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에스라 3장 1절 – 13절) 3: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 새… 3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8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9 이에…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개역개정) 에스라서는, “바사 왕 고레스”가 유다 백성들의 제1차 포로 귀환을 허락한 이유와 또한 유다 백성들 역시 조국에 귀환한 목적이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1:5) 데 있었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정치적 이유와 목적 때문이었다면, 유다 백성의 관심은 신앙적 이유와 목적이었기에, 서로 그 이유와 목적은 달랐지만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따라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지기 전에, 먼저 황폐한 땅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힘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2:68-69)는 헌신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각자의 성읍”(2:70)으로 흩어졌습니다. 제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주전 605년이었다면, 마지막 제3차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주전 586년이었고, 제1차 포로 귀환이 주전 537년이었다는 점에서 짧게는 50년 길게는 70년 이상 조국 이스라엘을 떠나 타국에서 생활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자신과 조상들이 살던 고향인 “각자의 성읍”으로 빨리 가고 싶었지만, 조국 땅에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와 경배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를 먼저 찾았던 유다 백성들의 신앙을 에스라는 증언합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각자의 성읍”으로 흩어졌던 이들이,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성전 재건에 앞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번제단을 먼저 새롭게 재건하고, 초막절 절기 행사를 치른 후에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 공사를 하고 기공식을 하는 상황과 함께, 이에 대한 유다 백성들의 반응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1. 귀환자들은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합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의 새로운 시작을,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3:1)고 에스라는 증언합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된 ‘남 유다 왕국의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분열된 나라와 지파로서가 아니라 다시금 하나님 안에서 선택된 한 민족으로서의 회복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귀환자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던 이유는, 폐허의 땅에 돌아와서 자신들의 정착을 위한 최소한의 삶의 기반을 위해서, 당장 거할 집을 짓고 먹고 살 양식을 얻을 밭을 일구는 일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몇 달 만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삶을 살아갈 기초만을 만들고, 자신들이 조국에 돌아온 목표와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모인 때를 “일곱째 달에 이르러”라고 했는데, 이 때를 포로 귀환자들이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곱째 달”은 우리 달력으로는 9월 초순 정도에 해당하지만, 유대의 민간 달력으로는 새해가 시작되는 달입니다. 따라서 7월 1일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절’(레23:24-25)이며, 7월 10일은 “속죄일”(레23:27-32)이며, 7월 15일부터 22일까지는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초막절”(레23:34-43) 절기였습니다.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며, 농사 절기로는 한 해의 농사를 끝내고 풍성한 수확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자, 신앙 절기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먹이고 입히심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올 수 있게 하신 것을 되새기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과거의 어려운 때를 되새기며 절기 기간에 초막을 짓고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이제 조국에 돌아온 귀환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의 때를 “일곱째 달”로 삼은 것은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 포로 귀환자들이 시작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3: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은,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학1:1)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스룹바벨”이 다윗 왕족의 혈통이라면(대상3:9-17), “여호수아”는 사독 제사장의 혈통(대상6:10-15)이었습니다. 성전 재건에 앞서, 먼저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드려 제사할 수 있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고, 이 일을 주도한 대표적인 지도자들을 가리켜서, 먼저 종교 지도자인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다음으로 정치 지도자인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인 왕족들이 “다 일어나” 곧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진행했음을 증언합니다. 아직 성전은 재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성전 제사의 회복을 위한 “제단”을 먼저 쌓고자 했던 이유를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 새”(3:2)라고 밝힙니다. 성전 재건의 첫 단계로서 시작한 “제단”을 쌓는 일에, 비록 “바사 왕 고레스”가 명령한 일이기는 했지만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3:3)하였다고 했습니다. “모든 나라 백성”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그 땅을 채우고 들어온 주변 족속들을 가리키며, 이들의 방해를 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이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 그 “일곱째 달”을 시작점으로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속죄와 헌신을 의미하는 제사 곧 예배의 회복을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3:3)라고 증언합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이 있던 “그 터에” 다시금 번제를 드릴 수 있는 번제단을 제일 먼저 복원하여,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게 하시고 매일 드리게 하셨던 상번제(常燔祭,민28:2-10)를 회복했음을 증언합니다. 2. 성전 재건을 위해서 어떻게 준비합니까? 귀환자들은 성전 재건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제단”의 재건을 통해서 매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상번제를 회복했습니다. 다음으로, 초막절 번제의 회복을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3:4)라고 밝힙니다. “매일 정수대로”는 매일 똑같은 숫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수송아지 같은 경우 매일 달라지는 숫자대로 드렸다는 것입니다(민29:13-38). 이처럼 “초막절” 절기 후에 모든 “번제”가 회복되었음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3:5). 일상의 번제와, 매월 초하루에 드리는 월삭 번제와, 매 절기의 번제와, 자원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번제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새롭게 회복되었음을 밝힙니다. “초막절”이 한 해의 마지막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자, 과거 출애굽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절기였던 것처럼, 이제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이 돌아와서 처음 맞이하는 “초막절”을 제2의 출애굽인 출바벨론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로서 또한 민족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민족적 전환점의 새로운 시작을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3:6)라고 선언하면서도, 아직 성전 재건이 시작되지 못했음을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3:6)고 밝힙니다. “성전 지대”는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 공사를 가리키며, 이것이 아직 시작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모든 희생 제사가 회복되었지만, 성전 안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속죄제는 아직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포로 귀환자들은 성전 재건에 앞서 희생 제사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영적 준비를 우선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우선한 포로 귀환자들은, 비로소 성전 재건을 본격적으로 어떻게 준비했다고 증언합니까?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3:7). 이것은 과거 솔로몬 성전을 건축할 때 했던 방식을 따라 성전 재건을 준비했음을 나타냅니다. 과거 두로 왕이 솔로몬 성전의 건축을 도우면서 요청했던 내용을 가리켜서, “내 주께서 말씀하신 밀과 보리와 기름과 포도주는 주의 종들에게 보내소서. 우리가 레바논에서 당신이 쓰실 만큼 벌목하여, 떼를 엮어 바다에 띄워 욥바로 보내리니, 당신은 재목들을 예루살렘으로 올리소서”(대상2:15-16)라고 했습니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대제사장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일꾼들에게 무조건의 헌신과 희생적 자원봉사를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을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라고 밝힙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라고 한 것은,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1:4)고 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위하여 당시 바사의 통치 영역에 있던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목재의 벌채와 운송을 돕게 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준비를 통하여 본격적인 성전 재건이 언제 시작되었다고 증언합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3:8). “이 년 둘째 달”이면,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곧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지 두 번째 해가 되는 2월이라는 표현으로, 주전 536년 2월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때는 먼저 “제단”을 재건하고 번제 의식을 시작한 첫 해 “일곱째 달” 곧 7월로부터 7개월이 지난 시점으로, 그동안 귀환자들이 많은 준비 시간과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합니다(3:6-7). 3. 성전 기초를 본 반응이 어떻게 다릅니까? 포로 귀환자들의 열망이었던 성전 재건이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이 일을 위해서 공사 감독관을 임명합니다. 성전 봉사자였던 “레위 사람들”로 “성전 공사를 감독”하고 또한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게 한 것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3:8-9). 본래는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민4:3) 하게 했지만, 후에 “이십오 세 이상으로는 회막에 들어가서 복무하고 봉사할 것”(민8:24)으로 바뀌었고, 다시금 다윗 시대에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이십세 이상 된”(대상23:24)이들로 바뀌어서, “성전 공사를 감독”하고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게 된 이들이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이 된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 착공 예식을 거행합니다. 이 착공식 예식을 어떻게 행했다고 증언합니까?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3:10).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부는 것은, 예식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의미였습니다. 찬양은 “레위 사람들”의 역할로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대상15:16) 사용해야 했지만, “비파와 수금”이 없이 단지 “제금을 들고 서서…여호와를 찬송”하였다는 것은 사실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포로 귀환자 중에 “노래하는 자들”로 “아삽 자손”(2:42)만이 돌아왔기에, “비파와 수금을 타”던 이들이 없었고 “아삽은 제금을 힘 있게 치”던(대상16:5) 담당자였다는 점에서 “제금”만이 찬양에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금”은 두 손으로 잡고 부딪쳐서 소리를 내는 타악기로, 오늘날 심벌즈에 해당하는 악기입니다. 포로 귀환으로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출 수 없었던 열악한 상황이라 형식적으로는 “다윗의 규례”와 맞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드리는 벅찬 감동의 찬양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그 착공식에서 성가대가 어떠한 내용의 감사 찬양을 불렀다고 했습니까?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3:11). 저들이 부른 “찬양”의 “감사”는, 첫째로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을 돌아보셔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폐허가 된 성전을 다시금 재건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것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이유를 가리켜서,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라고 고백합니다. “지극히 선하”다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지극히 친절하시고 자상하신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을 찬양하는 고백입니다. 둘째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는 고백이, 저들이 부른 “찬양”의 “감사”였습니다. “인자하심” 역시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을 찬양하는 고백입니다. “영원하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성실하신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고백이자,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할 것이라는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되새기게 합니다. 자신들의 죄악으로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다시금 조국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은 실로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는 신앙 고백의 징표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귀환한 백성들이 함께 서로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는 기쁨의 모습을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3:11)라고 증언합니다. 성전 재건은 분명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3:12)은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그 반응이 백성들과 달랐다고 증언합니다.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3:12)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 중에는,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과거 화려하고 웅장했던 솔로몬 성전을 보았고 그때 거기서 섬겼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성전의 규모와 비교할 때 새롭게 재건하는 “성전 기초”의 규모가 너무 초라한 것에 실망하고 낙심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어떻게 경고합니까?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학2:3). 우리 인간은 연약해서 규모와 숫자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함부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당시 포로 귀환자들의 정신적 신앙적인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성전 기초”의 규모에 실망하고 낙심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성전 재건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은 경솔한 행동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어떻게 격려합니까?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학2:4-9). 과거만을 바라보는 이들이 아니라, 성전 재건의 시작을 통해서 장차 새로운 시작을 열어 가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3:12)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3:13)고 에스라는 증언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을 돌이켜서,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부끄러운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것임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철저히 고백하며 회개하는 “통곡하는 소리”로 바꾸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같은 자리에 있던 “모든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의 반응이 달랐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앞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시작과 영광을 사모합니까? 과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질렀던 잘못된 죄악으로 인하여 직면해야했던 역사적 과오에 대해 “통곡”할 줄 아는 회개의 모습이 있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과 조롱 앞에 직면해서, 죄악을 저지른 잘못된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부끄럽게 여기며 반성하고 회개하며 새롭게 하려고 합니까? 아니면, 오히려 교회의 죄악을 지적하는 이들을 가리켜서, 악한 존재로 몰아가며 정죄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신앙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오히려 과거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 모습만을 떠올리며 “대성통곡”하는 모습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과거 한국 교회 건물이 비록 초라할지라도 또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을지라도,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 세상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영광을 업고 이제 한국 교회 교인들이 사회 정치 경제 교육의 중심적인 존재들이 되었지만,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자기 교회와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이기적 집단이 되어서 오히려 사회를 이간질하여 분열과 갈등과 원망의 깊은 반목만을 조장하는 세력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9,23-24)고 말씀하셨는지 알겠습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힘쓰고 애써야하는 자세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포로 귀환자들이 먼저 “제단”의 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 곧 예배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포로 귀환자들의 성전 재건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회복되는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