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공동체 / 변희수
표지에 실린 불타는 산을 보다가
가을이니, 하면
한 사람에게 막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내용을 짊어진 책등을
산등처럼 바라보며
잡념을 태우는 나무들의 환한 불빛을 좇다가
이마는 밝고 몸은 어둡고 마음은 쓸쓸한
그걸 뭐라고 하지,
발등까지 내려온 화기에
삼라와 만상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런 것과 상관 없이
물드는 것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는 것은
홍안이 백골에 반해버렸다는 것은
퀴즈는 계속되고 가을의 안색은 점점 나빠진다.
점심이 다가와도 적당이란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책을 펼친다.
날개 안쪽에 작을 글씨로 적힌 고경이라는 말을 읽는다.
가을 숲에 누가 일부러 떨어뜨려 놓은 것 같은
녹슨 거울 속으로
나머지 질문이 쏟아진다.
뭐게? 뭐게?
떨어지는 이파리들이 메아리친다.
손바닥이 빨개진 단풍잎을 줍는다.
퀴즈가 끝나기 전까지는
떠날 수 없다.
이 숲에 남아 있어야 한다.
여름이라는 영인본 / 변희수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까마중의 검은 뺨이 익어갔다
관심 밖에서 자라는
여름의 열매들을 펼치면
빛에 시달린 그림자가 누워 있었다
더 이상 꺼낼 게 없어질 때까지 여름입니다
초록이 떨어트린 답안지처럼
밖을 다 사용해버리고 난 다음과
귀와 눈이 멀어버린 마지막이
열매라고
여름을 읽고 베끼던 손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 열매는 모좁니까
아니오
복삽니까
아니오
빛이 스쳐 간 결괍니다
손바닥을 펴면
진위가 궁금하지 않은 오종종한 말들이
검은 알약 같은 얼굴로 굴러다녔다
파악만 해도 되는
페이지에 붙잡혀 있었다
ㅡ 계간 《가히》 2024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