 곤지처럼 붉어진 꼬마 사과를 지나 도라지 밭으로 향했다. 밭 가운데 술주정뱅이처럼 대자로 뻗은 호박넝쿨은 아직도 열매 맺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란 꽃은 벌을 부르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었고,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애호박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농사일은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큰 언니 말에 의하면 농부가 고생한 거 생각하면 콩 한쪽도 나눠먹을 수 없을 만큼 고되다고 했다. 특히 도라지 캐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은 작업이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처럼 뿌리가 긴 도라지를 캘 때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다. 삼지창처럼 생긴 쇠스랑과 호미나 곡괭이가 있어야 한다. 먼저 삼지창을 땅속 깊이 집어넣은 후 살살 흔든다. 땅을 달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길러낸 자식 같은 도라지를 내어주게 하기 위한 인간의 도리이며 땅에 대한 예의다. 그렇게 파헤쳐진 사이로 뿌리가 보이면 주워서 흙을 털면 된다. 하지만 한 번의 쇠스랑 작업으로 안 되는 것이 더 많다. 그런 것은 호미나 곡괭이를 이용해서 캐야 한다. 최대한 상처 없이 캤을 때 기분도 좋고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언니네 밭에는 돌이 많아서 삼지창 집어넣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예부터 자갈밭이라 불렀을까.
“벌써 올라왔나?”
둘째 언니가 음료수와 캔 맥주, 간식거리가 든 비닐을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아이구 야야. 뭐가 빠르나? 벌써 10시가 지났구만. 더워지기 전에 캐야 하는데 언제 다 하나.” 도라지 주인만 애가 탔다.
“언니 왔어?”
“그래. 미숙이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언제 들어도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였다.
덩치만큼 사람 좋게 생긴 형부도 오랜만에 만난 처제가 반가웠던지 “청송 한 번 놀러 오소.”라며 인사를 건넸다.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이 시간을 갖기까지 우리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린다고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새끼손톱만 한 싹이 돋을 때 그 어린 것보다 더 잘 자라는 것이 있다. 바로 잡초다. 곡식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하지만 풀은 주인이 잠든 사이에도 자라는지, 밭을 매고 돌아서면 무성해진다. 여름날 살 속을 파고드는 태양과 끈질긴 잡초와의 전쟁에서 이겼을 때 비로소 가을의 수확을 꿈꿀 수 있다. 어쩌면 언니와 나 사이의 10년은 한여름 김을 매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둘째 언니가 이기적이라는 건 온 집안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본인이 불편한 건 절대 참지 못한다. 언젠가 큰언니와 동생이 대구 놀러 갔다가, 둘째 언니네 들렀을 때 한밤중에 쫓겨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언니의 성격이 나로 하여금 자매를 손절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친정 식구들끼리 회비를 내어 계추를 하던 때였다. '계추'는 경상 방언으로 계모임을 뜻한다. 결혼 후 지방에서 살았던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 모임에 들어가지 못했었다. 그러다 새 천년이 시작되는 해에 인천으로 이사 오면서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모임은 연말에 한번 송년회를 하는 정도였다. 연장자 순으로 돌아가면서 장소와 음식을 제공하고 그 집에 회비를 지원해 주는 방식이었다. 내가 들어가고 한 번 모인 후 바로 해체되었다. 둘째 언니가 음식 장만하느라 돈도 많이 들고 힘들어서 하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그 당시 오빠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언니는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말았다.
모임이 해체되고 회비를 정산하면서 있었던 일이었다. 총무를 보던 올케에게 둘째 언니가 "미숙이는 늦게 들어왔으니까 회비 내 주지 마세요."라고 했단다.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형부를 만난 덕에 다섯 명의 딸 중에서 가장 잘 사는 언니였다. 내 몫의 회비가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욕심을 부렸을까. 그때 느낀 배신감은 소태보다 더 짜고 바닷물처럼 비렸다.
친정 식구들로부터 버려졌다는 소외감과 배신감이 들었다. 태풍처럼 휘몰아치던 감정에 한동안 주춤하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진 삶은 감정 타령만 하게 버려두지 않았다. 아물지 않을 것 같은 상처에 새살이 돋았고 기억은 흉터라는 딱지를 남기고 잊혀졌다.
무심한 세월은 공평하게 흘렀다. 언니의 소식은 별로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끊임없이 들려왔다. 대구에 살던 언니가 양주로 이사를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양주에서 다시 청송으로 귀농했다는 뜬금없는 근황을 듣기도 했었다.
시간은 변화의 귀재다. 아이들은 미래를 꿈꾸며 성장하고, 어른들은 느리게 늙기를 바라며 꿈속에서 헤맨다. 족집게를 들고 보물처럼 숨어있는 새치를 찾던 어느 날, 언니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혼 날짜는 다가오는데 모바일 청첩장도 전화도 오지 않았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스럽고 놀랐다. 하지만 조카가 결혼을 한다는데 이모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약간의 축의금을 보냈다. 경조사가 끝나면, 혼주든 상주든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는 게 우리나라 정서다. 예식에 참석을 했던 하지 않았던, 마음을 전달한 모든 이에게 빠트리지 않고 감사를 전한다. 그런데 언니에게서 어떤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이게 뭐지?’싶었다.
인사를 받고 생색을 내고자 함은 아니었으나 많이 서운했다. 금액이 적어서일까. 정말 나와 연을 끊고 싶은 걸까. 형체 없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지만 먼저 연락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고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축의금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된 큰 언니에게 혼이 난 후 마지못해 한 전화라고 했다.
부모님은 가족 구성원의 구심점이다. 한 분이라도 살아 있다면 가족들은 수시로 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신 우리 집은 상황이 달랐다. 딸들은 특히 더 볼일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 않는 형제는 이웃보다 멀게 느껴진다. 오죽하면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을까.
작년 시월, 언니의 둘째 아들이 날 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려나. 언니의 행동이 궁금하기도 하고 청첩장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또 감감무소식이었다.
왜? 왜 나한테만 초대장을 보내지 않는 걸까? ‘왜’라는 단어와 물음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큰 언니에게는 대구 예식장 가는 길에 상주에 들러 태우고 가겠다는 전화를 했단다. 둘째 올케에게는 사과 한 상자 보내면서 결혼식에 오라고 했다는 데, 나에게는 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까. 건조한 마음에 풍랑이 일었다. 저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던 푸른 서러움이 토사물처럼 게워 나왔다.
존재를 부정당한 나는 언니와 형부, 조카에게도 서운한 맘이 들었다. 축의금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결혼식 이틀 전까지 고민하다가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혼주의 계좌번호를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카톡으로 송금해서 이모로써 도리를 먼저 하고, 송금을 받은 언니가 어떻게 할 것인지 지켜보고 싶었다. 지난번처럼 결혼식이 끝나고 늦게라도 전화가 오면 따져 묻고 싶었다. 왜 나만 따돌리는 거냐고. 그런데 예식이 끝나는 시간까지 전송된 카톡의 숫자 1이 지워지지 않았다.
앵그리버드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화가 났다. 송금을 취소하고 그 돈으로 좋아하는 우대 갈비를 먹었다. 부당한 언니의 처사를 안주 삼아 소주도 한잔 마셨다. 그러나 애정에 주린 배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술과 맛있는 고기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나의 고향은 예전부터 곶감으로 유명했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으며 심지어 가로수도 감나무였다. 그에 못지않게 사과나무도 많았다. 들에 나가는 길에 팔만 뻗으면 사과를 따 먹을 수 있었다. 사과를 좋아하는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서리도 참 많이 했었다.
우리 집은 감, 밤, 자두, 앵두나무는 세 그루나 있었는데 사과나무만 없었다. 부모님은 왜 사과나무를 심지 않았는지 어린 마음에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과수원 집으로 시집가는 게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
풋사과로 먹는 아오리, 붉다 못해 검은 홍로, 수확 전 낙과가 적은 양광, 가장 늦게 따는 부사 등. 사과의 모양은 비슷하지만 맛도 색깔도 다르다. 한 나무에 달렸어도 어떤 건 더 새콤달콤하고, 어떤 건 니맛내맛도 없는 맹물 같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고 자랐지만 개성이 다른 형제들처럼 천차만별이다.
부사는 가장 오랫동안 저장하는 사과다.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에 농부들의 손은 더 분주해진다. 품질 좋은 사과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작업들이 있다. 먼저 무성한 잎을 훑어낸다. 그래야 열매가 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무 밑에 은박지를 깔아 준다. 한 줌의 볕이라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농부들의 간절함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과수농가도 있다. 하지만 잎이 무성한 나무의 사과는 골고루 붉은빛을 띨 수 없다. 당연히 당도도 떨어질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수히 많은 이파리 같은 감정들을 달고 산다면 내 마음의 과육은 어떤 맛이 날까.
과일 하나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는데 나는 어떠했던가. 파랑새를 찾아 밖으로 많이 돌았다. 타인의 인정과 관심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외부의 사랑은 마치 소금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큰 갈증을 일으킬 뿐이었다. 내 안이 비어있을 때 누군가 사랑을 준다고 해도, 그것이 애정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시나노골드를 많이 심었데이, 큰언니가 골고루 심으라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어. 다른 사과에 비해 시나노가 손이 덜 가서 훨씬 수월하거든. 올해는 꼭지 무르지 않는 약을 안쳤더니 사과가 자꾸 떨어지더라고. 원래 시월에 수확하려다가 조금 일찍 땄어. 너한테 보내는 건 큰 걸로 고르긴 했지만 아주 온전한 건 아니데이. 따면서 떨어진 것도 있으니까 서운해하지 말고 먹어."
"안 보내도 된다니까 기어이 보낸다고 그래"
언니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나는 많은 날들을 애면 불면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들 역시 먼지처럼 사라졌다. 세월이라는 시간이 마술을 부린 걸까. 반백을 살아내면서 저수지 같던 마음이 태평양같이 넓어진 것일까. 언니가 보내는 사과는 단순한 과일에 불과한걸까, 동생에 대한 언니의 마음일까.
띵동 띵동!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현관문을 열자 택배 기사님이 놓고 간 사과 상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처럼 노란 사과 위로 무뚝뚝한 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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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둘째 언니와의 화해 과정이 아주 궁금하네요. 무언이라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거사 청산없이, 그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갔어요 자매이기에 그게 가능한건지, 예전에 가졌던 서운함이 정말 사라진 것인지 저도 덤덤했어요
오해할 만한 사연도 있었네요.
하지만 언니의 진심이 변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실은 언니 마음이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오해할만한 사연이 어떤것으로 보셔요?
재밌게 읽었어요
형제 많은 집 보면 유별난 하나가 있더라구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8인 8색 입니다
행복한 한 주 되세요 ~^^
도라지에서
가족계
경조사와
형제들의 이야기..
3남5녀인
저희 형제들도
거의 20년째,
매달 회비를 납부,
집안 경조사때 유용히 사용하고
명절을 외에도
종종 만나기도 합니다
저만 서울에 살고
모두 남쪽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결론은
남자든 여자든
둘째가 제일 문제라는 것.
사고를 치거나,
골치 아픈 일은
둘째들이 담당한다는 겁니다
이는
저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하다는겁니다.
근거?
주변 한번 보셔요
맞을 겁니다..ㅎㅎㅎ
긴 이야기 나누 듯
잘 읽었습니다~~~
가족사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시절 여덟은 기본이었나 봅니다
쓰고 보니 가족의 치부를 드러냈나 싶어 언니에게 미안해지기도 하고
이번 글을 계기로 먼저 연락하고 잘 지내야겠다는 초등생 같은 다짐도 해 봅니다
어쩌면 부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지 않을까 싶네요 애써 이해할라치면~
그런데 젊은 조카들이 그런세상이예요
결혼식에 갔는데 신부인사도 안시키는 조카도 있더라구요 .무지 황당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명절에 왔더라구요. 마음에 두면 나만 손해인것 같아요
좋은 일은 맘에 담아둬도 좋지 않은 일은 얼른 잊어야겠지요?
제 마음에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지 않았기에 이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긴 글 읽어주시고 마음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숙 작가님
저도 8남매 막내. ㅎㅎ
귀여움과 사랑만 받고 자랐네요.
작가님 마음에 서운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아서 오래도록 속상하셨겠어요.
훗날 서로 얘기하면
별일 아닌 경우가 많더라고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남은 가을도 즐겁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러게요 작가님
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했었던것 같아요
언니는 여전히 덤덤하더라구요
입동의 반짝 추위가 물러나고 기온이 올라간다고 하니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네요
오늘도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