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와 존귀의 관
시편 8 : 1 - 9
이 시편은 전 우주와 전 인류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시편이야말로 모든 시편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이제 앞으로 생각하게 될 시편 19편이 맑은 날 햇빛이 비치는 때에 쓴 것이라고 하면 오늘 읽은 시편 8편은 달빛이 은은히 비치고 별빛 반짝이는 밤 하늘 아래서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구의 교회에서는 주님 승천일에 이 시편을 많이 낭독합니다. 왜냐하면 그날에 주님께서 인류의 완전한 대표로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늘을 보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달과 별을 볼 때에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 주님의 영광을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찬송합니다. 하늘과 땅에 가득한 만물은 조물주 하나님의 지혜로운 솜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만물을 바라볼 때 그냥 보지 아니했습니다.
가령 요사이 봄철이 되면서 얼어붙었던 나뭇가지에 새 움이 트고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길가에 피어 거리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볼 때 그저 ‘아! 꽃이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잔디가 싹트고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오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며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한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져 이 사실을 몰라봅니다. 이것은 오직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하나님의 영광, 다시 말해서 조물주의 지혜와 그 손의 자취를 바르게 믿고, 알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오히려 장성한 사람보다 편견이 적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나 의지를 그대로 시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의 눈을 보셨습니까? 얼마나 맑고 깨끗합니까? 티가 없습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 중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마음의 눈이 밝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른들의 눈을 보셨습니까? 대개의 경우 눈동자에 혈관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눈이 시뻘겋게 되어 있습니다. 왠지 아세요? 화내고, 미워하고, 욕심부리고, 정욕을 품고, 이러는 동안에 눈 흰자위에 붉은 현관이 나오기 시작해서 충혈된 눈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어른도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거나 혈기 부리지 아니하고 시기심 없이 사는 분의 눈을 보세요. 깨끗합니다.
전에 이태리 밀라노 지방에서 감독을 택할 때 사람들이 모여 고심을 하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암부로스를 감독으로 모시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회중들은 이 음성이 바로 하나님의 지시인 줄 알고 그대로 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암부로스는 유명한 감독이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은 무의식 중에서 어른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높은 사람·낮은 사람, 유식한 사람·무식한 사람, 있는 사람·없는 사람을 따지며 교만하기도 하고 비굴하기도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부잣집 아이, 가난한 집 아이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갈라놓습니다.
어린아이는 겸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어린아이는 어른보다 자연계를 더욱 즐깁니다. 어른들은 나무 하나를 보아도 이게 얼마짜리나 될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나무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하며 기뻐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신뢰심이 많이 때문에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부모만 있으면 다 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고 하긴 하면서도 걱정 근심이 쌓여 잠을 자지 못하고 혈압이 오른다 내린다, 당이 나온다, 산다 죽는다 야단합니다.
우리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콜롬비아호 우주선이 존 영, 로버트 크리픈 두 우주인을 태우고 역사적인 출발을 해서54시간 24분 동안 지구궤도를 36번 돌고 예정보다 6분 빠른 새벽 3시 22분에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처음 우주 여행을 해 본 로버트 크리픈은 우주가 너무 아름다워 더 머물고 있고 싶을 정도로 황홀했다고 감격해 했습니다.
정말 이제 우리는 우주 시대에 사는 실감이 듭니다. 앞으로 우주 관광 버스를 제작하는데 1인당 여비가 4억 원이 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고요히 성경을 상기하면서 바른 우주관과 바른 인생관을 소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세요.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저’는 인간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했는데 여기 ‘천사’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엘로힘’이라고 하는 말로 이것은 ‘하나님’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천사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그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40장 6절에는 풀과 같다고 했습니다. 시편 62편 9절에는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는 “질그릇” 같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동양 철학에서도 인생의 허무함을 말합니다. 창해일속이라고 합니다. 일장춘몽이라고 합니다. 어떤 짓궂은 사람이 말한 대로 없고, 없고, 없고, 없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는 철없고, 젊어서는 정신없고, 중년이 되면 시간없고, 늙어지면 형편없다가 없어지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두 우주인이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새로운 기원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의 기술, 과학의 힘이 굉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힘이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 만능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할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사실 그대로, 진리대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능력의 제한이 있습니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력에도 제한이 있고, 체력에도 제한이 있고, 의지력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 우주를 보세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문자 그대로 광대 무변합니다. 옛 격언에 “천문학자로서 불경건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일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팔목에 차고 다니는 시계 하나도 우연히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80여 부분의 부속품으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만 빠져도 그 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람의 몸도 과학자의 말을 빌리면 2억 조의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전자나 너무 크고 멀고 넓어 볼 수 없는 태양계나 은하계가 꼭 같은 원리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을 알게 될 때 감탄과 감격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태양계의 움직임을 보세요.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수성, 금성 그리고 지구입니다. 그 다음이 화성이고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이렇게 되는데 그 거리도 아주 비례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태양에서 가까울수록 천천히 돌고, 먼 것일수록 빨리 돌아갑니다.
태양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성은 43일만에 한바퀴 돕니다. 그러니까 21일이 낮이고 21일이 밤입니다. 21일 동안 잠자고 21일 동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낮에는 더워서 다 타 죽을 것이고 밤에는 다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지구보다 태양에서 갑절 먼 거리에 있는 목성은 열 시간 반만에 한 바퀴 돕니다. 낮이 다섯 시간, 밤이 다섯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녕히 주무십시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다가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지구는 어떻습니까? 한 번 자전하는데 24시간 걸립니다.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365일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것도 똑바로 서서 도는 것이 아니고 23.5도의 경사를 가지고 돌기 때문에 절기가 바뀝니다. 일년이 사계절로 나뉘어져서 얼마나 변화가 있고 사는 맛이 있습니까?
서울 거리에 수십만 대의 자동차 때문에 얼마나 사고가 많이 납니까? 하루 평균 수십 명의 사람이 사고로 인해서 생명을 잃습니다. 그러나 우주 공간 안에 별들이 그렇게 많이 회전하고 있지만 아직 별이 충돌했다는 얘기는 우주 형성 이후에 한 번도 없습니다.
에딩톤이 쓴「별의 원자」라는 책에 물체의 크기에 대해서 말하는 중에 “사람들이 평균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같이 원자의 크기도 평균 일정한 표준이 있고 별들은 태양을 그 표준으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빗방울 하나만 보아도 크기가 비슷합니다. 이것이 주먹만하다면 아마 비에 맞아 죽는 사람도 굉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이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우주에 대하여 우리의 한정된 머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오묘막칙한 일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천문학계의 권위자인 케플러는 그의「조화」라는 책에서 “창조주여, 당신께서 그 창조를 통하여 나에게 기쁨을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뉴튼은 “하늘을 바라볼 때 무릎을 끓어 경배 아니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곧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관을 씌우신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관을 씌워 준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서 지, 정, 의의 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비슷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격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인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빛나는 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이 우주가 크다고 하지마는 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더욱 위대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고, 이치를 미루어 추리할 수 있고, 연구하여 새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술, 음악, 문학, 과학 같은 모든 방면에서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짐승에게는 이런 관이 없습니다. 그저 짐승은 본능대로만 삽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발전도 변화도 없습니다. 오백년전 개미집이나 현대식 개미집이나 다른 것이 없습니다. 고조 할아버지때 까치집이나 증손때 까치집이나 똑같습니다. 왜요? 본능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곰이 춤을 추는 것도 본능적(반사작용) 행동이지 이성에 의한 예술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을 주셔서 창의력을 개발하여 컬러 텔레비전을 만들고, 우주선을 만듭니다. 인간에게만 이 빛나는 이성의 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칸트의 말과 같이 하늘에는 별이 있고 우리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덕 의식, 다시 말하면 양심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다”고 하였습니다. 지구는 말할 것 없고 달도, 화성도, 목성도 모든 우주가 다 포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지음 받은 그 자체가 아주 큰 특권이요, 그 위에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큰 특권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먼저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으니 참된 종교적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찾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짐승은 본능대로 살기 때문에 본능만 충족시키면 됩니다. 먹고 싶을 대 배불리 먹이면 되고 졸릴 때 자게 하면 됩니다. 그밖에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하고 다릅니다. 집에서 키우는 짐승이 고민 거리가 생겨서 사람들은 다 잠이 들었는데 자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고민하는 것 보셨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이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죄를 범하면 마음에 평화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귀한 생활의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만도 압니다 우리 인간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을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용서받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찾아서 그를 좇으며 그를 통해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빛나는 이성의 관을 씌워 주셨기 때문에 각 방면에서 창의적인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처럼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이성을 통해서 주어진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곳에서 내가 헌신하는 그 자리에서 창조의 생활을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일에, 사무원은 사무실에서, 사업가는 기업 경쟁을 통해서, 선생은 교단에서, 군인은 군대에서, 예술가는 예술 방면에, 의사는 치료하는 일에, 가정주부는 가정 관리에, 과학자는 과학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간단없이 창조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앞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를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자리로 날마다 나아가야겠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빛나는 양심의 관을 씌워 주셨기 때문에 양심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양심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양심을 거스려도 안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양심은 지남침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돈에 양심을 팔아서는 안됩니다.
정욕에 양심을 팔아서도 안됩니다.
권세욕에 양심을 팔아서도 안됩니다.
명예욕에 양심을 팔아서도 안됩니다.
인간은 양심을 지킬 때 인간입니다. 그러지 못할 때는 인면수심이 됩니다. 얼굴은 사람이지만 속은 짐승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다 하나의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지음 받은 이 자체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특권을 깊이 생각해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인간 이하의 생활로 전락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에게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 주셨지만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되어서 이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다 변모가 되고 일그러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볼 수가 없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변모된 면류관을 다시 회복하고 참된 인간이 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뜻하신 온전하고 그대로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그를 따르고, 그를 순종하고, 그를 본받을 때에만 온전히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일그러진 모습이 바로잡힙니다.
깨어진 심령이 회복됩니다.
죽었던 심령이 살아납니다.
사마리아 여인, 우물가의 여인이 바로 그런 사랍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근심과 걱정, 죄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심령은 다 주님께 나오라고 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는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할 때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로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게 하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열이 나서 죽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모세에게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서 달라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갑자기 된 일이니까 그저 놋으로 뱀 비슷하게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놋 뱀을 쳐다볼 때는 살았습니다. 반면에 시시해 보인다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뱀에게 물려 고생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십자가를 믿음 없는 눈으로 바라보면 어리석고, 미련하고, 수치스럽고, 멸시의 대상입니다. 약자의 표시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려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요, 화해의 상징이요, 용서의 증거요, 승리의 깃발이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노래합니다.
주가 지신 십자가를 나는 자랑하노라
흘러가는 역사 위해 홀로 우뚝 섰도다
온갖 환난 덮쳐 와도 희망 잃지 않으리
십자가는 나의 평화 나의 희망 되도다
주의 밝은 빛과 사랑 나의 길을 비춘다
내가 받은 온갖 기쁨 갖은 고초까지도
십자가의 영광 중에 하늘 축복되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난 주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드십니다. 그래서 일그러진 우리의 심령이 고침 받고, 범죄한 우리의 심령이 용서함 받고, 하나님이 씌워 주신 영화와 존귀의 관을 다시 회복하십시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쉬임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라.
시편 8편 1-9절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라 (시편 8편 1-9절)
<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라 >
시편 8편은 아름다운 창조물을 만드신 창조주의 이름을 드높인 시편이다.
이 시편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새삼 느낀다.
20세기 후반에 한국 교회에 다음과 같은 선포가 유행처럼 번졌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마야 물러가라! 사업은 잘 될지어다!”
성경에 그런 유사한 선포를 통해 병과 귀신이 떠난 사례가 있으니까 자기도 성경대로 따라서 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렇게 선포한 후 병은 낫지 않고 사업은 망하는 경우다.
그러면 본인은 “아니면 말고!” 하면서 그냥 가볍게 넘기지만
그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먹칠한 셈이 된다.
누군가가 유명한 사람을 사칭해 돈을 벌려고 할 때 사칭 당한 사람이 자기 이름을 써준다고 좋아하겠는가?
매우 기분 나쁠 것이다.
그처럼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운 후 “아니면 말고!” 하는 가벼운 태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늘 소중히 받들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했으면 힘써 지키라.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됨을 기억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과 선포를 습관적으로 하지 말라.
예수님의 이름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최상으로 높일 때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참된 응답의 역사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 만물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멋지지 않니? 너를 위해 만들었단다.”
다윗은 자연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영적인 귀로 듣고 노래했다.
“하나님!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윗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김으로 하나님을 드높이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드높이는 것이다.
<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라 >
하나님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붙잡는 겸손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힘 있는 원수들을 잠잠하게 만드신다(2절).
하나님은 약자를 통해 강자를 부끄럽게 하기를 즐겨하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약자를 귀히 여겨야 한다.
약자를 일일이 찾아서 다 돕지는 못해도 약자에 대해 긍휼한 마음과 시각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도 입는다.
더 나아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라.
다윗은 노래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표현 중 이 표현보다 아름다운 표현은 없을 것이다.
최초로 달을 밟은 암스트롱은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성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대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은 자연을 귀하게 여긴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하는 것은 자연을 아름답게 지으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후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하셨다.
성도는 하나님이 좋게 지으신 자연을 아름답게 보존할 책임이 있다.
태초에 사람이 없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은
말세에 사람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기를 기뻐하신다.
사람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도 각각의 방식으로 나름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자연을 남용함으로 피조물들의 찬양 소리를 탄식 소리로 바뀌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잃는다.
반면에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잘 완수하면 영혼은 큰 진보를 이루게 된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