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박영보 | 날짜 : 14-08-03 23:11 조회 : 1552 |
| | | 군 부대 내에서의 가혹행위
박 영 보
“보급반 전원 집합” ‘또 한잔 하셨구먼’. 취침점호도 끝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제대말년의 김병장. 오늘은 또 무슨 꼬투리를 잡아 몽둥이 찜질을 하려는 걸까. 정식 외출증을 가지고 영 밖을 나가는 것이 아니고 주중에 느슨한 쪽의 철조망을 들어올리고 나가서 부대 주변의 술집에 다녀와서는 이렇게 모여놓고 일을 벌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날 모인 보급반 요원은 여섯 명쯤으로 기억된다. 우선 같은 계급이라도 군번 순으로 줄을 세워놓는다. 그 중에는 같은 병장도 있지만 군번 순으로 따진다면 김병장보다는 후임이고 그 뒤로는 상병도 있고 일병도 있다. 나는 이 부대에 전입해 온지 한두 달밖에 안 되는 최고 쫄 자인 일등병이니 맨 끝자리에 서 있게 된다.
“꼬나 밖아 이 새끼들아” 아무런 설명이나 이유도 없다. 곡괭이 자루가 각자의 엉덩이를 두어 차례씩 지나칠 때마다 “어이쿠” 하며 나뒹군다. 내 차례가 됐을 때 한대를 맞고는 엉덩이를 더 치켜 올렸다. 쓰러지거나 비틀거리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두 번째의 몽둥이는 더 세차게 내려쳐진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두대로 끝난 것이 나는 세대를 맞게 된 셈이었다. 보너스였나 보다. 아마 “쳐볼 테면 쳐봐라”라며 반항이라도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일어 서. 너희들 나에게 할말 있으면 이럴 때 마음 놓고 해봐.”라며 약간의 여유라도 보이는 듯하다. “이곳은 군대이니 할 수 없죠”라거나 “여기가 어디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불만 같은 건 없습니다” 라는 식의 대답들이다. 이게 마치 정답이기나 한 것처럼. 내 차례가 됐지만 나는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런 나를 째려 보고 있던 그. “넌 네 차례도 몰라 이 새끼야”다.
“김병장님, 김병장님은 내 진심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싶으신 것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래, 네 진심을 한번들어보자.” 다소 느긋해진 목소리다. “이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더러워서 못살겠습니다.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을 계속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알았다. 이제 모두들 각자 내무반으로 들어가도 좋다”라는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보급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도 맨 뒤로 따라 나서려 할 때 “야, 이 새끼야 너는 남아있어” 라는 것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는 보급반 사무실의 문을 안쪽으로 잠갔다. 웃통을 벗어 젖히고 바로 내 앞에 다가선다.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고 부동 자세로 꼿꼿이 서 있는다. 왼쪽 볼에 한대가 날라온다. 소위 말하는 ‘아구 통’이라는 것이다.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날라온다. 가속이 붙은 주먹질은 그 강도가 점점 높아져 탄력이 붙는다. 정강이를 짓이기는 군화발, 조인트라는 것이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다. 비틀 거리며 스텝이 흩어지면 다시 자세를 바로 잡는다. 이 경우야 말로 “쳐볼 테면 얼마든지 쳐보라”는 오기가 발동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분을 사기지 못해서인지 판자로 만든 길다란 의자도 난무한다. 두 동강이가 나는 의자. 얼굴에서 찬 기운을 느끼게 된다. 잠시 의식을 잃자 내 얼굴에 찬 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깨어난 나에게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나가버린다. 엉덩이, 허리, 정강이, 어깨, 가슴, 양쪽 볼, 턱, 입 속, 어느 한군데 성한 곳이 없다. 입 속 이곳 저곳이 헤어져 삼 사일 동안 식사도 못해 중환자나 먹는 녹두죽을 먹고 지내야 했다. 위생병이 놔주는 포도당 주사 두 병 정도를 맞아가며 기운을 차려야 했다.
김병장. 전입 첫날 밤, 나에게 열 차례 이상의 신고를 반복해서 시켰던 사람이다. 어디서 왔으며 출신학교, 사회에서의 활동 등 여러 가지 질문을 해가며 “야 이 새끼야, 여기 있는 모든 병사들은 돈도 있고 빽 도 있는 새끼들만 모여 있는 곳이니 여기서 잘난 척 했다가는 골로 갈 줄 알아”라며 “나도 K고교에 Y대학을 다니다 온 놈이다. 까불지 마”라던 사람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재학 중에 입대를 했고 나는 졸업을 하고도 거의 일년 동안 일을 하다가 병역의무를 위해 자원입대를 했는데 그는 나보다 두세 살 정도 어린 나이였는데 말끝마다 ‘이 새끼야’ 였다. 이 부대는 서울의 도봉산 밑 창동에 있던 육군 XX 후송병원이었다. ‘의무보급’이 내 병과였기 때문에 이 병원으로 배속되었는데 그의 말처럼 이 병원에서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돈 있고 빽도 있으며 소위 말하는 팽팽한 집안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 같았다.
이것이 1960년대 중반의 군부대 내의 풍속도였다면 오십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쯤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나를 생각해 본다. 그런 것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사람 목숨 같은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세대로 이어져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남을 괴롭히며 얻는 결과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남의 인격도 그만큼 존중할 수 있게 될 것도 같은데~. |
| 정진철 | 14-08-04 02:01 | | 박선생님 고초가 많았네요~ 그것은 추억이 아니라 상처입니다. 철없는 학창시절에 이지매를 당하거나 상습적으로폭행을 당한사람은 평생 그 악몽을 잊지 못하고 한이 남는답니다. 제 고교 동창생중에 시골에서 올라왔던 친구가 불량학생들로부터 구타를 많이 당했답니다. 그당시는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사회에 나와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친구는 동창모임을 기피하기에 물었더니 그런사실이 떠올라 어울리기가 싫다고 했는데 요즘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육군 사건은 사실 사단장은 파면 시키고 연대장등은 구속해야 반성들을 할텐데 그렇게 못하고 있네요~ | |
| | 박영보 | 14-08-04 04:14 | | 그 때의 그 김병장.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 집니다. 한때의 조그만 상처가 아직까지도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걸 보면 그 때 그 상처의 깊이가 꽤나 깊었나 봅니다. 그러나 제가 아직껏 이렇게 살아 있는 걸 보면 차라리 그때가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일연의 사건들에 비하면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저와 보급반 요원들은 그 김병장으로부터 더 이상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의 눈을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다닐 수 있었고요. 감사합니다. | |
| | 김권섭 | 14-08-04 08:46 | | 박영보선생님 글을 읽으니 군대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감니다. '60년대 군 생활했던 저도 태권도, 총검술, 사격 등을 못해 조교들로부터 곤욕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기성부대에 배치 받은 후에는 고참이라는 자가 부당하게 한 밤중에 구타를 하여 맞대결로 이판사판 영창 갈 각오로 대항을 했더니 그 다음 부터는 나를 조심하여 겨우 군생활 35개월 15일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강한 자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영보선생님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 박영보 | 14-08-04 11:00 | | TV News에 계속 윤일병 사건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각분야의 전문인들의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치료, 태어나서부터의 가정교육부터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를 쓰고 일류 명문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생의 길이 활짝 열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생각.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Self Esteem의 바탕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생각. 자기존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남도 존중할 줄도 알 것이라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보이는 게 모두 부처님이요, 돼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돼지로 보인다> 했던 무학대사의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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