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 오버 직전에 나간 트래킹인데 고추잠자리도 날고 완전 날씬해진 왕숙천은 채송화 코스모스 백합 등등 꽃들의 향연까지 거의 완벽합니다. 침묵하는 우주는 이렇게 스스로 작동하고 있었어요. 리셀 푸코가 들려주는 '어떻게 국가 권력이 나를 억압하고 제재하는가'를 경청했는데 완존 일용할 양식(글감)입니다. 아비는 우리 에에공이 일주일에 3개 이상의 글을 쓰는 날을 확수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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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k 정도 걷고 하는 샤워가 이렇게 쿨하고 감미로울 수가 없네요. 퍼피움이 피부를 휘감는 느낌입니다. 에에공! 냉탕 온탕을 아니? 온도 차로 '모순'을 만들어 생성(창조)을 극대화 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해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1. 돈(경제) 2. 계급 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청출어람 쯤 되는 푸코가 “힘이 지식이다”라는 말을 했어요. 근대 사상의 선구자 베이컨(1561-1626)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제를 뒤집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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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이상으로 삼았던 객관적, 중립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 사회, 경제의 권력 조직이 ‘지식’을 만들어 내고 그 지식은 또 권력이 되어 소수자들을 억압하였다는 것입니다.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을 보면 "저항은 오직 권력의 내부에서만 가능하다"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에예공! 이 부분에서 잠깐 적용하고 넘어가자. 킴스 패밀리가 사회의 구조 안에 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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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의 경우를 보면 (학교-헌병대-청년회) 라는 조직에 있을 때 '힘에의 의지'가 정점을 찍을 수 있었다. 킴스 패밀리는 지금 대한민국의 권력 vs 개인이라는 상황 가운데 놓여있어서 '감시와 억압'의 구조 안에 있지만, 차츰 힘을 키워서 권력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야. 돈이든 계급이든 힘의 구조 안에 있을 때 힘의 원리에 의한 사회개혁에 비로소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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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서양 사상과 문화의 중심을 파헤치되 광기, 병원, 감옥, 성 등 독특한 주제를 대상으로 하였고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치밀한 분석과 호소력 있는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통해 엄청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베이컨이 지식의 축적을 통해 자연과 사회를 정복하겠다는 근대의 이상을 보여 준 반면, 푸코는 학문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활동 이면에는 '모종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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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이상으로 삼았던 객관적, 중립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 사회, 경제의 권력 조직이 ‘지식’을 만들어 내고 그 지식은 또 권력이 되어 소수자들을 억압하였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텍스트로 규정한 데리다의 표현을 빌자면 푸코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를 전부 ‘힘의 과시’로 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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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강조한 푸코의 입장은 정의를 “강자의 이익”이라 규정하였던 고대 그리스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ca. B.C. 459-400) 계보에 속해 있습니다. 지식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점과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을 믿는 점이 특히 같습니다. 가깝게는 “권력에의(힘에) 의지”를 모든 활동의 동력으로 보았던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와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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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니체가 근대적 주체를 비판만 하고 그친 반면, 푸코는 그 주체의 존재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사상가 다운 면모를 보입니다. 자아의 존재조차 부인하는 푸코의 인간관은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의 구조주의를 극단화시킨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인간을 사회 여러 요소의 종합인 거대한 구조의 산물로 보았다면 푸코는 인간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관계에 의해 형성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어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구조의 존재는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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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권력이 낳은 개개인들일 뿐이며 고정된 자아 개념이나 인간의 고유의 본질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푸코의 인간관을 간단히 줄이면 결국 나는 나 아닌 것들이 모여 이룬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텍스트가 복잡하듯 자아 역시 무한한 복합성을 기본 특징으로 합니다. 푸코의 자아관은 인류의 지성사, 특히 근대 역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한때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는 푸코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광기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이른바 광기와 정상 사이의 구분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객관성을 가진 것이 아님을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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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가진 다수가 정상의 조건을 규정하고 거기 해당되지 않는 소수를 미친 사람으로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성에 관해서도 같은 흐름의 분석을 전개합니다. 푸코는 평생을 동성애자로 살다가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답게 성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성에 관한 전통적 거대 담론을 공격합니다.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보게 된 이유는 자본주의라는 권력이 출산과 무관한 성의 논의를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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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가 힘으로 정한 조건은 결국 근대 이성주의의 산물이라는 푸코의 입장에서 보면 정상과 광기, 정상과 변태 사이의 구분 자체가 사라지고 맙니다. 이러한 푸코의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학문적 진리 이면에도 힘의 작용이 숨어있다고 한 푸코 자신의 이론입니다. 그런 비판을 시도해 보면 푸코의 활동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의 실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중심된 규범을 상대화시킴으로써 주변을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이런 논리는 푸코의 정치적 활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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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힘의 역학이 성이나 병원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이른바 계보학 또는 고고학 방법을 사용하여 밝히고자 합니다. 다수가 자신의 힘으로 모범의 틀을 정하고 그 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축출, 고문, 훈육 등의 방법으로 억압해 왔다는 기본 골격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푸코의 주장은 선험적, 추상적 주장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분석해 얻은 결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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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자기 이론에 부합하는 사례들만 끼워 맞춘 주장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감시와 처벌』에서는 훈육(discipline)을 주제로 역사를 분석합니다. 중세의 무자비한 고문이 덜 폭력적인 근세의 처벌로 바뀌고 오늘에는 통제나 감시 같은 방식으로 바뀌게 된 과정을 추적하면서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으로 대체되었을 뿐 숨은 권력의 지배라는 사실 자체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도 사회의 중심이 되는 학교, 병원, 회사 등을 포함하여 사회 전체가 어떤 권력의 그물망에 얽혀 있어 감시를 당하는 일종의 감옥과 같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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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구를 통해 푸코가 공격하는 주 대상은 거대담론 즉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한 포괄적 이론들입니다. 역사의 이면에 숨은 모순과 갈등과 투쟁을 부각시킴으로써 전체를 포괄하는 역사관 곧 역사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이론들이 오류임을 밝히려 합니다. 그런 허구적인 편견 내지 선입견들이 소위 진리를 생산해 내어 그걸로 우리를 장악하면서 사회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에 맞지 않는 것은 제한하고 배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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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푸코 자신도 그런 허구적 대상들을 창안하여 그걸 우리 시대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진리는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푸코도 객관성이란 권력의 가면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던 사상가들도 모든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맞지 않는 것은 걸러낼 뿐 나름 주장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책을 쓰고 강연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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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기독 학자들의 비판처럼 푸코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뒤집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제임스 스미스의 주장처럼 권력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방향 제시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의 교회가 푸코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의 이면에서 작용해 온 힘의 역학 곧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독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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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담론이 언제나 억압 및 비인간적 행위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모습을 보여준 일이 있었음을 푸코의 글을 읽으며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푸코의 분석을 통해 교회는 우리 시대의 자아가 돈이라는 권력의 훈육을 받은 결과 자본주의적, 소비 중심적 자아로 형성되었음을 인식하고, 성경에 입각한 올바른 훈육을 시행하여 성령을 따르는 자아를 형성해야 할 사명감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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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사상을 종합하면 창조 질서를 공격하고 프리한 성생활을 옹호하는 등 문제도 적지 않지만, 푸코의 주장에는 성경과 통하는 점도 사실 많습니다. 지식을 생산 해서 연대해 몬스터가 되는 패턴은 가히 삼위일체적입니다. 개인적으로 깜짝놀랐어요.ㅋ ㅋ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약자에 대한 관심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개혁신앙 노선의 철학자 플랜팅가(Alvin Plantinga, 1932-)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이라 본 ‘가난하고 억눌린 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 ‘불의에 대한 분노와 항거’, ‘다양성에 대한 존중’ 등이 푸코의 글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권수경, 고신) 모든 일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같이 있다고 보았을 때 지식을 생산하고 관리하면서 법률-범죄학-통계학같은 인문학을 발전시켰고 동시에 보이지 않은 효율적 권력에 의해 지금 이 순간도 감시-통제-고름을 받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1등만 알아주는 엿같은 세상, C-bar,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가있어?
2024.8.1.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