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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지금
출 8: 8-15
여러분은 자동차 왕으로 알려진 헨리 포드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처음 발명했을 때 친구들은 포드를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만든 자동차는 참으로 유용했지만, 그 차에는 후진 기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드는 친구들의 놀림이 싫어서 이번에는 그 자동차를 개조하여 후진 기어를 만들고 친구들을 공장으로 불렀습니다. 친구들이 그 차를 구경하러 온 날 그는 친구들로부터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공장 문이 차보다 작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포드는 공장의 벽을 허물고 자신의 발명품인 자동차를 꺼내야 했습니다.
사람은 뛰어난 것 같아도 부족한 부분들이 다 있습니다. 아무리 천사 같은 미모와 마음씨를 가진 사람도 지독한 방귀 냄새를 풍길 때가 있습니다. 사자보다 강하고 황소처럼 힘이 셀 것 같은 용사도 감기에 넘어져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부터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천국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난해야 축복을 받습니다.
1. 하나님은 묶인 것에서 자유 주시기를 원하신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집트의 왕인 바로가 있습니다. 바로는 사람의 이름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왕을 파라오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파라오에게 큰 재앙이 찾아 왔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 땅에 묶어 두고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할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순간부터 보혈의 은혜를 통해 마귀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8: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유를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금부터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선택된 백성이라고 선언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이곳에서 나를 위해 예배하기 위해 내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노예가 아니라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갈라디아 5:1절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처럼 마귀는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너는 자유자가 아니다. 너는 아직 내게 속해 있는 자들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들의 발목을 붙들고 계속해서 죄의 노예로 살게 합니다. 옛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 선생조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 이 사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24).
바울 선생의 고백처럼 우리는 진실로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주관하시며 순종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계속해서 육신의 정욕에 붙들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죄의 일을 행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입에서는 온갖 저주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마음에서는 분노가 가득하고, 낙심하면 안된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이미 마음은 낙심하여 한숨이 섞여 나오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 지긋지긋한 어둠의 권세에 붙들려 저주 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왜 과거의 일 때문에 계속해서 마음에 상처로 받고, 고통 받으며 아파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도 우리 자신들이 애굽에서 완전히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노예로 삼고 있었던 원수 마귀의 땅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귀의 땅에서 마귀의 세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귀의 세력에서 벗어나자, 마귀의 땅에서 벗어나자!”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마귀의 세력에서 벗어날 힘이 있습니까? 그럴 능력이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우리 모두는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같은 육체의 정욕에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임한 하늘과 땅과 공중의 어떤 인생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벗어나게 하신 분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할렐루야! 따라합니다. “마귀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자가 되었다”
2. 지금 즉시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유를 요구하지 바로는 아주 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에 있는 모든 맑은 물과 하수를 피로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마귀를 섬기는 애굽 인들에게 피는 저주와 멸망과 고통의 상징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요 권세입니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라는 분입니다. 이분이 쓴 이야기 중에 '진홍 가슴 새'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잿빛 털을 가진 새 한 마리를 만드셨답니다. 그리고 이름을 '진홍 가슴 새' 라고 붙이셨습니다. 진홍이라는 것은 아주 붉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새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진홍 가슴 새라고 이름을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너는 네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진홍 가슴 새가 살던 둥지 근처 언덕에 어느 날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어느 사람이 매 달렸는데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던지 진홍 가슴 새는 십자가에 달린 그를 보기 위해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사람의 이마에는 가시관이 씌워졌는데 그 가시마다 검붉은 피가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진홍 가슴 새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 그 조그만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작은 부리고 깊숙이 박혀 있는 가시를 뽑아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는 솟구쳐 올랐고, 진홍 가슴 새는 그 피로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참고 참으며 가시들을 뽑고 또 뽑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그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진홍 가슴 새는 슬픈 마음으로 십자가를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에 묻은 피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목덜미와 가슴에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그 새가 낳는 새끼마다 목덜미와 가슴에 자신처럼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라게를뢰프’라는 분이 쓴 진홍 가슴 새라는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저주와 고통과 죽음의 상징인 피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상징이 바로 첫 번째 재앙인 피의 재앙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진홍 가슴 새가 자신의 모든 몸에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덮어 썼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피가 내 마음과 영혼과 정욕으로 가득 찬 육신까지도 적시고 적셔서 정결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 재앙이 지나가자 바로는 다시 마음이 변하였습니다. 그는 첫 번째 재앙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재앙이 바로 개구리 재앙이었습니다. 온 애굽 땅에 개구리들이 가득 찬 것입니다.
애굽 인들에게 개구리는 부와 다산의 상징이었습니다. 개구리는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을 찾을 수 있는 안내자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개구리를 냇물과 샘물의 수호신이요 수행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도 개구리를 우상으로 만들어 복 두꺼비라고 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들이 자신들에게 복을 줄 것이라고 믿고 섬기는 그 개구리는 더 이상 축복의 도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개구리는 이제 그들 앞에서 저주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개구리들은 떠들어 대었고, 시끄럽게 울부짖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크루르’라고 말하는데 이는 나일강 수위가 내려갔다는 의미로서 ‘흐루르’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합니다. 이집트는 나일강 물이 내려가면 농사를 시작하고, 그 땅은 풍요롭기 때문에 개구리가 울면 복이 온다고 믿은 것입니다.
개구리가 운다고 복이 오는 것일까요? 우상 숭배자들은 많은 징조를 가지고 복을 따지고, 점을 치고, 자신의 운명을 따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면 그들이 그토록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복을 주는 도구로 생각했던 개구리는 그들의 인생에 저주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오죽하면, 바로가 말하기를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고 했겠습니까?
제사는 개구리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그분만이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6:13절 이하에는 개구리를 세상을 미혹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귀신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최근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신천지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름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시온교회라는 명침을 쓰고, 총회장을 이만희라는 사람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데, 이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추수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신천지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은 뒤 각 개 교회에 들어가 충성을 하게 한답니다. 그리고는 청년회장, 부녀회장, 혹은 구역장 등의 주요 요직을 장악한 뒤에 목사님 몰래 교인들에게 성경 공부를 해 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교인들을 데리고 가서 신천지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가르쳐 이단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교회 외에 다른 곳에서 성경을 공부하자 혹은 말씀 배우러 가자고 하면 일단 의심해야합니다.
심지어 추수꾼이라는 사람들은 절대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는 기존 교인들을 대상으로 "이 지역에 처음 이사를 왔는데 어느 교회가 좋은지 모르겠다"며 접근해서 마치 그 사람이 전도한 것처럼 교회에 등록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일 년 정도는 담임목사와 교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교회의 일을 한 후에 성도들을 안심시키고 그동안 쌓아 놓은 정을 바탕으로 신천지 교리 공부 관계자에게 연결시킨 후에 이단 교리 공부방으로 빼내 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공부하는 교리공부방을 '복음방'이라고 부르고, 이 단계가 지나면, 무료신학원이란 곳에 들어가 본격적인 교리를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추수밭이라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생명들을 추수해야 한다고 교회에 계속해서 침투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말세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늘 개구리 영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 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고 하셨습니다.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결국, 바로는개구리의 재앙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는 모세를 불렀고, 그에게 개구리 재앙을 멈추게 해 달라고 모세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바로는 말하기를 “내일이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지금 저주가 임하고 있습니다. 지금 큰 재앙이 임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인생이 곤고합니다. 내 마음이 지금 엄청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낙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고통스런 일들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 모든 것이 끝나야 합니까? “내일 끝나야 합니까? 지금 당장 오늘 끝나야 합니까?”
혈루병 걸린 여인이 있습니다. 12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의사도 포기했습니다. 돈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녀의 병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 때 그녀에게 “네게 언제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정답입니까?
내가 지금 물질의 문제로 고통을 당합니다. 내일이면 양식이 떨어집니다. 내일 아이들에게 줄 차비조차 없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물질의 축복을 언제 받고 싶으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내일입니까? 오늘 당장 지금입니까?”
내 사업의 길이 막혀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언제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업이 어떻게 될 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사업의 문제가 언제 해결 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당연히 “주님, 오늘 당장 지금 해결해 주세요”해야 하는 것이 정확한 답이 아닙니까?
내가 지금 참 육신의 죄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해서는 안 될 세상의 문화에 빠졌습니다. 게임에 중독 되고, 술에 중독 되고, 3천 가지가 넘는 독이 있다는 담배에 중독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너는 언제 그 길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지금 나는 너무나도 남편이나 아내가 밉습니다. 내 시부모가 밉습니다. 형제가 밉습니다. 내 자녀가 밉습니다. 보기조차 싫습니다. 미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미움이 일어납니다. 그들을 바르게 양육할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 때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네 마음속에 있는 미움의 마음을 언제 치료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마귀로 상징되고 있는 애굽의 왕 바로는 모세에게 대답했습니다. “내일이니라”
내일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곧 오늘 이 시간에 나를 고쳐 주소서, 내 저주를 떠나게 하소서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더 이상 뒤로 미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치료받고 가야 합니다. 해결 받고 가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바로처럼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다시 완악하게 됩니다. 마음이 완강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지금 즉시로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의 날을 미루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미루는 것입니다. 지금 잡아야 합니다. 지금 해결 받아야 합니다. 당장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 시간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주님 내 문제를 지금 이 시간 오늘 즉시로 해결해 주세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바로가 강퍅케 된 이유
출 8: 8-15. 히 3: 7-13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장로님은 어려서 예수를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가정에서 엄한 유교식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장로님이 나이 9세 때에 몰래 극단 공연 구경을 갔습니다. 지금의 을지로 6가의 계림극장 자리에 악극단들이 와서 공연을 하곤 하였는데 장로님이 그것을 보고싶지만 돈이 없어서 담을 넘어 들어갔답니다. 그리고는 구경을 잘 하고 집에 와서 누나에게 이 사실을 다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누나가 이 이야기를 아버지께 일러바친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학교엘 가지 말라고 하시고 장로님을 데리고 극단에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에게 큰절을 하시면서 자신이 자식 교육을 잘못해서 그랬으니 용서해 달라고 하시며 입장료를 지불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들 보다 지체나 형편이 월등했지만 그 사람들에게 큰절을 하시는 것을 보고 장로님은 평생 자신에게 채찍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판사를 거쳐 지금은 변호사이신데 그 때의 교훈이 판사 때나 지금까지 귀중한 정직과 올바름의 잣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실성을 가르치는 것이 인생의 평생에 얼마나 중요한 교육인지 모릅니다.
말의 정직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가정 교육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통을 보세요. 거짓말이 생활이 되어 있습니다. “남자의 거짓말과 오뉴월의 우산 하나는 늘 지니고 다녀야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거짓말은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에 신실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말 바꾸기는 정치인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 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말 바꾸기를 예사로 해도 또 그 사람에게 표를 던져주는 국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일상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11에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라고 합니다.
시편 5:6에는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니”라고 합니다. 시편 101:7에는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계시록 21:8에는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라”고 합니다. 한결같이 성경은 거짓말을 배격하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리라고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말과 행동이 일치되게 하십시오.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기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라고 그의 책에서 권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의 신실성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실이 늘 모니터 당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의 일치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귀어도 유익이 될 사람입니다. 카네기는 경영자 모임에서 “가업에 속임수를 쓰면 반드시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정직한 기업이 잘 되고 신실한 자가 종래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자가 누구입니까? 시편 24:4에는 말합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거짓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과 먼 사람입니다. 시편 89:34에는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사람은 입술에서 나온 말이 변치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입술에서 나온 말은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이런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가는 자”가 제일 좋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닮아가야지요? 사랑하면 닮는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십니다. 우리도 닮아서 거짓을 싫어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닮아가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닮지 않는 이 자체가 거짓입니다. 벤저민 프랭크린은 “어떤 사람에게 말할 때는 그의 눈을 보고, 그가 말을 할 때에는 그의 입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고, 얼마든지 바꾸어도 얼굴이 변하지도 않습니다. 거짓말 탐지기가 고장인가 할 정도로 전혀 변하지 않는 양심이 고장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편 15:4에는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 정말 한번 말한 것은 손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말을 잘 바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편리에 따라 우선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말을 맘대로 바꿉니다. 일반적으로 말을 바꾸면 더 얻어맞아요. 출애굽기 5:2에서는 모세에게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앙을 한 차례 당하고 이제는 “여호와께 구하여”라고 합니다. 자신이 답답하면 하나님을 찾고 구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런 자신의 이익에 따라 말을 바꾸는 사람이 바로였습니다.
첫째,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어 희생을 드리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개구리가 떠나게 하면 이 백성을 보내고 희생을 드리게 할 것이라고 바로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조건적 타협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떤 조건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조건을 내 거는 그 자체가 잘못입니다. 무조건적 명령에 조건적 순종을 하겠다는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무조건적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의 임기응변에 불과합니다. 눈가림이며 눈속임입니다
. 골로새서 3:22에는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권합니다. 눈가림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하나님은 눈가림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눈속임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속내를 다 알고 계십니다. 자신의 눈앞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바로의 모습을 보세요. 가증하고 얄팍한 인간의 꾀로 하나님을 속여 보려고 하는 인간의 가련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윌리엄 펜이란 분이 말했습니다. “모호한 말은 거짓말에 이르는 길을 반쯤 간 것이며, 거짓말은 지옥에 이르는 길을 다 간 것이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 죄입니다.
둘째,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개구리가 죽게 하였습니다.
모세와 바로의 타협이 시작됩니다. “어느 때에 보내 주겠습니까?” 모세가 바로에게 물었습니다. “내일이라”. 바로는 내일 당장 보내어 주겠다고 합니다. 바로의 절박함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는 절박함에서 내일 당장 보낼 것이라고 하였고 내일이라도 개구리 없애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모세와 바로의 대 타협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은 모세가 일방적으로 약속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도 조급한 나머지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하고 바로와 약속을 하였습니다
. 바로와 약속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타협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생각으로 바로와 약속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어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결정하고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내가 먼저 결정하고 하나님께 보고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자세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의논하기를 바라십니다.
훗날 모세의 광야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세가 너무 분주하고 매일 백성들의 송사문제를 해결하느라 하나님과 대화할 시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어볼 시간이 없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세는 탈진하게 되었고 장인의 청을 들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운 것입니다. 이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자신은 하나님과의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진 것입니다.
역대상 10:13-14에는 사울이 죽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묻지 아니한 사울을 아예 죽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은 죄입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세요. 사무엘하 2:1에는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라고 합니다
. 다윗은 작은 일까지 다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사무엘하 5:19에도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다윗은 정말 잘 물어보았고 이런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십니다. 모세도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약속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간구는 더욱 간절하였을 것입니다. “간구함”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이츠아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매우 절박하고 간절한 심령으로 부르짖다”라는 뜻의 ‘차아크’에서 나온 말입니다. 모세도 자신이 선뜻 내일까지 개구리를 없이해 주겠다고 약속은 해놓고 다급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편의 간구를 통해 성취됩니다.
캘빈 밀러는 ‘그리스도가 계신 자리’에서 간구는 세 가지 비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우리는 사랑의 아버지께 우리 마음의 소원을 구할 때 티끌만큼의 거리낌도 없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보다 높은 뜻에 따라 보류될 수 있다는데 동의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 기도의 궁극적 동기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뭔가를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에서 간구하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말대로 개구리를 없이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대로 하십니다. 모세가 일방적으로 바로와 약속했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들으십니다. 민수기 14:28에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소리가 어떻게 들려지느냐가 최대의 관건입니다.
셋째, 바로는 다시 마음이 완강하여져서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바로는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다시 마음이 완고하여졌습니다. 이런 바로의 마음은 이미 예견된 사실입니다. 이전에 개구리가 득실거릴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나를 볼 수 있습니다. 숨을 통하다는 말은 ‘르하바’란 말입니다. 이 말은 “공기를 얻다”는 뜻입니다. 압력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자유롭게 숨을 쉬는 것을 뜻합니다. 제한된 자유를 얻습니다. 일시적으로 숨쉬기가 편합니다. 일시적 순풍을 만났습니다. 이런 일시적 호조가 인간에게 늘 큰 시험이 됩니다.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행선할 때에 그가 탄 배가 파선하였습니다
. 그 배가 파선한 것은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시기적으로 항해하기가 좋지 않다고 항해를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므로 그들은 일시적 순풍에 속은 것입니다. 결국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만나 배와 화물을 전부 잃었습니다. 일시적 순풍은 유혹의 빌미가 됩니다. 완강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바로는 개구리가 넘치고, 악취가 진동하다가 없어지니 다시 완강해졌습니다. 완강해짐이란 ‘카베드’란 말인데 무겁다, 존귀하다, 영화롭다란 뜻입니다
. 히브리서에서도 광야의 시험으로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약간만 자유를 주면 강퍅해집니다. 다급하면 찾다가 자유로우면 다시 완강해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인간성입니다. 이사야 26:10에는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은총을 입어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불의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서 2:4에는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과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합니다. 오래 참으시니 멸시하고, 시험하고, 우롱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결론
윌리엄 테일러가 말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상에서는 성자와 같이 되었다가 병이 낫게 되면 또다시 예전의 악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고 마는가”.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은총을 잊을 뿐만 아니라 은총을 악으로 갚습니다. 은혜를 해로 여깁니다.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나약한 한 사람입니다. 또 한 주간의 삶도 약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항상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삽시다. 완고하지 않고 부드러운 마음이 하나님께 합당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지 말고 올곧게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룻밤만 더
출 8: 9-10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 및 그의 가족들은 점차로 번성하기 시작했고, 400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통치하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속박과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지도자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셔서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열 가지 재앙이 이집트 땅 위에 임하게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개구리 재앙이었습니다. 어디에나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침실에도 개구리, 부엌에도 개구리, 거실에도 개구리, 빵 반죽통에도 개구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것을 거절하면 보라,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지경을 치리라"(출 8:2)
개구리는 그들에게 풍요로움을 주는 신이었습니다...하지만...
궁궐에도 개구리, 더러운 오두막에도 개구리, 작은 개구리, 큰 개구리 개굴개굴 우는 그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다 먹어버릴 정도입니다. 집 안에도 개구리, 뜰에도 개구리, 수 백만 마리 이상의 개구리가 서로 앞다투어 자신들의 자리를 얻으려고 강에서 나옵니다.
그것 뿐이 아닙니다. 죽은 뒤, 악취를 내며 커다란 무더기로 쌓아 올려진 수없이 많은 개구리들! 마침내 파라오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 모세를 불렀습니다.
"주께 간구하여 그분께서 개구리들을 나와 내 백성으로부터 치우시도록 하라. 그리하면 내가 백성들을 가게 하여 그들의 주께 희생제를 드리도록 하리라."(출 8:8)
모세는 틀림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드디어 파라오가 결심을 한 것입니다. 마침내 완고하던 파라오가 개심 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내가 언제 당신과 당신의 신하들과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간구하여 당신과 그 집에서 개구리들을 멸하여 그들이 강에만 있게 하리이까?"(출 8:9)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파라오가 대답했습니다. "내일!!!"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아니 내일이라니, 그건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답이 아닙니까? 개구리가 그의 음식에도, 침대에도, 옷에도, 그리고 집안 구석 구석에 널려 있어서 그와 그의 백성들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구를 듣고 언제든지 그 개구리들을 즉시 없애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일!"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개구리와 하루 밤만 더 지내게 해 주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는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개구리들과 함께 하룻밤을 더 지내는 것을 원했던 것일까요?
파라오는 죄인이자 죄인들의 유형입니다. 그는 순종치 않고, 자만하며, 육적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벗어나 길 잃은 자, 즉 오늘날의 많은 죄인들의 대표적인 표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죄인들처럼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개구리였습니다. 개구리는 그의 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죄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어려움, 의심, 무거운 짐, 고통, 슬픔, 두려움, 혼란, 절망, 비탄의 개구리들, 이것들 모두가 다 우리의 죄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까? 모든 이들에게 닥치는 슬픔과 어려움의 개구리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죄 때문에 생겨나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개구리들을 제거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파라오와 같이, 우리들 대부분은 "내일 제거해 주십시오. 부디 하룻밤만 더 개구리와 함께 묵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일 무엇 무엇을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합니다. 한 크리스천에게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라고 말해보십시오. 그는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자신이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것(고전 6:20)도 인정합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드
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성령 충만하고 말씀에 헌신된 삶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니님께 순복하기로 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 드려지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내일"인 것입니다. 언제나 "내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에서 늘 미루기만 하는 사람 셋을 만나셨습니다.
첫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님,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 사람으로부터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
지 않았습니다. 그는 희생과 궁핍한 생활을 감당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최상의 잠자리에서 "하룻밤 더" 즐기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눅 9:59). 그러나 그는 "주님, 저로 먼저 가서 저의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로 먼저"라는 부분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장사를 핑계삼아 "하룻밤만 더" 개구리와 함께 지내고자 했습니다.
이 구절의 요점은 예수님을 사랑함이 모든 다른 것을 사랑함보다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자원했던 세 번째 사람은 "주님, 제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에도 이 "그러나"가 바로 그의 문제였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 나도 많은 "그러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
이 세 번째 사람은 말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로 먼저 가서" 여기서 우리는 또 "나로 먼저"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나로 먼저 가서 제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하옵소서." 앞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도 곧바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데 대한 그럴싸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이나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별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의 중심을 아셨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나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왕국에 적합치 아니하니라"
우리에겐 아버지를 장사할 일과 가족들과 작별인사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현실적인 우선과제이며 이런 것들을 우선시하는데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을 갖지 못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경건생활에서건 교회생활에건 마찬가지입니다. 갖가지 타당한 핑계를 대며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것을 뒤로 미룹니다. 물론 그런 핑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주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의 경우와 반대로 우리는 성경에서 곧장 주님께 순종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리브가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마침내 자기 주인의 아내가 될 소녀를 찾았습니다. 이제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기 위해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의 어머니와 그녀의 큰 오라비 라반은 아무래도 곧장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석별의 정도 나누어야 하고 뭐 혼숫감도 좀 준비해야겠고 ... 어떻게 지금 당장 보낸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녀로 하여금 몇일, 적어도 열흘은 우리와 함께 있게 하소서. 그후에 그녀가 가리이다"(창 24:55)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거절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리브가를 구슬려 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리브가야, 이 사람과 함께 갈거냐?"(창 24:58)
리브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가겠나이다"
"만약"도 "그러나"도 "그런데"도 없었으며 어떤 기회주의적인 태도도 없었습니다. "가겠나이다! 일어나 예수님께로 가겠나이다! 가겠나이다!" 우리는 더 이상 개구리와 함께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한 젊은 부자 관원도 구원을 얻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의 구원에 근접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재물이라는 암이 그의 영혼을 먹어 버렸고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돌아서서 근심하여 가버렸습니다.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표를 샀습니다(욘 1:3).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요나는 깊고 푸른 바다 위에서 하룻밤을, 즉 하나님의 방법 대신 요나 자신의 방법으로 하룻밤을 더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항상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나운 비바람을 보내셨고 그 낡은 배는 삐거덕거리며, 심하게 흔들거렸습니다. 결국 요나가 바다에 내던져지자 파도는 잠잠해지고 배의 요동도 그쳤습니다...
만약에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방법대로 행했을 때 개구리는 떠나지 않았고, 다른 많은 어려움 들이 닥쳐왔던 것입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이면 개구리가 떠날 줄 알았는데... 내일도 그 개구리는 그대로 있고... 모레도... 아마 당신이 기회를 놓쳐 버린다면 영원히 개구리와 함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분에게 모두 맡기십시오. 바로 지금 돌이키십시오.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지금 그에게 돌이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개구리와 함께 하룻밤도 더 지내서는 안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개구리 대신 더 나쁜 것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개구리 다음에 이, 파리, 메뚜기, 악질, 불, 어둠 그리고 마침내는 이집트 각 가정에 장자의 죽음이 왔습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죄인들이 비참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개구리들이 그들을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교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모든 교만한 자가 굴복될 것입니다(사 2:11).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죄 위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 때에 개구리보다 더 나쁜 것이 올 것입니다.
끝으로 여러분이 더 이상 개구리와 하룻밤도 더 보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일은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잠 27:1)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한 심장병자의 얘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매우 부유하고 덕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구상하며 부지런히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심장병이 찾아왔습니다. 가끔씩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심장발작은 언제나 그로 하여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했습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더 이상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곤 했던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순간 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순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 말입니다. 돈일까요? 자기 사업? 아니면 처자식 그는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돈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 그의 머리에 스쳐지나 간 것은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때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죽으면 그 어떤 것도 이 죽음을 돌이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만다. 시간, 단 5분의 시간만이라도 있다면... 이대로 끝난다면..." 아마도 그때 그의 살아온 모든 날들이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그 수많은 기회의 나날들... 그러나 이렇게 단 한 순간에 나의 인생은 끝나는구나...
은혜의 날들은 끝이 나고 이제 나의 앞에는 영원한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습니다.
그가 여느 사람같이 그 위기상황만을 모면하려 했다면 즉, 여전히 "내일"을 외치며 살았더라면 그가 기다리던 "내일"은 결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끼가 지금 나무 뿌리 위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별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내일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일이면 나무는 장작으로 불타고 있을 것입니다.
내일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38년 된 병자처럼 누워 주위의 상황만 탓하렵니까?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으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주님, 내가 낫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가겠나이다" "주님, 오늘 개구리를 없애 주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십시오. 그리고 오늘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곧장 순종하는 자에게 그분은 감추어진 만나를 주십니다. 악인의 궁전에 거하기 보다 주님의 집의 문지기로 있고자 하는 자를,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 자를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광야같은 이 땅의 삶이 끝날 때 그대는 주님이 예비하신 안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오늘"이라고 말하는 우리에겐 진정한 "내일"이 있습니다.
오늘이라고 말하는 평강교회에는 부흥의 내일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