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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 소설은 작가 박완서 선생의 유년기의 자화상이다. 박완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 이십호가 안 되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나, 북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이야기 까지가 이소설의 줄거리다. 이 책은 소설이라 기 보다 자서전에 가까운 수필로 보인다. 나의 생각이라 기 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작품해설 글이다. 소설이 뭐냔 정의 같은 이야기는 생략한다.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7살 많은 오빠로 말미암아 집안이 풍비박산된 6.25 와중에 오빠가 죽고, 조카아들 둘만 건져 낸 이야기가 끝인데 아무튼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 책이 2002년에 쓰였으니 선생이 환갑이 지날 뒤 뭐 못할 얘기 있나하고 쓴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오빠의 공산당 활동과 자신의 좌파적 성향으로 고등학교 재학 시 남산에서 열린 좌파 궐기대회 참석한 얘기와 며칠간의 대학 생활에서도 민청에 참여해 복사를 지원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봐서도 보수당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이 당선되니 이야기를 터놓고 한 듯 보인다. 민청은 민주학생동맹의 약자로 소련공산당과 김일성 수령의 교시를 읽고 예찬하고 열광하게 학습시키고 실천했다.
1930년 대 생은 우리와 함께 사신 1890년생부터 나라를 잃은 1900년 대, 왜정치하의 1910년,1920년 대 생 그리고 1940년 대 생까지 6세대 중 가장 불행한 시대를 청소년기로 보낸 분들이라서, 나는 가장 불우한 세대라 평하는데 이 세대는 어려서는 대다수 없는 집과 시골 아이들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부 있는 집 아이들은 일제의 글과 말을 따르며 학교교육을 배우지만 눈치를 먼저 배우고, 해방되어 청소년기에 좌우의 극한 대립으로 이념이 뭔지도 모르며 싸우고, 공산치하는 의용군이란 미명에 공산군에 입대, 또는 학도병으로 아군에 징집 되여 전쟁을 격은 세대다. 정치, 경제, 종교, 문중이나 단체에서도 대다수의 삼십년 대 생이 우리나라의 발전이나 순리에 역행하고, 공공의 이익에 저해되는 일 만 골라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적 사고를 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 세대다.
우리와 약 20년 차이를 보이는 당시의 농촌과 서울의 세상구경을 해 보자. 근지 있는 반남박씨 양반의 후손으로 그 동리는 양반 박 씨는 두 집이고 나머지는 양반이 아닌 홍 씨가 사는 씨족 마을인데 송도 사람은 양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뱃장이 있었다. 어린 박 선생이 할머니에게 양반이 뭐냐? 물으니 웃으시면서 개 팔아 두 냥 반이란다. 답을 한다. 조부는 집안 여인은 송도에 출입을 안 시키고 당신이 모든 일상용품을 사온다. 당연히 여자는 밭일도 안 시킨다. 나머지 홍 씨도 모두 땅을 가진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닌 소작농은 되는 경제력을 지닌다. 여덟 살까지 박 선생은 박적골 이외는 가본 곳이 없었다.
조부는 송도에서 덕국(독일)의 물감을 사와 여인들의 옷에 빨간 물과, 검은 물을 들여 입었다. 조부의 명령이면 할머니는 죽는 시늉까지 하고 며느리들은 시아버지를 별로 무서워하지는 않고 웃으면서 사색이 되는 듯했다. 박 선생은 할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는 유일한 손녀인데 조부가 출타 후 며칠 만에 돌아오시면 사랑마루에서 기둥에 기대어 동구 밖으로 난 달구지 길을 바라보다, 할아버지 걸음걸이를 발견하면 총알처럼 뛰어가 헐떡이며 매달린다. 할아버지는 두루마기 속에서 먹을 것을 꺼내 놓는다. 노란 편지 봉투에 싼 미라사탕이나 잔칫상에 싸온 약과나 꿀 편, 다식 등이었다. 겨울철에도 밖에 나와 기다리다 안에서 부르러 와도 막부가내로 버틴다. 어른들이 청승 떨지 말고 들어가자면 할아버지에 일러 줄 떼야! 그러면서 구박을 버틴다.
“우리 할아버지가 시방 소리개고개까지 오셨으면 내 엄지손가락이 가운뎃손가락에 척척 붙어라, 안 붙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시방 농바위까지 오셨으면 내 엄지손가락이 가운뎃손가락에 척척 붙어라“ 주문을 외우며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표현이 우리도 해본 짓이다. 기다리다 지쳐 사랑에서 잠든 박 선생을 어머니가 안고 들어갈 때면 박 선생은 반밖에 잠들지 않았으면서도 곯아떨어진 시늉을 했단다.
조부가 어느 날 동풍으로 쓰러진다. 그 시설 선비가 그랬듯이 한방에 소양과 상식이 충분하여 동네 사람의 약방문이나 위급한 환약을 만들어 약장에 보관하다 내주곤 했지만, 당신의 병은 단념하고 화만 냈다. 사랑에서 똥요강을 내오면서 할머니는 역마살을 좋아해 술과 친구 좋아한 온갖 비행을 중얼거리면 꼴좋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박 선생은 죽지 잃은 새처럼 처량해 진다. 세 살에 잃은 아버지에 이여, 일곱 살에 동풍으로 쓰러진 할아버지는 두 번째의 아버지 상실이다. 오빠는 (청교)면소재지 4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에서 2년을 더 다니어, 개정된 학제로 육 년 초등과정을 마쳤다. 숙부들이 모두 4년제 소학교만 나왔는데 오빠가 2년 더 배운 것을 엄청난 신학문을 한 청년을 손자로 뒀단 자부심을 할아버지는 가졌다. 서울의 높은 학교에 간다는 기대도 컸다. 어머니는 어른들과 상의 한마디 없이 오빠를 서울 상업학교에 보내는 반란을 일으킨다. 한바탕 난리가 나고 혼자된 며느리는 아들 공부를 핑계로 서울로 떠난다. 맏며느리가 시부모 봉양을 포기하는 것은 당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집안 망신이었다. 의무를 포기한 어머니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단순한 맹장염을 방치하고 한약을 먹다 복막염으로 전이돼 숨진 것인데 당시는 항생제가 없으니 팔자소관으로 넘긴 것이다. 엄마의 친정은 시골이나 외가가 서울이라 시집오기 전 외사촌이 서울에서 진명과 숙명에 다닌 관계로 그게 무척 좋아 보였고 부러웠다. 당시 통치마 입고 구두 신고 신식 교육 받은 여자들을 ‘휘뚜루 신여성’이라 칭했고 엄마는 박 선생을 그리 만들고 싶어 했다. 우선 아들을 서울 학교 보내고 자신이 뒷바라지 핑계로 맏며느리 직을 던진 것이다. 그러니 박 선생은 적 손녀니 숙모에게 상전 노릇을 하며 할아버지는 누워있고 어머니는 서울 계시니 자유를 만끽하고 돌아다녔단다.
뒤 난에 동무들을 끄들여 놀고 동무들과 도깨비 얘기와 화장실 도깨비 조찰떡 얘기 등을 동무들과 듣고 조잘거리며 놀은 듯하다. 뒷간에도 동무들과 같이 가고, 뒤가 보고 싶지 않아도 단채로 가서 억지로 엉덩이를 까 대고 힘을 줬다. 각자 눈 똥에 재를 묻혀서 떡을 만들어 놀다 잿간에 버리고, 산에 들에 나가면 삘기, 찔레순, 산딸기, 칡뿌리, 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는 지천이었고, 간식거리 없던 때의 간식이었다. 마을 도처에 흐르는 내에서 물장구치고 체 하나만 가져오면 오두방정 떠는 보리새우는 얼마든지 건져서 된장국을 구수하게 했다. 가지고 놀던 것도 모두 살아 있는 것인데 왕개미의 똥구멍을 핥아 보면 새큼하고, 불개미에 종아리를 쏘이면 따 꼼하고, 잠자리 잡아서 꽁지 자르고 대신 더 긴 밀짚 고갱이 꽂아서 날려 보냈다. 풀로 각시 만들어 쪽 지어 시집보낼 때, 게딱지로 솥을 걸고 솔잎으로 국수 말고 새금풀로 김치 담갔다. 마지막으로는 쇠비름 뿌리 뽑아서 열심히 “신랑 방에 불 커라.” 주문을 외우면서 손가락으로 비벼서 빨갛게 만들어 등불을 만들었다. 뙤약볕에 동구 밖까지 원정 나갔다 소낙비 맞고 그 때기 박 선생의 전성기였다.
할아버지는 행동은 불편해도 소일거리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서당은 인근 마을까지 학동이 왔고, 박 선생도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박 선생 책은 언문으로 토가 달린 책이었다. 어머니에게 배운 언문이 반은 깨우친 상태인데, 어머닌 자기는 하룻밤에 배웠으니 너도 그래야만 된다고 우격다짐으로 시켜서 반만 깨우친 것이다. 할머니가 가에 기억하면 각이라고 뚱겨줘서 그만한 것이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한번 가르쳐준 한자를 잊어버리지 않는 아이란 칭찬을 듣는다. 엄마는 지난 방학 때 교복을 입은 오빠와 내려와 오빠가 얼마나 들어가기 어려운 공립학교에 입교 했나 자랑을 은근히 하고, 거기 나오면 총독부나 부청에 취직하는 것은 문제도 없다 했다. 양반타령은 유별났지만 할아버지는 민족적 자부심이나 역사의식은 없고, 오로지 우리 보다 낮은 양반을 무시하고 우리와 걸맞은 양반 중에서 우리와 같은 노론집안하고만 혼사를 하는 정도다. 일본관청이라도 관청에 다니면 벼슬인줄 알고, 장손자의 출세의 꿈에 부풀 수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어머니가 서울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너도 서울에 가서 학교에 가야지” 박 선생은 좋은지 싫은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 계집애를 소학교부터 서울에서! 할머니는 기함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내 종종머리를 빗기다가 어머니는 가위로 싹둑 잘랐다. 그리고 단발머리를 만들었다. 세상에 망측해라 할머니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밖에 나가자, 동무들이 놀려대기 시작하나, 박 선생은 서울아이들은 다 이런 머리를 한다고 동무들은 얕잡아 보고 기 죽지 않았단다.
처음가보는 개성까지의 이십 리 길은 멀었다. 곡식과 갖은 올망졸망한 짐을 진 머슴을 데리고 할머니는 나들이옷을 입고 따라 나셨다. 마지막 네 번째 고개만 넘으면 송도였다. 농바위고개다. 처음 본 송도는 탄성 자체였다. 화강암 건물과 흰 사토질의 개성은 모두 하얗게 보였다. 개성 역은 웅장하고 시끌시끌하다. 그 공포감에 낯설고 생생하다. 많은 짐을 가진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입장권을 사든 할머니와 눈물로 전송을 한다. 서울역은 개성역보다 크고 넓은데 역내 빨간 모자 쓰고 곤 색 양복을 입은 짐꾼에 맡기지 않고 어머니는 모두 한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나와 역 마당에 주저앉자,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지게꾼이 서로 짐을 차지하려 몰려왔다. 전차가 등에 뿔을 달고 한 길 가운데로 달리는 게 보였다. 뿔하고 전기 줄에서 파란 불이 튀는 것을 보고 호기심보다 겁이 났다. 지게꾼과 걸어서 가니 독립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계단을 수없이 오로고 올라 현저동 꼭대기 쯤 초가집 문간방에 짐을 풀었다.
여기가 서울이냔, 박 선생의 항의에 어머니는 아니다. “여기는 문밖이다 네 오빠 취직하면 우리도 문안에서 살아 보자꾸나. “ 그리고 밤새도록 사람들 지나는 소리와 ”만주나 호야 호오야“ 같은 뭘 사라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지만 어머니에 물어보지 않았단다. 다음날 서울 세사는 법도에 대해 교육을 받는다. 안 집 식구들이 변소에 다녀온 뒤에 가야하니 똥을 참아야 하고, 너를 데려 오면서 안집에 얼마나 눈치를 봐야 했는데, 식구가 많으면 주인이 싫어하니까, 시골에서 떠 받들 던 대우 받는 처지가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니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안집 애가 뭐 먹을 때 쳐다보지도 마라. 안집 애 가지고 노는 것 탐내지도 마라 , 안집에 들어가지도 마라. 우리가 문밖에 세 살지만 학교는 문안에 가야 한다며, 지금의 주민등록에 해당하는 기류계를 학구제가 맞는 사직동 친척 집에 옮겨 놓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했다. 우선 주소를 외우게 했다. 사직동 가짜 주소와 길을 잃을 것에 대비한 현저동 산동네 주소다. 현저동 46번지의 418호 이 주소는 지금도 잊지 않는단다.
연두색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이발소에서 단발머리도 깍은 뒤 시험을 치러 매동국민학교에 갔다. 신사와 학생이 서 있는 그림과 중절모와 학생모가 있는 그림을 보여 주면서 각자에 맞는 모자를 골라 보라고 했다. 바둑알 네 개와 세 개를 따로 놓고 모두 몇 개냐 묻는다. 굴뚝에 연기 나는 그림을 놓고 지금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불고 있느냐 물었다. 여기서 연기가 나는 반대 방향으로 분다고 대답을 잘못했다. 엄마는 주소를 안 물어 봐 여간 다행이 아니라면서도, 한 문제 틀려서 여간 실망이 아니었다. 운동장에 일본 기를 가리키면서 “지금 바람이 어디로 부냐? 세상에 그것도 모르다니 떨어져도 싸다 싸“ 그날 밤 오빠를 붙잡고 내가 떨어질 것을 분해하자 오빠는 ”뚜껑은 열어 봐야 알죠. “ 얼마 후 엄마는 나를 수단 두루마기를 입혀 사직동 친척 집엘 갔다. 행랑어멈이 엄마를 보고 반색을 하며”아씨 좋으시겠어요, 아가씨가 붙었데요. “ 연방 굽실거리자 엄마는 ”웬 수선인가, 그까짓 소학교 붙은 것을 가지고.” 엄마는 도도하게 굴었다. 중문에 들어서니 딴 세상이었다. 특히 수도가 제일 신기하고 부러워단다.
현저동은 물장수 물을 하루에 한 지게 씩 대고 먹었는데, 세수하고, 발 닦고, 거기다 걸레 빨고, 다시 두었다 마당 쓸 때 뿌려야 했단다. 대단한 재사용이다. 어머니는 사직동 친척에게서 받은 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여염집이든 기생이든 모두 품삯을 주면 받아 왔다. 그리고 박 선생에 너는 根地있는 집 자식이다. 본데없는 집 아이들과 어울려 봤댔자 못된 물만 든다. 나가 놀지 마라. 엄마는 기생 옷 바느질이나 하면서 근지만 따졌다. 아이들이 박 선생을 보고 시골때기 라고 놀리기 시작했다. 가소롭도다, 박 선생도 어느 틈에 엄마의 교만을 닮아 가고 있었다. 물장수에 한 달에 한번 저녁을 차려 고맙다고 주는데 어머니가 물장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존경하며 부러워했다. 물장수 해서 번 돈으로 영감은 아들을 사각모 씌워 전문학교에 보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바느질해 상고에 넣는 것이 한계라 생각을 한 것이다. 입학식은 4월이다. 산을 넘어 엄마와 학교에 갔다. 한 달 가량 교실에 들지 않고 노래하고 유희하고 선생님을 따라 다녔다. 먼저 배운 일본말은 호안텐(奉安殿) 인다. 운동장 꽃밭 속에 있는데 등교하면서, 그 쪽을 향해 구십도 허리를 꺾어 최경례를 해야 한다. 호안텐은 천황의 칙어를 넣어 두는 데였다. 교실에서 처음 배운 건“봄이 왔네, 봄이 왔네, 어디에서 왔나? 산에도 들에도 왔네.”하는 일본 말이다. 박 선생은 6년을 인왕산을 넘어 현저동으로 등하교한다. 학교 교육은 정직을 요구하는 수신교과서는 일관되게 천황에 충성 다짐과 다음이 정직이었다. 그런데 가정방문이 있었다. 기류계를 가짜로 옮기여 학교에 넣었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어머니는 끝까지 밀고 나가려 했다. 정해진 날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날 사직동 쥔 행세를 하려 주인에 양해를 구했다. 하교 시 그 동내 아이들과 같이 남았다 갔는데 친척 집 주의에 살던 아이 때문에 거짓이 들어났다. 그 후 박 선생은 그 아이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고 시키는 심부름은 무엇이든지 하는 아이가 되었다. 세 집 앞으로 무꾸리들이 다녀서 형제바위의 최영 장군 사당에 간다. 엄마는 무당이나 무꾸리에 냉소적이었다. 시골 무당은 작두를 타는데 이곳 무당은 어린애 장난 같았다. 큰 굿은 구경꾼에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떡이며 사탕을 노느매기해 줄 때가 있는데 그 기대로 굿에 가 치마에 굿 음식을 받아먹은 것이 얼룩이 져서 어머니에게 굿 구경도 금지를 당한다.
친구가 없던 박 선생은 반 짝꿍과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에 취미를 붙여서 공부에 열중하고, 친구는 경기고녀에 박 선생은 숙명고녀에 진학을 한다. 그리고 오빠는 총독부에 근무하여 서울 문안으로 이사를 한다. 작은숙부는 일인 하에 점원을 시작하여 성공하여 가게를 차리고 숙부는 면서기로 취직한다. 할아버지는 동풍이 세차래 덧나 돌아가신다. 오빠의 폐병환자와 연애로 억지 혼인을 하여 어머니의 속을 썩이고 상처를 한 이야기와 일제의 2차 대전으로 배급제 일본의 패망에 친일파로 몰린 숙부와 시골집이 청년단에 의해 문짝이 파괴되는 수모를 당하며, 남과 북의 이념 대립을 그린다. 공산당에 심취한 오빠는 집이 공산당원의 모임장소가 되자, 어머니는 수도 없이 이사를 하여 친구들과 아들을 떼에 놓으려 한다.
오빠는 다시 혼인을 시켜서 공산당 모임에 발을 빼게 만든다. 그러나 전쟁이 나면서 다시 3개월의 공산당 치하에서 작은 숙부네 가계가 인민군의 거주지가 되면서 밥을 해주고 호구를 잇다 부역자로 작은 숙부가 처형되고, 오빠는 전쟁 통에 죽는다. 그리고 그 전쟁 통에도 작은 조카가 태어난다.
2019.01.26.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지음
웅진 지식하우스 발생
첫댓글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6.25의 공산치하에서 지냈던 대립의 양상에서
그 시기를 거쳐 온 결과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