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부주
신막추심
-둘로 보는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송
좋은 것을 취하려 함에
나쁜 과보를 받는 것은 시간문제,
이는 고락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니,
무조건 고락의 분별심을 방하착하라.
강설
- < 신심명>의 구절을 자세히 분석하다 보면,
주로 분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견부주 역시 두 가지로 보는 분별의 견해에 머무르지 말고,
신막추심 즉, 두 가지의 견해인 분별을 좇아가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은 크고 작은 사실을 어떻게 분별하지 말라는 것일까?
또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하는데 왜 표현하지 말라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객관적인 사실을
구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두 가지 물건을 놓고 비교한다면 분명 상대적으로 더 크고 작은
것이 있을 것이다. 이를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두 가지 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예쁘고 좋으며, 더 예쁘지 않거나 좋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것 또는 더 예쁘고 좋은 것을 취하려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더 작거나 더 예쁘지 않거나, 더 좋지 않는 것에 대해 싫어하거나 취하지 않겠다거나
버리려 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취함으로써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되기 위한 것이므로,
이는 인과의 과보에 걸려서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마음이 똑같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좋고 나쁜 두 가지 감정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분별심이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것을 집착하면 그 과보로 인하여 나쁜 것이 생겨나고,
나쁜 것을 버리려 하는 마음에 집착하면, 나쁜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서
기분이 나빠지고 괴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더 좋은 일,
더 좋은 물건,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것들을 차지하려 애쓴다. 그래야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더 좋은 것을 차지하는 만큼 더 나쁜 과보가 생겨서 언젠가는 차지한 만큼의 즐거움과
행복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되어 있다. 다만 시간 문제다. 즉, 시절 인연에 따라 인과의 과보가 금세 올 수도 있고,
다음 시간 또는 내생에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면, 고락 인과의 업 중에 낙의 과보가 생길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쁜 일이 생기면, 고락의 인과 중에 고의 과보가 생길 때가 되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만약 나쁜 꼴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다면, 내가 좋은 꼴을 보려고 하는 집착심 때문에 생긴 과보이다. 좋은 꼴을 본다는 것은,
나쁜 꼴을 보지 않느려는 집착심 때문에 생긴 과보로 보면 된다. 하지만 좋은 꼴을 본 과보로 인해 나쁜 꼴을 또 보게 되는 인과의
업은 남게 된다. 그러므로 좋고 나쁜 두 가지의 견해를 굳이 좇아가지 말라는 것이 이번 구절의 뜻이 되겠다. 게송 견유몰유종공배공에서 한다고 유를 추구하다 보면 유에 빠지고, 한쪽에 치우치면 반드시 그 치우친 대가를 받게 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크고 작은, 좋고 나쁜, 옳고 그른, 두 가지 견해를 가질 수는 있으나, 어느 쪽이든 취하려 하거난 버리려 하는 집착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더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분별심을 놓으라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일이건 본래 잘되고 잘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저 인연에 의해 흘러갈 뿐이다. 다만, 두 가지 싫고 좋은 견해에 집착하여 좋은 쪽만을 취하려고 한다면,
좋지 않은 다른 한쪽의 인과가 생겨서 안 좋은 과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항상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어떤 일이든, 어떤 현상이든, 어떤 인연이든, 어떤 사건 사태이든, 고락의 감정을 놓고 또 놓고, 인연의 흐름을 그대로
보고 받아들여서 말 한마디, 생각하는 순간, 행동 행동마다, 일어나는 고락의 감정을 방하착하고 방하착해야 한다.
이것도 안되면
기도하라. 그리고 참선하라. 그것도 안되면 보시하고 정진하라.
이견부주
신막추심
-둘로 보는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 신심명 강설, 진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