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광주 양림교회에 가수 윤형주 씨가 와서 찬양과 간증을 했습니다. 그때 자신이 기타를 배우게 된 동기를 얘기해 주었지요. 선배인 조영남 씨가 기타를 치면서 〈딜라일라〉를 부르는 모습에 반해서 독학으로 기타를 익혔다고 하더군요. 아주 작은 시작이 인생을 바꿔놓은 것이지요.
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어 40대 초반에 시 암송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시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느 분이 멋지게 시를 외우는 걸 듣고 나도 외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좋아하는 시를 골라 일주일에 한 편씩 외웠습니다. 눈으로만 읽던 시를 안 보고도 술술 읊을 수 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더군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작심삼일형에 가까워서 무슨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시를 외우고 시를 나누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걸 보면 시 암송에 큰 매력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광주 전남대병원에서 ‘명재상’으로 불린 김황식 전 국무총리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고교 시절 시를 좋아하고 외웠다는 기사를 읽고 한번 뵙고 싶었던 터라 시간을 내어 강연장에 갔습니다. 김 총리는 고위 관직을 지낸 분 중에서 드물게 편안하고 좋은 인상을 주는 분이지요. 김 총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신데, 그저 평범한 시골 분이었지만 어머니께 인간 존중의 정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시골집에 거지가 동냥을 얻으러 온 적이 있다. 내가 얼른 ‘어머니, 거지 왔어요’ 하고 알려 드렸다. 거지가 가고 난 뒤 어머니는 나를 불러 ‘다음부터는 손님 오셨다고 말하는 거야’라고 바로잡아 주셨다. 또 ‘다른 사람하고 다툼이 있을 때 네가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주장을 펼쳐라. 그러나 상대가 너보다 약한 사람이면 져줘라. 너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양보하라’고 가르치셨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지만 삶에 대한 김 총리의 고백도 마음에 담아 두고 싶었습니다. “젊을 때는 내 뜻대로 돼 가는 것 같지만 인생의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만은 안 돼요. 그러니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어요. 순리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살아야지요.”
통일에 관한 강연 후 질의 시간에 “어떤 계기로 시를 좋아하고 외우셨는지, 그리고 시를 가까이 하면 뭐가 좋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김 총리는 “시가 무작정 좋아서 교과서에 나온 시와 시조를 외웠다. 시 한 줄이 인생의 교훈이 되고 생활의 좌표와 신조가 되기도 했다. 시를 많이 읽으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힘이 된다. 시를 많이 읽는 국민이 되면 좋겠다. 광주 시민이 더 그랬으면 좋겠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분과 같은 마음입니다. 많은 분들이 시를 읽고 마음의 여유와 힘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장에서 추천하는 암송 시는 이웅인 시인의 〈민들레〉입니다. 입춘이 지났으니 머지않아 노란 민들레가 겨우내 움츠렸던 우리에게 봄소식을 전해 주겠지요.
민들레/ 이웅인
맑은 날
초록 둑길에
뉘 집 아이 놀러 나와
노란 발자국
콕 콕 콕
찍었을까
암 송 사 랑
서울에 온 어느 영국인 교수는 관악산의 나무를 보더니, 나무를 노래한 토머스 시 전문(全文)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암송하는데 참 듣기 좋았다. 교육 받은 영국인들은 대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한 구절씩은 외우고 있다. 시란 아무래도 외워서 낭송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김성곤(서울대 영문과 교수) < ‘흔들릴 때마다 시를 외웠다,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행복한 시 암송(문길섭, 비전과 리더십, 2016)’에서 옮겨 적음. (2019.10.02.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