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유권
최병근
곱창집 구석자리 소주를 마시다
다 드러낸 속내를 젓가락으로 집는다
그래, 생은 간보다 가는 거야
양념장에 곱창 한 점 찍을 때마다 사연들이 흥건하다
말하면 뭣해 다 사는 얘긴데
잔이나 받으시오
비운 잔을 옆자리에 건넨다
리시버와 스마트폰으로 중무장하고
훔쳐보는 관심과 소리조차 지워버리며
저 만치 골목을 돌아가는 외인용병 둘이서 세상을 비웃고 있다
얼마나 많은 입술들이 닿았을까 이 술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앉았다 갔을까 이 의자
얼마나 많은 살점들이 지글거렸을까
이 불판
머지않아 비워줘야 할 자리
털고 일어나
포만의 시간을 삼킨 배 두드리며
여직 살아 있다고
어두운 바깥으로 몰려들 나간다
골목은 끝이 있어도 내 골목은 없다
----{애지}, 2023년 겨울호에서
곱창이란 소의 내장을 말하고, 한국에서는 주로 곱창구이와 곱창전골과 곱창볶음 형태로 소비된다. 곱창에는 탄력 섬유가 많아 맛이 쫄깃하고 곱창전골과 곱창구이는 우리 애주가들의 술안주로서 수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최병근 시인의 [우리의 소유권]의 무대는 곱창집이고, 그 주제는 ‘우리의 소유권’이고, 그 결말은 어느 것도 소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먹이활동을 해야 하고, 먹이활동을 해야 하니까 영역다툼(소유권 싸움)을 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 너와 나, 아니,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사람들과 ‘네것’과 ‘내것’의 영역다툼을 해야 하니까, 수많은 지식들로 무장을 하고, 최고급의 전략과 전술을 펼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옛날의 소유권 다툼은 아주 단순했고, 가부장적인 권위와 장유유서의 예법에 따라 폭력적인 서열제도가 정해졌지만, 오늘날의 소유권은 아주 복잡해졌고, 수많은 경제법칙에 따라 그 다툼이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부부 사이에도 소유권 싸움이 일어나고, 형제와 형제 사이에도 소유권 싸움이 일어난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소유권 싸움이 일어나고, 적과 동지 사이에도 소유권 싸움이 일어난다. 더욱더 좋은 자리를 잡고 자기 자신의 권리와 행복을 연주하기 위한 싸움인 만큼, 그 싸움의 대상에는 한계도 없고, 어느 누구를 제외하거나 특별히 용서해주는 법도 없다. “곱창집 구석자리”에 앉아 “소주를 마시다”가도 “다 드러낸 속내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그 사람들의 생을 “간보다 가는” 것이다. 이 친구는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저 친구는 주식투자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 친구는 신용불량자의 신세를 면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고, 저 친구는 타인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하여 모든 지혜와 중상모략을 다 연출해 내고 있다. “양념장에 곱창 한 점 찍을 때마다” 수많은 사연들이 흥건하지만, “말하면 뭣해 다 사는 얘긴데/ 잔이나 받으시오”라고 그 어떤 성과도 얻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나 “그래, 생은 간보다 가는 거야/ 양념장에 곱창 한 점 찍을 때마다 사연들이 흥건하다”라는 시구에서 알 수가 있듯이, 시인은 이미 이 세상의 삶의 이치를 다 알아버린 듯, 이 무차별적인 소유권 싸움이 다 부질없다고 결말을 내린다. 어차피 우리들의 인생은 속내 다 드러낸 곱창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우리들의 인생은 간을 보다가 끝장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간을 보다”는 “짠가/ 아닌가”, 또는 “맛이 제대로 들었는가/ 아닌가”라고 그 맛을 볼 때 사용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생은 간보다 가는 거야”는 그 ‘맛보기의 한계’를 초월하여 역사 철학적인 의미로 확대된다.
인간 존재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일이란 무엇이고, 소유권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은 간보다 가는 거야”는 이러한 역사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면서도, 그만큼 허무주의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고, 삶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고, 소유권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고,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이데아(본질)를 상정할 수는 있지만, 그 본질은 다만 환영이고 껍데기일 뿐, 그저 ‘맛보기용’ 간이나 보다가 이 세상의 삶은 끝장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나 소유권 싸움은 다만, 공연한 소음일 뿐, 외국인 용병들이 “리시버와 스마트폰으로 중무장”을 하고,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하찮다는 듯이 비웃으며 사라져 간다. “얼마나 많은 입술들이 닿았을까 이 술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앉았다 갔을까 이 의자”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또한, “얼마나 많은 살점들이 지글거렸을까/ 이 불판”이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최병근 시인의 [우리의 소유권]은 역사 철학적인 반성과 성찰의 산물이며, 그는 이 반성과 성찰을 통하여 모든 신화와 종교, 또는 모든 성인군자와 모든 철학자들의 행복론을 다 뒤집어 버린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공자는 무엇을 깨달은 것이고, ‘도는 가까운 데 있는데 그것을 먼데서 찾는다’는 노자는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철학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탈레스는 무엇을 이룬 것이고, ‘호탕한 사람은 예술가와도 같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을 이룬 것일까? ‘내 꿈은 세계 통일이요’라던 알렉산더대왕은 무엇을 이룬 것이고, 부처와 예수는 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영원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인생은 속내 다 드러낸 곱창이고, 영원한 간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은 술잔 비우기이며, 영원한 미완성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리는 “머지않아 비워줘야 할 자리”이고, ‘포만의 배’ 두드리며 일어나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골목은 없다. 우리의 소유권이란 자연의 재화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모든 탐욕을 다 버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고 명확하게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소유권이란 탐욕의 산물이고, 탐욕이란 늙고 병든 사자의 이빨과도 같은 것이다. 인생은 끝이 있어도 영원한 삶은 없다. 속내 다 드러낸 곱창집에서 소주잔이나 핥다가 탈탈탈, 자리 털고 일어나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