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포도나무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탈출 3,1-15; 1코린 10,1-12; 루카 13,1-9
2022.3.20.; 사순 제3주일; 이기우 신부
1. 사순시기 들어서 세 번째 주일인 오늘 전례에서 말씀의 초점은 실천에 있습니다. 제1독서는 모세가 부르심 받은 이야기와 함께 그가 이 소명에 따라 응답함으로써 달라질 새로운 운명을 예고합니다. 또한 제2독서는 모세의 소명과 그 응답을 통해 하느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이제 믿음의 목표와 대상이 그리스로로 선명하게 계시되었음을 깨우쳐주는 바오로의 편지인데, 이러한 깨우침 안에는 바오로 자신도 자신의 삶을 완전히 전환시켜 로마 제국 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던 새로운 운명의 사연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자, 빌라도는 요한을 위해 제사를 드리려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였으며, 또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세워져 있던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나 죽어야 했을 지경으로, 총체적으로 난국을 맞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두고, 예수님께서 포도밭에 포도나무 대신 무화과나무가 심겨져 있다는 비유로 비판하신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 이 말씀으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에 포도나무를 심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 열매를 맺게끔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 바쳐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목자로 우상숭배를 일삼았던 임금들과 대신들, 궁정 예언자들과 성전 사제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고, 대신 우상숭배에서 나오는 불공정과 불의라는 나쁜 열매만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넘보고 쳐들어 온 것이고, 이두메아 출신 헤로데는 그 권세에 빌붙어서 유다인들을 억눌렀던 것이며, 이에 항의하는 예언자 요한을 목베어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성전을 관리하던 사두가이들은 성전세 수입과 제사용 제물에 눈이 팔려서 성전 경내에 있던 실로암 탑도 관리를 소홀히하는 바람에 애꿎게도 성전을 순례하던 유다인들이 무너진 탑에 깔려 죽는 안전사고까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에 세워진 이 몹쓸 나무를 잘라버리려고 하십니다. 그 나무는 포도열매를 낼 수 있는 포도나무가 아니었던 것이고, 제 때에 열매를 내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도 같이 쓸모없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당시 유다교였고, 신정일치 체제로 연명하던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빌라도와 헤로데의 팔레스티나 사회이기도 했습니다.
3. 사도 바오로는 이 같은 예수님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전제로 코린토에서 만난 이방인 신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났던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세례는 사회적 불의가 만연한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죄악이 가득 찬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에로 해방된 처지를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세례 때에 그들의 죄를 씻어준 물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갈 때에 건너온 바다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또 세례를 비롯한 여러 성사들은 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성체성사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먹고 살았던 하늘의 만나와도 같은 것이며, 성혈은 므리바와 맛싸의 바위에서 터져 나온 샘물과도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만나를 내려준 하늘, 물이 터져 나온 바위, 그 하늘과 바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역사적 풀이를 사도 바오로는 구약성경의 내용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모르던 이방인 신자들에게 자세하게 들려준 것입니다.
4. 사도 바오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된 역사적 계시, 즉 이집트 탈출 사건의 의미를 코린토인들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코린토인들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신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그 신들은 참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을 투영한 인간 신들이었으며, 진리나 자비 같은 하느님의 계시를 전혀 모르는 채로 다툼과 갈등, 승리와 패배의 신화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신론이나 다름없이 다신교를 신봉했던 이방인들 앞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류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5.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창조하신 주님이십니다. 창조주로서 하느님께서는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민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 말씀을 처음으로 알아 듣고 응답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는 노아의 후손이었고 막연하지만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그가 살던 칼데아 우르는 바빌론 문명의 우상숭배가 창궐하던 땅이어서 그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해 염증을 심하게 느끼고 있던 차에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은 희미한 신앙의 빛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그가 노아의 직계 10대손이어서 10대조 노아가 남겨준 신앙의 유산 덕분에 그나마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6.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아브라함의 후손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집트 왕실에서 왕자로 자라나던 40년 세월을 뒤로 하고 호렙 산이 서 있는 미디안 광야에서 평범한 양치기로 40년째 살아가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양 떼를 몰고 하느님의 산으로 알려진 호렙 산 어귀에 다다랐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떨기는 불에 휩싸여 있었을 뿐 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표지였습니다, 불타지 않는 떨기. 가혹한 이집트 파라오의 배은망덕한 노예살이 정책과, 감독관들의 채찍질과, 쉬는 날도 없이 부려먹는 강제노역, 이런 가열찬 삶의 조건에서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해방자를 보내주시리라고 희망하던 히브리 동족들의 가녀린 신앙과도 같이, 그 떨기는 불 속에서도 타지 않았고, 오히려 그 불을 이용해서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7. 이 거룩한 표지가 모세의 양심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양심으로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너의 동족에게로 가서 파라오의 손에서 해방시켜라!”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세는 남은 40년 여생을 바쳤고, 히브리 노예들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거듭 날 수 있었습니다.
8. 보이지 않아도 늘 우리 자연형상에 작용하고 있는 열역학법칙처럼,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보이지 않아도 늘 우리의 인간현상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을 알려준 바 있는데, 그것은 첫째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창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그런데 둘째 언제나 뱀이 모습을 한 악마가 훼방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셋째 하느님의 창조와 악마의 훼방 사이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라는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9. 이 세 가지 영적 법칙을 구세사의 중요한 계기에 등장해서 하느님과 마주 한 가운데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만한 실천을 했던 인물들의 삶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알아들었을 때, 그 누구도 옆에서 조언해 주지 않았고 오직 홀로 알아들었습니다. 그 다음,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누구도 옆에서 그 불타지 않는 떨기야말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표지라고 귀띰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분연히 우상숭배가 판치는 고향을 떠났고, 모세는 여든 살의 나이에 다시 이집트로 들어가 파라오와 맞대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가나안 땅은 아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가뭄이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옥한 이집트로 가야 했는데, 다행히 야곱의 편애와 아들들의 질투가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서 재상이 되는 바람에 집안을 살게 할 수 있는 고센 땅을 마련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맞대결하러 갔을 때 완고한 파라오 이상으로 모세의 속을 썩인 자들은 동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간신히 이집트를 빠져 나와 시나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동안에도 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불신앙도 모자라다는 듯이 백성들의 비겁한 믿음과 노예근성을 부추겨서 모세를 힘들게 했습니다.
10.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실존적인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도 아브라함과 모세의 처지에서 하느님과 단독으로 마주섭니다. 칼데아 우르의 우상숭배나, 이집트의 가혹한 노예살이를 단호하게 떠나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떠날 수 있는 안목과 결심과 용기는 온전히 우리에게 달린 일입니다. 이는 개인만이 아니라 개별 민족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이치로서, 한국교회가 보편교회 안에서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정체성이 있다면, 그것은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라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때 어떠한 선교사도 우리 민족이 하느님을 믿도록 도와주지 않았지만 우리 교회의 창립 주역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하느님 신앙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서학 교리서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하느님을 믿는 삶, 하느님을 믿는 백성을 이루었습니다. 조선 왕조와 노론이 악랄하게 가한 백 년 박해에도 살아남았고, 일제가 부려먹은 반 세기 식민통치도 견디어 냈으며,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라 안에는 많이 어지럽습니다.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전히 흔들립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이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포도나무의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