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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39-46 그 아비 이삭이
먼저 본문의 대략을 살펴보고 다음에 각 구절들을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사태가 진전된 후에 그 시대 선지자였던 이삭은 자기 본래 임무로 돌아가서 예언합니다.
(1)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에서 “뜬다”는 말은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에서가 거처하는 곳에는 땅이 비옥하지 않다는 것이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지 않는 곳이다 라는 뜻입니다.
(2)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라는 예언은 에서에게서 나온 족속들이 다른 족속을 약탈하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족속은 매우 사납고 거칠었습니다(옵10-14).
(3)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에서 “매임을 벗을 때에는” 이란 말씀은 “네가 너 자신을 흔들 때에는”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에서 후손인 에돔 족속들이 쉽게 변동하게 되는 그들의 성격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가 36절에 이어 41절에 보는대로 에서는 끝까지 회개치 않고 도리어 강퍅해졌습니다.
2) 또 42-45절에서 모세는 리브가가 야곱을 구원하기 위하여 취한행동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리브가가 야곱을 하란으로 도피시키는 일은 이중 목적이 있습니다. 야곱을 도피시키는 것은 형 에서에게서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결혼 대상자를 자기 친족에게서 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가 아들 결혼 대상을 친족에게서 찾으려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에 이방족속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종교적 동기가 족장들이 했던 생활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했던 생활 방식은 하나님 중심이었다고 하겠습니다
1. 본문 39절은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입니다.
드디어 에서는 자기가 구하던 것을 얻습니다.
그는 자신이 장자 신분과 명예로부터 격하된 것을 알고 자기 동생 멍에에 복종하는니 차라리 거룩한 백성으로부터 분리된 채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삭이 에서에게도 새로 축복을 해줌으로써 모순된 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앞에서 자기 처분 하에 있는 것이면 전부 다 그 아들 야곱에게 주었다고 공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 대한 말, 즉 먼저 번에 했던 말을 대신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생활에 관한 한 이스마엘을 위해 행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럴지라도 즉시 예외 조항을 추가시키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 약속을 제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외는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씨라 칭함을 받으리라는 선언에 암시되고 있는 그대로 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 아들 야곱이 하나님 뜻에 따라서 복된생활 상속자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자신이 장자 에서를 야곱과 우호적으로 결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에서를 교회, 곧 거룩한 선민들로부터 떠나 보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삭은 에서가 완고하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보고 그의 장래 상태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영적인 축복은 순전히 야곱에게만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에서는 그에게 부속되기를 거절했습니다. 때문에 자진해서 하나님 나라로부터 추방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선지자가 했던 예언(1:3)은 여기 기록된 이 선언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라기 선지는 에서와 야곱 두 형제를 비교하면서 에서는 미움받고 광야를 그의 소유로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여기서 에서에게 비교적 비옥한 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라기 선지가 비교법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과 비교하여 이두메아를 광야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자기가 살던 당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가나안 땅이나 이두메아의 황폐는 엄청났지만 가나안 땅은 곧 번성을 되찾은데 반해 에돔 지역은 영속적 불모지로 정죄되어 전락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록 자기 백성에게 대해서는 에서를 광야 산지로 추방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약속을 무효로 돌리지 않으셨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땅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 산지는 광물질을 포함하여 자연 산물도 많았고 이슬도 공급받아 그 지역주민들이 그나마 먹고 살만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편 이 말씀은 지극히 영적이요, 또 비유적 용법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2. 본문 40절은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보리리라 하였더라” 입니다.
여기서 예언되고 있는 사실은 에서 본인한테서 성취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것들은 아주 먼 훗날에 되어질 일입니다. 야곱으로 말하자면 자기 형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긴 커녕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는 도리어 에서에게 사정사정하면서 복종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여기서 멍에를 꺾는다고 언급하는데 그것은 아주 요원한 시기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에서 자손에 대한 장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이삭이 제한한 약속은 첫째로 그들이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라 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그들은 대적에게 둘러싸여 있으므로 호전적이고도 평온하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그 하나요, 또 그들은 자유로와서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그 둘째 의미입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칼을 사용할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 나온 의미가 보다 더 적합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너무 자만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약속을 제한하려 하신다는 뜻입니다. 평화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백성 역시 그들을 괴롭히는 원수가 항상 조금은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칼을 의지하고 사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것은 마치 에서 자손들은 합법적 권세로 자기안전을 유지한다기보다 강도처럼 무기와 폭력으로서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2) 이삭이 약속의 두 번째 제한은 비록 에서가 칼로 무장할지라도 자기 동생에게 대한 복종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두메아인들은 결국 택함 받은 민족인 다윗 왕국의 조공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속은 오래 계속되진 않았습니다.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주변 민족들을 복속시키고 두렵게 만들던 세력도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 이두메아인을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얼마동안 복종시키신 것은 이 예언을 눈에 보이도록 증명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나머지 시간에 대해서는 비록 자유를 속박 당하지는 않았지만 에서는 어떤 다른 예속 상태보다 더욱 비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본문 41절은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입니다.
여기서 에서에게서 나온 눈물이 진정으로 회개한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맹렬한 분노의 증거였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자기 동생에게 대한 적의를 남몰래 간직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사악한 위협으로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동생을 살해하려는 극한적 의도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 속에서 지향하는 악한 의도는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에서 속에 있는 악한 지향성인 의도가 야곱 뿐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며 가족 전체에 확대될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까지 포함하는 방식입니다.
그가 하나님 명령을 칼로 폐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신을 모독하는 완강한 불복종심마저 엿보입니다. 그는 야곱이 약속 받은 기업을 누리지 못하도록 조처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아버지가 행한 축복의 효력을 완전히 묵살하는 처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축복의 전령이요 사자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는 위선자에게 대한 생생한 묘사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에서는 자기 아버지 죽음이 자기에게 애통스러운 날이 될 것같이 가장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고인이 된 아버지를 조상하는 것은 경건한 의무요 도리입니다. 그러나 에서가 애곡의 날 운운하는 것은 한가지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경스럽게도 자기 동생을 처치하려고 다급해 있던 에서로서는 아버지 죽음이 너무도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임종이 임박한 것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자기 동생의 죽음을 갈망하는 동시에 모든 자연 법칙을 전복시키려고 꾀하는 그가 무슨 배짱으로 인간적 애정을 가지고 있는 체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자연스런 충동으로 이런 공언을 했으리라는 것도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는 이로 인해 자신을 더욱 심하게 정죄하게 될 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악한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로 그를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그들로 변명할 수 없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그가 수치감 때문에 잔인한 마음을 억제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크게 칭찬 받을 만한 일로 생각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우매하고도 야수 같은 무시를 나타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앞장에서 본대로 경건한 자조차도 때때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런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세하게 됩니다. 그런 반면에 악한 사람 마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에게 대한 희망만이 남게 됩니다. 단지 인간에 대한 공포와 수치감 때문에 악을 금하는 사람은 거의 발전하지 못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고해를 명예로운 일로 존중하며 칭송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고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범죄를 제지시킨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자기 수치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고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죄를 덜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경건 생활 규칙은 우리 양심에서 하나님을 증인과 심판관으로서 우리 앞에 세우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카톨릭 교도의 그런 주장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4. 본문 42-43절은
“(42)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입니다.
이제 모세는 새로운 주제에 대한 기사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 아비 집을 떠나 방랑하면서 메소보다미아로 들어가는 장면을 서술합니다. 리브가는 자기 행위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아들이 죽음 직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절박한 위기 에 놓이게 되어진 사실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거룩한 부인에게 심히 괴롭고 가혹한 시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번 받았던 은혜를 계속 소유하기 위해 믿음으로써 대항하였습니다. 그녀가 만일 자기 작은 아들에게 대해 모성에 이끌려 행동했다면 장자 권리를 큰 아들 에서 에게 회복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빠르고 최선 한 해결책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했다면 경쟁했던 원인도 제거될 것이었습니다. 또 자기 권리를 잃고 수심에 잠겼던 에서도 분노를 달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브가가 여기서 취한 행동은 비상한 신앙으로 그의 일을 추진한 증거입니다. 리브가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 야곱을 설득하여 한번 받은 축복을 포기하느니보다 차라리 자발적인 유배자가 되어 그 아들이 모습을 감추게 합니다. 아버지 이삭이 했던 축복은 이제 환상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몰랐습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이삭이 했던 축복을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놀랍게 나타나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했던 행위를 후회하기커녕 그 아버지에게서 받은 축복만 야곱과 함께 다닌다면 쓰라린 유형 정도는 형벌도 감수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 하나를 얻습니다. 십자가가 보다 나은 생명에 대한 소망을 수반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견디어야 합니다. 설사 여호와께서 세상에 아무런 확정된 거주지가 없는 순례자로 방랑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 우리를 하나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끈기 있게 견디어야 합니다.
야곱도 이런 이유로 평온하게 생활할 수 있던 자기 아버지 집에서 쫒겨 났습니다. 그래서 이방 땅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상실하면서까지 자기 형과 현세적 화평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육신이 원하는 이익이나 세상 유혹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믿음으로 가야할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온갖 종류로 초래되는 손실을 넓은 도량으로 참아서 소망의 닻을 하늘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리브가는 에서가 자기 동생을 살해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말합니다. 이때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이 악한 살해 이외의 수단으로는 진정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5. 본문 44절은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입니다.
사실상 본문에서와 같이 이런 상황이 온다면 그것은 형벌의 강도를 경감시켜 줍니다. 고생하는 시기를 단축하는 것은 역경 중에 있는 우리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서가 가지고 있는 적개심은 자기 동생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누그러지지 않을 만큼 완강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몇 날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에 있어서 ‘몇’ 이란 단어는 문자 그대로 하자면 ‘하나’의 복수형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제 스스로 떠나가 버리면 에서의 마음에서도 불쾌한 기억이 즉시 도말되리라는 암시를 합니다. 그녀는 ‘잠간 동안만 여기를 떠나라 그러면 우리는 곧 그의 분노를 가라앉히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6. 본문 45절은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입니다.
리브가는 왜 둘을 다 잃을까봐서 두려워 하는 것입니까? 야곱은 기질이 온화하고 차분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을 치려고 일어날 위험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리브가가 한 말에서 결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살인자에게 복수를 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행을 간과하시며 자기 심판을 천연시키시는 듯이 보이더라도 골육상잔에서 물러나 계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리브가는 살아 남는 자를 두려워하고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홀로 남는다고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녀는 그토록 큰 악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심판이 어떻다는 것을 그 마음에 예상하고서 살인자 에서를 파멸에 내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하나님의 명백한 징벌에 대해는 우리 눈을 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7. 본문 46절은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입니다.
1) 지금 시점에서 야곱은 은밀하게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이 출발하는 것을 위해서 이삭에게서 허락을 얻어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일사불란한 가정 통제와 규율이 그런 행위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그 남편 이삭에게 사실 외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그것이 허위라는 비난을 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사실 전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가 자기가 헷사람 며느리들 때문에 살기가 싫을 정도로 고통을 받는다고 증언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보다 많은 내부 악을 슬기롭게 감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남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배려에서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해서 에서에게서 나오는 분노를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악인은 때때로 자기 죄가 상대에게 탐지되어 버리면 절망으로 인하여 더욱 더 제정신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며느리들의 악한 행실로 가나안 종족과 맺은 인척이 리브가에게 미움을 받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장차 교회의 대적이 될 자들과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얽혀들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는 다시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2) 이제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하나님을 알고 알아가게 되는 자가 연약한 중에 그나마 믿음에서 믿음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혜택을 등뒤로 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은 에서나 헷사람의 딸들이나 그 땅의 사람들과는 큰 차이를 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곧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사실이 사람 속에서 스스로 돋아나서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악한 지향성의 의도, 혹은 지향성의 오류를 차단하거나 멈추게 하거나 근절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일이 그 지향점이 어디가지 일 것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 볼 대에 우리 생활 차원이 하나님 때문에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