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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가 무척 많이 오는 날이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그 많던 관광객들도 비 때문에 호텔에서 숨어있었다. 그러나 바스 시내는 조용한 반란을 준비중이었다. 시내 곳곳에는 FA컵 1라운드 2차전 광고 포스터가 붙어다녔고, 지역 신문에서도 1차전의 선전을 대서특필하며 재경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고 있었다.
2007년 11월 22일. 트워튼파크의 관객 수가 공식경기 관객으로는 최고인 3823명이 운집했다. 물론 우리 지역 팬 2000명 정도에 원정팬이 1000명 정도인 실로 어정쩡한 홈경기가 되어버렸지만, 평소에는 너무나 작게들려 잘 들리지도 않던 우리 클럽의 응원가가(솔직히 이제서야 제대로 처음 들어봤다) 들릴정도로 관객이 왔다는 것은, 분명 그만큼 기대를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 팀의 응원가가 메아리 치듯 경기장 안을 웅장하게 공명할 때, 나는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한가지 당부를 했다.
기죽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
1차전에서 수비의 핵심이었던 Culshaw가 퇴장당한 만큼 2차전에선 수비진의 누수를 메워줄 선수가 급했다. 그 역할에는 그동안 Culshaw와 Walker에 밀려 주로 교체출장만 담당했던 19살의 신예 왼발의 장신수비수 Sam Page가 맡았다. 내 나름대로는 이 선수를 유망주 입장으로서 크게 키워볼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아직 기량이 덜 닦여진 상태에서 이 선수의 강심장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나머진 1차전 멤버와 동일했다.
체력적으로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그 지옥같았던 원정이 끝나고나서 다시 돌아온 선수들에게 대부분 휴식을 주고 후보 선수들 위주로 리그 경기에 임했기에 지친 선수들은 빠른 회복을 할 수 있었다. 오직 이날, 재경기만을 위해서 선수들은 체력을 비축하고 훈련에 임했다.
2.
스완시의 선수들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서있었다. 지난 경기 이후로 스완시의 지역언론에선 한동안 비난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럴법도 하다. 우리만큼 저들도 승리를 갈망할 것이다. 실력차이는 없다. 어느 누가 더욱 더 승리에 굶주려있는가, 이것이 오늘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휘슬이 울렸다. 1차전을 통해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선 양팀 선수들은 쉴새없는 공방전을 펼쳤다.
포문을 연건 놀랍게도 우리 바스의 몫이었다. 플레이메이커 Mulamehic가 중앙에서 최전방 공격수 Faulconbridge에게 다이렉트로 연결한 것을 Faulconbridge가 그대로 오른쪽으로 슬쩍 흘려보냈고 오른쪽 윙 Poel이 중앙에 침투해 들어가 있다가 곧바로 공을 강타한 것이다.
의외의 시작에 당황한 것은 스완시의 선수들이었다. 또다시 이 악바리들에게 한방 먹은 것이다. 스완시의 감독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라운드의 선수들에게 지속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나 역시 선수들에게 수비라인을 끌어내릴 것을 지시하며 좌우 측면의 선수들에겐 지속적으로 역습상황에서 달려나갈 것을 명했다.
몇차례 거친 태클과 번뜩이는 패스 주고받기가 끝난 뒤,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전반전이 끝났다. 홈경기라는 잇점과 더불어 선제골까지 기록. 거칠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난 선수들에게 아직 승리감에 도취되어선 안되며 전반전처럼 플레이 해줄 것을 주문했다.
후반 역시 전반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상대방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며 우리 선수들은 역습에 주력했다. 발빠른 좌우윙 Kempe와 Poel은 지속적으로 상대방의 측면을 파고들었고 플레이메이커 Mulamehic는 연신 필드의 빈 공간으로 송곳같은 패스를 보냈다. 수비 미드필더의 역할을 맡은 주장 Hogg는 혹시나 생길 공간침투를 염려하여 주로 최후방 바로 앞선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이대로, 이대로만 시간이 지나준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웃긴 이야기지만 축구란 스포츠가 90분이 아닌, 45분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생애 처음으로 해보았다.
3.
철렁.
골망이 흔들렸다.
후반 62분. 스완시의 포워드 Bauza의 골이었다.
1차전에서 철벽같은 수비력을 과시했던 오른쪽 수비수 Sabandar의 패스미스가 그대로 실점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Sabandar는 고개를 떨구고 그라운드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스의 다른 선수들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가장 믿음직한 선수중 한명이었던 팀의 에이스 수비수 Sabandar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믿기지 않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다시 재정비를 해야만 한다.
다시 킥오프를 하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90분 안에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난 오히려 수비라인을 끌어올리고 공격적으로 플레이 할 것을 주문했다. 파상공세. 그러나 좀처럼 상대방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슛팅이 골문을 빗겨나갔고 될만한 것들은 모조리 골키퍼의 선방에 가로막혔다.
그렇게 70분이 되고 80분이 되고 90분이 되었다.
연장전. 선수들이 많이 지쳐있었다. 특히 좌우 측면에서 활발한 돌파를 선보였던 Kempe와 Poel이 가장 많이 지쳐있었다. 그들을 각각 Mckeever 와 Rollo로 교체시키고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더는 교체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선수 전원을 교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상대방도 많이 지쳐있었을 것이다. 좀 더 힘을 내주어야만 한다. 한 골만 넣어준다면.
휘슬이 울리고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연장전에 돌입한 만큼 나머지 30분은 선수들에게 맡길 수 밖에 없다. 하늘은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연장 전반의 상황은 후반 막판과 비슷하게 전개 되었다. 바스의 선수들은 지속적으로 공격을 해댔고 상대 선수들은 굳게 배수진을 치고 좀체로 골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기어이 일이 터졌다.
연장 전반 종료시간대인 전반 15분. 교체투입된 오른쪽 미드필더 Rollo가 순식간에 돌파를 하여 크로스를 날렸고 Faulconbridge가 그대로 헤딩, 골망을 뒤흔든 것이다.
트워튼파크엔 일대 광란이 일어났다. 서포터들은 Faulconbridge이름을 연호했고 그는 관중들에게 키스를 날리며 화답했다. 골과 함께 연장 전반 종료. 골든골제도가 아닌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4.
연장 후반전. 상대방의 분위기가 뭔가 달라진 것을 감지했다. 킥오프를 하자마자 스완시의 왼쪽 윙 Orlandi가 무서울 정도로 그라운드를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다지 발이 빠르지 않은 Sabandar는 그를 쫒아가지 못했고 지속적으로 돌파를 허용했다. 연장 후반 6분. 신예 수비수 Page가 상대방 공격수와 몸다툼 끝에 일을 내고 말았다.
페널티킥 허용. 후반 74분에 투입된 스완시의 포워드 Darryl Duffy가 공을 바닥에 찍어놓고 기도했다. 헌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Duffy의 슛이 그대로 크로스바를 넘기고 만것이었다. Duffy가 무릎을 꿇으며 좌절했고 관중석은 또한번 난리가 났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게 된다면 Duffy는 앞으로 스완시에서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페널티킥이었다. 승리가 눈 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연장 후반부터 무서운 돌파를 보여준 스완시의 왼쪽 미드필더 Orlandi가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후반 10분에 점수를 만들어냈다. 동점. 페널티킥이라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팀에서 페널티킥을 전담해줄 선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우리쪽이 패배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러나 얕은 선수층 탓에 교체할만한 카드도 더이상 없었다.
그리고 그 걱정이 기우였다는걸, 연장 후반 종료직전 깨달을 수 있었다.
페널티킥 실축을 했던 스완시의 포워드 Duffy가 중거리슛으로 120분간의 혈투에 마침표를 찍고 만 것이었다.
득점과 함께 1초의 가감도 없이 종료휘슬이 울렸고 경기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바스의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드러누웠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그것을 흘리는 선수도 있었다. 애초에 되는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원한건 승리였다. 그렇기에 포기하지 않았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수중전이었기에 더욱 체력이 고갈될 수 밖에 없었음에도 그들은 무거워진 유니폼을 물기 한번 짜지 않은 채 쉴새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FA컵 1라운드 탈락. 이제 이번시즌 더이상 바스의 선수들을 협회컵에서 볼 일은 없어졌다.
5.
구단 사무실로 팩스가 날아들어왔다. 팀의 주장 Hogg에 대한 1만 유로의 이적제의. 한단계 상위 리그인 히스턴에서의 제안이었다. FA컵에서의 활약을 눈여겨본 히스턴의 감독이 수비형미드필더로 변신한 그를 데려가려 하는 것이다.
원래 Hogg는 지난시즌 13골이나 넣을정도로 득점력이 워낙 탁월해 공격미드필더로 활약해왔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너른 활동력과 태클 능력을 눈여겨봤고 이번시즌 그를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로 낙점하고 줄곧 그를 선발기용 해왔다. 그는 바뀐 역할에 아랑곳 하지 않고 120퍼센트 능력을 발휘해주었다. 경기당 2~3개의 멋진 태클을 보여준 그의 활약 덕분에 팀은 선두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FA컵에서도 선전할 수 있었다. 그런 그를 이제 상위구단에서 데려가려 하는 것이다.
난 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난 웃으며 너의 가치가 1만 유로밖에 되지 않느냐며 농담을 건넸지만,
알고 있다. 이젠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시즌 초 개혁의 칼바람 속에서도 상록수같이 굳건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던 그였다. 그는 능력으로 나에게 화답했고 그런 그를 믿고 그에게 캡틴의 자리를 부여했었다. 그가 사라진다면 팀의 중추인 미드필드진이 허물어질 것이 뻔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만큼 야망이 큰 선수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난 전화를 끊고 곧장 구단주 사무실로 건너갔다.
"1만 유로. 구단 계좌에 잘 들어오나 나중에 꼭 확인해보십시오"
----------------------------> 6부에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정말 잘보고있습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스크린 샷 없이 이렇게 집중하게 되도록 글 되게 잘 쓰시네요 ㅋㅋ
와~ 어떻게 이런표현들에 이런 상세한 배경설명이 가능한건지 정말 놀라고 갑니다.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잘 읽고있습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