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월 부터 시작된 컨퍼런스 남부 리그는 여러모로 유쾌하지만, 애잔한 리그이기도 하다.
선수들 대부분은 프로선수 전임계약을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 하듯 주말에 경기에 나서며 평일에는 이들을 그라운드가 아닌 도시의 육류가공공장, 미용실, 피시 앤 칩스 식당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친근한 우리동네만의 슈퍼스타이며 성실한 이웃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그라운드에서의 임금이 전업 프로선수를 하기엔 너무나 적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컨퍼런스는 협회에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가장 밑바닥의 리그이기에 더이상 떨어질 나락조차 없는 최하의 팀들이 아웅다웅 다투는 것이 그러하며
그러기에, 실패하면 끝이다.
프로축구라는 무대에서, 아웃 당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면 때문에 애초에 이 클럽의 감독을 맡았을 때 클럽의 재정상태를 먼저 끌어올려놓겠다고 생각했다. 재정을 안정화시키고 난 뒤엔 선수들에게 마음 편안히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되도록 좋은 임금으로 그들을 전임 고용했던 것이고 코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일차적으로는 프로의식을, 이차적으로는 프로선수로서의 존엄성을 존중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내 생각은 이랬다. 축구의 종가인 잉글랜드의, 그것도 정식 리그에서 뛰는 프로선수라면 그에 합당한 연봉을 지불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고 또한 재능있는 선수들이 다른 직업을 가져 축구에 집중할 수 없어 종래엔 기량감퇴로 이어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내가 데려온 우리팀의 선수들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선수들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2.
11월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클럽이 현재 당당하게 리그 1위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3달 연속 이달의 감독상을 독식하고 있었다. 지난 3달간 리그 패배는 단 한번. 무승부도 단 한번. 그리고 모조리 승리를 거머쥔 것이었다.
전임계약으로 재계약을 맺은 선수 전원이 좋은 코치들과 좋은 훈련환경에서 서서히 그들의 재능을 갈고 닦았으며 오프시즌 지독한 친선경기를 통해 전술을 수정하고 또 수정한 결과다. 이러한 분위기에 발 맞추어 클럽에서는 때때로 홈 경기가 있는 날마다 경기장에 팬들을 끌어모으기위한 이벤트를 열었고 그때마다 홈 팬들에게 승리를 선사하여 11월 현재 다른 팀이 넘볼 수 없는 평균관중 네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어느 컨퍼런스 클럽에서도 평균관중이 1100명이 넘어가는 클럽은 없다고 하니, 확실히 지역민들의 사랑을 굳게 받고 있는 듯 하다.
경사는 또 있었다. FA컵 컨퍼런스 예선전에서 상대팀들을 연이어 격파한 끝에 마침내 빅클럽과 경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FA컵 1라운드 상대는 스완시. 그것도 어웨이였다. 우리가 상대하기엔 너무나 벅찬 팀이지만, 만약 여기서 탈락하더라도 선수들의 노고를 팬들이 잊을리 없을 것이다. 새로 영입된 18살의 신예 미드필더 Benjamin Mulamehic가 있다면 해볼만하다.
그래. 한번 해보자. 우리들의 승리를 꺾을 수는 있어도, 의지는 절대 꺾지 못할테니까.
3.
스완시와는 이미 시즌 전 친선전을 통해 한차례 대결을 펼쳐본 바가 있었다. 이 팀은 특이하게도 스페인 선수들이 중용되었는데 덕분에 리그1의 팀들중 가장 유연하고 창의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왼쪽 윙 Andrea Orlandi는 그 이름도 유명한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비록 바르셀로나 1군무대에서 활약한 바는 없지만 그 재능만큼은 특출했다. 친선 경기때 경기 내내 시종일과 우리 수비진을 어린애 갖고 놀듯 했던 장면은 나에겐 너무나 충격으로 다가왔고 선수들 역시 경기가 끝나고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었다. 그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광산으로 번창했던 스완시는 석탄연료가 잘 쓰이지않는 현재에 들어와선 주로 관광과 농업 등으로 먹고 사는 도시가 되었다. 몇몇 큰 공장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영국 관광지가 그러하듯 옛건물이 잘 보관되어 있는, 역사가 만들어낸 관광도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스완시주에 속해있는 멈블스 시엔 천혜의 해안 휴양지가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단 버스가 농장지대를 지나 해안 관광지로 유명한 그 멈블스를 지났다.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고 선수들도 경기의 중압감을 잠시 잊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는 스완시의 해변을 감상했다. 비록 차 창 너머의 풍경이었지만 약간은 긴장이 풀어지는 듯 했다.
마침내 구단 버스가 화이트 록 스타디움에 멈춰섰다. 선수들은 각자 짐을 챙기고 말 없이 구장 선수대기실 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좋은 구경은 했지만 몇몇 선수는 아직도 긴장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저들의 심리부터 안정시켜야 한다.
"스완시. 강팀이지. 그래.. 이들과 공평하게 뛰어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라운드에 백조(스완시의 엠블럼)라도 풀어놓고 밟아볼까?"
선수들이 웃기 시작했다. 나는 묘한 미소를 띄운 뒤 한마디 더 거들었다.
"오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어때 다들?"
웃던 선수들은 다시 평소의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침묵하던 주장 Hogg가 나즈막히 말했다.
"설마... 이겨볼 생각이오?"
4.
"뭐 퇴장?? 말도안돼!!"
화이트 록 스타디움은 온통 환희에 차있었다. 우리 팀 센터백 Culshaw가 후반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퇴장 당한 것이다.
경기는 2:2의 팽팽한 상태. 선수들이 의욕있게 공격위주의 플레이를 펼쳐왔고 당황한 상대에게 전반에만 2득점을 해낸 것이다. 이제 후반에 더욱 더 탄력이 붙을 수 있었는데... 상황이 좋지 않게 되어버렸다. 타격이 너무 컸다. 이 와중에 수비의 중심 Culshaw가 빠지면 상대방의 파상공세를 막을 길이 없어진다.
급한대로 오른쪽 수비를 보고 있던 Sabandar를 중앙으로 세우고 스트라이커 Gilroy 대신 라이트풀백 Rolio를 투입시켰다.
한참 심판에게 대들던 Culshaw는 결국 애꿎은 물통에 발길질을 해대면서 걸어들어왔다.
상황은 급박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공격숫자가 하나 줄어들은 우리 선수들은 급속도로 수비위주의 플레이를 펼쳐가기 시작했고 상대방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쉴새없이 우리팀 수비진을 마구 두드렸다. 때로는 측면에서, 때로는 중앙에서, 압박이 느슨해진 스완시의 플레이어들은 거침이 없었고 그 앞에 놓여진 10명의 바스 선수들은 마치 공격 실험을 당하기 위해 버티고 있는 실험쥐 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잠시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얼마 지나지않아 정리하고선, 이내 상대방을 또다시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돌변한 우리 선수들의 태도에 당황한건 상대방이었다. 오히려 공격기회를 더 많이 잡으면서 좌우 측면에서 Kempe와 Poel은 연신 크로스를 올려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공격진에 외로이 버티고 있던 Faulconbridge는 상대방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어떻게든 공중볼을 따내려 안간힘을 썼다. 너무나 안쓰러워 그를 교체하고 싶었으나, 스트라이커가 부족한 현재의 팀 스쿼드에서 저런 플레이를 펼쳐줄 후보선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버텨다오. 오늘 히어로는 누가 뭐래도 너다.
5.
휘슬 소리가 들렸다.
선수들은 맥이 풀린 듯 그라운드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이 어린 미드필더 Mulamehic는 탈수증세까지 일으켰다. 황급히 팀닥터가 구급통과 물통을 들고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적군의 홈그라운드 한복판에서
모두들 웃고 있었다.
그렇다. 스완시를 상대로 2:2 무승부를 끝까지 지켜내고 그들과 다시 FA컵 1라운드 2차전을 치르게 된 것이었다.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기였기에 경기장에 있었던 프레스라곤 서로의 지역에서 온 지역신문 기자들과 유명 신문들의 수습기자들 뿐이었는데, 이들이 난리가 났다. 그들은 연신 그라운드에 누워 웃고있는 우리 선수들의 사진을 찍어댔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선수들도 반신 반의하던 결과가 현실이 되었다. 선수들은 기대 이상으로 너무나 잘해주었고 또 생각 이상으로 열심히 뛰어줬다.
그때 구단주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 미쳤군... 당신 미쳤어"
"예?"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세상에 오.. 하느님!!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나도 미쳤지만 구단주도 미친 것 같았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웃음소리가 끊길 때 즈음 난 나즈막히 한마디 했다.
"Mr. Todd, 그거 아세요? 다음은 홈경기예요."
---------------------------------------> 5부에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ㅋㅋㅋㅋ 역시재밌군효!!
기다렸다는 재미나요. 이 팀이 프리미어 올라가서 우승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잘 읽고 있습니다.
글설리
글설리
글설리
글설리
글설리
후훗 절대 저처럼리그1까지 갔다가 포기하지마세여!!. 프리미어까지 가는거야~!
오 재미있다...ㄷㄷ 홈에서 스완시 잡는건가..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