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정전제와 현대의 토지제도 비교
중국고대철학 레포트
철학과
2015201037 노태영
토지는 각 시대마다 일정한 제도를 갖고 인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토지를 이용 및 개발, 관리 · 보존하기 위한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본문에서는 그중에서도 맹자가 주장한 ‘정전제’와 현대의 토지제도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맹자는 정전제를 통해 토지제도를 규정하였다. 왕은 백성의 부모라는 마음으로 산업을 장려하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며,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토지 제도인 정전제를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전제는 백성들의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하면서도 공동체 노동을 이끌어 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즉 생활 안정과 공동체의 실현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대는 임금이 장차 어진 정치를 베풀려고 그대를 선택하여 보냈으니, 그대는 아무쪼록 힘써 정전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대저 어진 정치란 반드시 농경지의 경계를 바르게 잡아 놓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경계가 정확하지 못하면 정전의 분할이 고르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수확되는 곡식과 지급되는 녹봉도 공평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폭군이나 탐관오리들은 반드시 농경지의 경계를 얼버무렸던 것입니다. 일단 경계가 명확해지면, 농경지를 나누어 주고 봉록을 제정하는 일쯤은 가만히 앉은 채로도 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등나라의 땅은 좁지만, 그 안에도 역시〔지배 계급인〕 군자가 있고 〔피지배 계급인〕 백성도 있습니다. 군자가 없으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고, 백성이 없으면 군자를 먹여 살리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너른 지역에 위치한〕 교외에서는 9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조법을 쓰시고, 〔성안의 좁은 들이나 수도에 근접한 땅인〕 교내에서는 〔정전의 구획이 상대적으로 어려우므로〕 10분의 1을 내는 철법을 쓰셔서 스스로 세금을 내도록 하십시오. 경 이하의 관리에게는 반드시 〔정전과 무관하게 구획하여 제사 비용으로 제공한〕 규전(圭田)을 소유케 하되 규전의 넓이는 50무로 하십시오. 만약 다른 집안에 잉여의 노동력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각각 25무의 땅을 더 주십시오. 이렇게 되면 백성이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거나 또는 집을 이사하더라도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전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오가며 서로 우애를 쌓을 것이며, 도적을 방어하고 서로 도우며 질병이 나더라도 서로 의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 사이가 친애하고 화목해질 것입니다.
정전법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방이 각 1리가 되는 땅을 하나의 정으로 구획하되, 이것은 900무입니다. 그 한복판의 100무의 땅이 바로 공전입니다. 여덟 가구가 저마다 사전 100무를 소유하며 이들이 공동으로 공전을 경작합니다. 공전의 일부터 마치고 나서야 감히 사전을 경작하는데, 이것은 군자와 일반 백성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정전제의 대략입니다. 이러한 제도로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은 임금과 당신께 달려 있습니다.”」
이는 문공이 정전제도에 대해 묻자 맹자가 답한 내용이다. 이 대화를 통해 맹자가 어째서 정전제도를 시행하자는 주장을 했는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위한 어진 정치를 할 수 있는지, 정전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임금이 어진 정치를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집행해야 하는 제도 중 하나가 바로 정전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전제는 고대부터 왕조사상에 터 잡은 토지소유권법사상이 기본 철학이 되었고, 이에 ‘공유’와 ‘균분’이라는 개념도 함께 작용한 제도였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정전제를 이상적인 조세법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를 현실적으로 실현시키기에는 어렵다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때문에 정약용은 이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을 추출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먼저 그는 선배 학자들의 의견을 비판하면서 정전제를 옹호하였다. 조선은 산이 많아 정전제를 실시할 수 없다며 이익의 의견을 비판하며 8결의 사전(私田)과 1결의 공전(公田)을 두는 방식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 · 수공업 등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이 분화되어 있어 토지를 분배하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인구의 과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모든 이들에게 토지를 균등히 분배하지 않아도 된다 하였다. 이 외에도 균전론과 한전론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정약용은 중국의 정전제를 변형하여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적용시키고자 하였으나 이는 정치적 · 제도적 어려움으로 인해 실시되지 못하고 과전법의 형태로 시행되었다.
후에 1910년에 이르러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일제 통치기간 동안 소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이로 인해 시장관계의 발전은 물론 토지의 집중화가 가속되었다. 또한 해방 직후 남한에서는 일제 식민통치하의 반봉건적 · 식민지적 토지소유 연장선상에서 지주와 토지가 없거나 토지가 적은 농민이 다수였다. 이러한 일제의 해방으로부터 이어진 1945년의 미군정청은 토지문제에 있어서 귀속 재산의 처리 등과 같은 토지 외적 요인과 겹쳐서 매우 복잡하게 처리되었다. 군정 3년에 걸쳐 발생한 문제 중 가장 큰 것은 농지개혁으로서 귀속농지의 분배를 비롯한 귀속재산의 처리였다. 전재복구시대의 토지제도는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왕토사상에 대한 기이 있는 성찰을 통하여 그를 계승 · 발전시키지 못하고 서구적 사소유권제도를 이식하여 확립시켰다. 또한 이 시기는 경자유전의 원칙(농지는 농사를 짓는 사람만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을 천명하여 토지소유의 형평성을 강조하였다는 특성이 있다.
현대인 1960년대에 와서는 대규모 국토개발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 기반을 조성하는데 치중하였다. 즉 이 시기는 토지개발과 경제성장의 시대 이념에 따라 토지제도도 개발 이념을 보조하는 수단에 불과하였다. 이 당시의 토지제도는 효율성만을 강조하였고, 1970년대에는 대규모사업개발으로 인한 토지시장의 과열도 조정 관리하는 양면적 정책을 추진하여, 지가안정과 불로소득 흡수가 토지제도의 핵심과제로 인식된 시기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중동건설 자금 유입으로 부동산투기가 극심하여 투기억제 대책이 마련되었다. 1980년대 역시 부동산 투기가 사회문제로 고착되고, 투기억제 대책과 부동산 경기부양 대책이 반복적으로 시행된 시기이다. 이때는 한 마디로 정부가 토지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할 수 있다. 공인중개사 제도 도입, 국토이용관리법 개정, 토지거래허가제, 토지개발에 따른 개발이익의 사유화 차단 등이 이때 행해졌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토지소유권은 공공의 이익이나 공공복리의 증진을 위하여 실정법상의 여러 의무와 제약을 감내하여야 하는 토지공개념이 생겨났다. 이는 재산권의 절대적 보장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폐단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유재산제도의 기본이념을 보호하려는 것에서 나왔다. 이러한 토지공개념 제도의 바탕 위에서 강력한 투기억제제도정책을 시행하였다. 토지공개념제도와 일반 경제 상황의 침체 등으로 지가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토지제도는 직접적인 시장개입 정책에서 시장관리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어서 농지소유상한제를 폐지하여 형평성 우선의 농지제도에서 효율성을 중심으로 한 제도로 전환하고 토지시장의 투명성 확보 및 정책 집행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제도를 도입하는 등 각종 전산망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1997년 말에는 외한위기를 맞아 부동산시장이 침체되었고, 이로 인해 폐쇄적이던 각종 토지제도를 전면 개편하고 토지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투기억제대책의 대부분을 수정하여 토지 수요를 촉진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공적 재화와 사적 재화로서의 성격과 함께 소유권과 이용권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으며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위한 방향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다. 토지를 나라의 것이 아닌 개인의 소유로 인정해주며, 그 이용권을 제한하여 공과 사의 공존의 형태로 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맹자의 정전제에서는 왕토사상이라 하여 모든 토지를 국왕의 것으로 하여 사전(私田)을 대여해주고 그 대가로 농민들은 공전(公田)을 경작한다. 때문에 세금을 노동력의 형태로 거둔다고도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맹자가 정전제를 주장한 이유는 농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농민들의 안정을 위해 토지를 균등 분배함으로써 농촌경제의 안정과 봉건제의 유지에 목적이 있다. 그에 반해 현대의 토지제도는 농촌의 안정보다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과 연관성이 더 크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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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정책, 유용순, 21세기사, 2013.
부동산 정책의 이해 :부동산 정책의 전개과정과 특징, 이종규, 부연사, 2014
류일용,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발전에 관한 연구」, 『토지공법연구』 19호, 한국토지공법학회, 2003.
인터넷
두산백과, 정전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93519&cid=40942&categoryId=333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859
김치완 교수님께
수업 중 맹자의 정전제가 저에게 호기심을 주었고 현대의 토지제도와 비교 분석을 해보려는 원대한 포부로 시작하였으나 분석까지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앞에서 정약용을 잠시 언급하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학부생의 열정으로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근현대 우리나라에서 토지제도가 큰 변혁을 겪은 것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북한과 한국에서 벌어진 일종의 토지개혁입니다. 북한은 토지공개념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토지몰수와 재분배 등의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자본주의 사유재산 개념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개발과 부동산 투자붐 등의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수정자본주의가 되면서 우리는 토지 공개념을 좀 더 선호하게 됩니다마는 여전히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라는 점에서 토지 문제는 늘 주요 국정정책과 맞물리고 있습니다. 일본 경우를 본다면 좀 더 빨리 토지 공개념이 수용되어서 과소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를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